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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9. 14:06
격물치지님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놀이기구, 자동완성 검색현상을 보고, 얼마전 이 블로그에서 있었던 해프닝이 생각났다. 같은 일은 아니였지만, 이번 일도 검색엔진이 만들어 준 낚시 아닌 낚시였다 ^^;;

티스토리에 보면 '유입 키워드'라는 플러그인을 사용, 어떤 키워드를 통해 내 블로그에 들어왔는지 볼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사람들이 어떤 경로로 들어오는지 궁금해서 가끔 확인하는데, 이번주에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1위 키워드로 그것도 48번이나 '죽은호스테스사진'이 키워드로 사용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참으로 이해안갈 일이였다. 죽은호스테스사진이라니... 내 블로그가 엽기나 호러블로그도 아닌데 ㅡ.ㅡ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키워드로 찾을 글이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다음에 가서 직접 검색을 해봤다. 그랬더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장 먼저 보여지는 글이 전에 올렸던 "한국교회 희망은 있는가?"라는 글이였다 ㅡ.ㅡ;;; "죽은 목사"와 "룸살롱의 호스테스"가 절묘하게 조합되어 새로운 트래픽을 만들어냈다. ^^;

근데 아직도 왜 마흔여덟명이라는 적지 않은 인원이 이런 키워드로 검색을 했는지 모르겠다. 내 글을 선택한 사람이 이 정도니 실제 인원은 훨씬 많았을텐데. 나도 모르는 뭔 일이 있었나 보다.

일전에 지인이 한말이 생각이 났다. 한번은 어릴적 옆집 누나에게 맞고 살았던 기억을 블로그에 적었는데, 그 다음에 트래픽이 늘었단다. 키워드는 '옆집누나'. 그 사람들이 어떤 것을 상상하고 들어왔을까? 그 사람들도 다 맞고 살았나? 잘 모르겠다 ^^;;;

이런 거 보면 사람들이 핫이슈에 얼마나 민감한가 하는 생각도 들고, 검색엔진이 오히려 잘못 가공된 정보로 인도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하여간 재밌는 세상이다.


**
쓰고 나니, 한사람의 죽음이 연관되어 있는데 희화화시켰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분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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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8. 13:51
여러번 적었듯이 일곱가지 습관은 저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제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삶의 원칙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몇년에 한번씩 책을 다시 들쳐보거나, 요약본을 다시 읽어보곤 하지요. 그런데 요즘은 나이가 드는건지 이 습관들이 전에 이해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일곱가지 습관중 첫번째는 "Be Pro-Active"입니다. 한국어판에는 "주도적이 되라"라고 해석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습관을 "스스로를 책임지라" 혹은 "앞으로 되어질 일을 예측해 미리 미리 준비하라"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Pro-Active라는 말이 그렇게 이해가 되어집니다. 기다리지 않고, 주도적으로 나서서 상황을 리드하라는 말로 주로 쓰이지요. 나아가 최근에 제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 이 습관을 "적극적이 되라 (Be Aggressive)"라는 것쯤으로 이해하고 행동한 듯 합니다.

적극적인 것 물론 좋은 일입니다. 상황을 주도하는 것도 그렇구요. 그런데 이 습관을 다시 들여다 보니,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있더군요. 머리로 알고는 있었지만, 가슴으로 이해되고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못했던 의미가요.

주도적이 되라는 첫번째 습관은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내가 선택할 수 힘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며 시작합니다. 작용이 주어질 때,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지는 내가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도적이 되라"는 것은 "내 인생은 나의 것"과도 약간 다릅니다.

스티븐 코비는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프랭클은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외부의 폭력이 자신의 정신세계만은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외부의 작용과 분리되어져 있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반작용에 대한 선택은 그 자신의 몫임을, 그것은 누구도 뺐어갈 수 없는 그의 권리임을 깨닫습니다.

많은 사람이 상황 탓을 합니다. 부모 탓, 못배운 탓, 정부 탓, 그리고 노무현 탓 ^^;; 물론 현상에 대해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잘못된 것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도 중요하구요. 하지만 첫번째 습관은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가기를 요구합니다. 상황이 당신 자신을 지배 못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정신이 단순히 작용-반작용으로 이루어진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람만이 자신의 생각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던가요? 스티븐 코비는 인간 정신의 특징으로 자아의식, 상상력, 양심, 독립의지를 들고 있습니다. 작용에 대해 정해진 반작용이 아닌 '내가' 선택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할 것 같습니다. 나쁜 일을 할지 좋은 일을 할지, 상황과는 관계 없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서든, 때를 기다리며 잠잠하든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무엇이 옳은가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는 나에게 있습니다. "이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은 결국 핑계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전에 영향력의 원, 관심의 원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관심을 가지는 (영향을 받는) 영역에 힘을 쏟지 말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라는 의미입니다. 첫번째 습관의 중요한 적용입니다.

다시 첫번째 습관을 생각하며 찾아낸 적용은 이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할 능력이 있다."  제가 요즘 굉장히 산만하거든요. 30분 이상 한가지에 집중을 못합니다. "난 기본적으로 산만해"가 지금까지 제가 사용한 변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죠. 변명은 변명일 뿐임을 인식하는 것이 첫번째 습관의 시작일 겁니다 ^^


2008. 2. 6. 09:33
며칠전 일이다. 큰 아이가 몇년간 써오던 Xbox와 게임들을 팔기로 했다. 기타히어로라는 게임을 해보고 쏙 빠져서 Xbox와 게임을 팔아 기타히어로를 사고, SAT 700점을 넘겨서 Wii를 사겠다는 작전이다. 꿈은 좋다 ^^;;; 어쨋든 게임기랑 게임이랑 바리 바리 싸들고 GameStop으로 갔다. 이곳에서는 쓰던 게임기와 게임을 사준다. 소위 트레이드인(trade-in)이다. 들인 돈은 몇백불이건만, 받은것은 90불이 채 안된다. 억울하지만 할 수 없다.

그런데 그곳에서 놀라운 ^^ 소식을 들었다. Wii 시스템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 Wii 사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아마 그날 오후에 들어왔나보다. 직원중 한명은 아예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을 보면. 그때 시간은 오후 5시. 내가 받을 돈이 얼마인가 계산하는 10분동안... 네명의 손님이 왔다. Wii 살려고 ㅡ.ㅡ 나도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계산하고 나도 하나 챙겼다 ^^;;;

집에 와서 이베이를 봤다. 포장 뜯지 않은 Wii는 정가인 250불에 5~60불 더 붙인 가격으로 팔리고 있었다. 순간 유혹이 생겼다. 이걸 팔고 다시 하나 사? 근데 언제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와이프에게 주문을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몰이 열리자마자 하나 더 사오라고. 일단 하나 확보해놓고 또 하나 사다 팔아 게임 하나 살 돈이나 장만하려고 말이다.

허나 아예 꿈도 못 꿀일이였다. 아침에 혹시나 하여 출근하며 전화를 했더니 전날 밤에 다 팔렸단다. 몇대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나절이 안걸렸다. 다 팔리기까지 ㅡ.ㅡ

Wii가 미국시장에 소개된게 2006년 11월 19일이다. 벌써 일년하고도 2개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이 모양이다. 백만개로 예상했던 월생산량을 백팔십만개로 올렸음에도 전세계적으로 Wii는 없어서 못판다. 오죽하면 닌텐도가 일부러 품귀현상을 만든다는 말까지 돌까? 하지만 일년이 넘게 없어서 못파는 것이 결코 회사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건 왠만한 경제상식만 있어도 당연한 거다. 정말로 엄청난 사람들이 Wii를 사려고 기다리고 있다. 도데체 Wii가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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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i... 너 도데체 뭔데 이렇게 고자세냐?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을 만들었을 때, 게임기 시장은 삼파전이였다. 닌텐도, 세가, 그리고 소니. 제일 먼저 떨어져나간 것은 세가였다. Xbox의 등장이 먼저였는지, 세가의 퇴장이 먼저였는지 기억이 안나지만, 모두들 그 다음 차례는 닌텐도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 이 두 고래의 사움에 닌텐도란 새우가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이 안갔던 거다.

내가 봐도 닌텐도는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게임큐브와 게임보이 둘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임으로 어찌 어찌 유지를 했다. 소니와 MS의 후속 모델이 나오면 결국 무대위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그랬던 닌텐도가 지금은 게임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2006년 11월에 판매시작한 Wii는 작년말 현재 전세계적으로 2000만대를 팔았다. 그럼에도 Wii의 품귀는 2009년까지 갈 거라는  예상이다. 얼마나 팔릴까? 5000만대?

게다가 게임기를 손해보며 팔고 게임타이틀로 남기는 소니나 MS와는 달리 Wii는 팔수록 남는다. 일본에서 팔면 13불,  미국 49불, 유럽에서는 대당 79불까지 남긴다고 하니, 소니나 MS 입장에서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배아파 할 일이다. 평균 30불만 쳐도 게임기에서 벌써 6억불 (6000천억) 정도를 남겼다는 것 아닌가.

Wii만큼 없어서 못파는 거는 아니지만, DS도 만만치 않다. 2004년 1월에 소개된 DS는 후속 모델인 DS Lite를 포함 지금까지 6500만대를 팔았다. 월별 최다 판매기록이 작년 11월에 깨졌다고 하니 DS Lite의 인기도 앞으로 몇년은 갈 것이 분명하다. 소니의 PSP가 나올 때 "이제는 휴대용 게임기도 소니야"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면 지금 닌텐도의 성공은 정말 극적인 역전드라마다.

닌텐도는 어떻게 해서 이런 역전을 가지고 올 수 있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게임은 게임콘트롤러(버튼과 스틱으로 조종하는)로 한다는 닌텐도 스스로 만들었던 원칙을 깨뜨린 것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Wii의 조종기에는 센서가 달려있어 움직임을 감지한다. 따라서 버튼만 누르던 기존 방식과 달리 조종기를 흔드는 것만으로 게임을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생각인데 그 효과는... 바로 밑의 비디오처럼 된다 ^^ 참고로 이들이 하는 게임은 권투다.



그래도 이정도면 얌전한 거라 할 수 있다. 골프나 테니스를 하다 조종기를 놓쳐 LCD TV를 박살냈다는 소리가 초기에는 꽤 들렸다. 닌텐도가 사람들의 열심을 과소평가해 손목에 묶는 스트랩을 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 정도로 열광할 줄 짐작했겠는가? ^^

발상의 전환은 DS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기존 휴대용게임기의 컨셉을 그대로 가져가서 극한으로 발전시킨 것이 소니의 PSP라면, DS는 여기서도 스스로 만든 컨셉을 파괴한다. 바로 터치스크린과 마이크로폰의 적용이다.

수퍼마리오 팩에 있는 미니게임을 플레이했을 때의 놀라움을 나는 잊지 못한다. 풍선을 불어서 하늘로 올려야하는데, 실제로 터치스크린을 향해서 입으로 후~ 하고 불어야한다. 마이크로폰으로 소리를 듣고 분석해 적당한 세기가 되어야 풍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거다. 그 기발함에 정말 감탄을 했다.

터치스크린과 휴대용의 장점이 조합이 되어 DS Lite는 남자 청.소년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게임을 여자와 어른들까지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뿐인가? 게임가능 연령을 아예 확 낮추기까지 했다 ^^



학부 수업 중 하나인 인간공학에서 하이터치에 대해 배운 기억이 난다. 하이터치란 하이테크와는 다른 개념으로 기술 자체를 개발하기보다는 기존에 있는 기술을 어떻게 응용하는가에 대한 것이였다. 'W'이론으로도 유명한 이면우 교수님은 하이터치의 예로 라디오의 가장 최근 방송 1분을 기억하는 칩이라던가, 사람마다 손실된 청력 범위를 강화해준 오디오등의 예를 들었다. 상대적으로 자본이 적은 한국에서는 하이테크도 중요하지만 하이터치는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닌텐도가 보여준 발상의 전환은 하이터치의 가장 멋드러진 예라 할 수 있다. 소니는 PS3를 위해 몇천억을 셀프로세서 개발에 투입했다. MS가 온라인 게임시장을 위해 쓴 돈도 거의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닌텐도가 한 일은? 하나당 5불짜리 센서를 단 것뿐이다. 휴대용 DS에는 터치스크린을 달고.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 터치스크린 둘 다 십여년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발상의 전환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게임기 컨셉의 대부분을 만든 회사가 바로 닌텐도다. 발상의 전환은 그들이 만든 전통적 개념을 스스로 깨야했다.

하지만 이런 발상의 전환을 하면서도 닌텐도가 놓지 않은 것이 있다. 난 그것이 획기적인 게임시스템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닌텐도는 자기 색깔을 바꾸지 않았다. 소니나 MS가 만들어놓은 "게임기 성능 전쟁"이라는 싸움에 끼여들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만든 싸움 - "즐기는 게임"에 상대방을 끌어들였다.

닌텐도는 항상 아이들을 위한 게임기라는 인식을 주어왔다. 닌텐도 하면 생각나는 게임이 뭔가? 나 같은 경우 수퍼 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이다. 그 밖에도 닌텐도에서만 돌아가는 타이틀들은 대부분 아이들을 위한 게임이다. 혹은 가족들이 둘러앉아 같이 해도 무리가 없는 게임들이다. 반면에 다른 게임기들의 경우 온가족을 위한 타이틀이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소니의 Grand Trisumo (자동차 경주) 정도나 가능할까? 온가족이 모여서 운전하던 할머니를 끄집어내고 차를 뺐는 (플스의 GTA 시리즈) 장면, 혹은 서로 총을 쏴대는 (Xbox의 Halo등 다수) 장면을 상상하면 닌텐도의 게임들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있다.

이는 닌텐도의 처음 게임기의 이름이 '패미콤'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가족들을 위한 컴퓨터"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게임을 즐기는 모습. 그것이 닌텐도가 처음부터 바래왔던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Revolution(변혁)이라는 개발중에 사용했던 코드네임을 버리고 Wii('We' - 우리)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도 같은 흐름이다. 닌텐도는 가족을 위한 게임이라는 자신들의 가치를 버리는 대신, 그것을 아예 확대시켜버렸다. 그리고 소니와 MS에게 멋지게 반격을 한 것이다.

짐콜린스의 Good to Great에 보면 평범하던 회사가 뛰어난 회사로 성장하면서 보여준 특징 중의 하나로 고슴도치 컨셉을 이야기 한다. 여우와 고슴도치라는 우화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간단하게 말해 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라는 것이다. 복잡한 세상을 중심가치를 기준으로 파악하고 그외의 것은 무시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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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콜린스는 중심 가치를 찾는 패러다임으로 세가지를 제시한다. 어디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최고로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속적으로 돈을 버는 방법 (economic engine)은 무엇인가?  여우가 똑똑한듯해도 집중을 못하고 여기저기 좇아다니며 실속이 없는데 반해 고슴도치컨셉을 가진 회사들은 착실하게 성장을 해간다. 닌텐도는 게임, 특히 가족들이 같이 즐길 수 있는 게임기를 만드는데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게임기를 저렴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주요 고객이 파워풀한 게임기를 찾는 하드코어 게이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보다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적인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돈을 벌어준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건 다 내 해석이다 ㅡ.ㅡ 어쨋든 요즘 닌텐도가 보여주는 모습은 고슴도치컨셉의 모범사례다 ^^;;)

자신의 색을 확실하게 지키는 동시에 발상의 전환을 통한 새로운 영역의 창출. 참 멋진 일이다. 돌아보면 나는 나의 중심가치를 버려두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물론 안주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나의 본거지를 버려두고 상대방이 만들어놓은 게임에 무작정 뛰어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색을 지키면서 한단계 업그레이들 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나는 자신의 색을 지키는, 그러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회사를 좋아한다. 닌텐도도 그 중 하나다. 얼마전 360이나 PS3처럼 DVD를 플레이할 수 있는 Wii를 만든다는 발표가 있었다. 혹시 Wii의 성공에 취해 MS와 소니가 만들어놓은 싸움에 뛰어들겠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게 기우이길 바란다. 그리고 다음에는 어떤 발상의 전환이 이 회사를 통해 나타날지, 2월 14일에 설치할 Wii를 플레이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야겠다 ^^;;; (왜 2월 14일까지 기다리는지는 이 글을 읽으시면 알 수 있다)




2008. 2. 4. 16:17
#1.

최근 일년동안, 아니 훨씬 이전부터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는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그 얼마전부터 우리 가족은 나와 아버지를 빼놓고는 모두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환경의 영향도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놀러다니다 "심심해서" 가족들이 다니던 교회에 들어섰던 그날 오후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이후 기독교는, 그리고 교회는 내 삶에서 빼놓기 힘든 것이였다. 목사가 되고 싶었던 중고생 시절, 독재와 사회 모순에 대한 대안으로 기독교 밖에 없다 믿었던 대학시절을 보냈다.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고, 부모님을 보내드리고, 미국에 오는 인생의 굴곡에 맞추어 신앙의 업다운도 경험했다. 그리고 지난해 그동안 회피하고 있었던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정말 믿을만한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답을 찾기 쉽지 않은 질문들을.

#2.

질문과 고민으로 점철된 2007년 말에 이 책을 만났다. "내려놓음" 2006년과 2007년에 걸쳐 5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이 책을 쓴 이용규선교사는 원래 역사학도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하버드에서 중동사로 박사를 받았다. 박사를 받고나서 신학이나 선교학 공부도 하지 않은 저자는 몽골로 날아간다. 몽골국제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이레교회의 담임으로, 부인은 몽골영양개선연구소의 소장으로 그 지역을 섬기고 있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저자가 경험했던 "은혜"를 기록하고 있는 일종의 간증서적이다.

간혹 어떤 간증서적은 개인의 경험과 보편적 진리를 혼동해서, 자신이 겪은 일이 전부인양 주장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간증서적을 즐겨읽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일관된 추천 때문이였다. 그렇게 좋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을 제시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런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오랜 교회 생활로 머리만 커지고 줏어들은 것은 많았기에,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이미 한번씩은 들어봤던 원리와 비슷한 경험들이였다. 하지만 고민 하나는 나에게 확실하게 던져주었다. 그것은 '과연 믿는다는게 도데체 뭔가?'라는 질문이다.

#3.

책을 통해 나타나는 이용규선교사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을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지도교수가 바뀌면서 준비하던 논문을 재구성해야 했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기에 기도하면서 결정했던 기간내에 졸업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믿고 맡기며 한달반을 준비한 결과 예상보다 너무나 쉽게 정리가 되었다. 새로운 교수도 그 결과에 너무 흡족해했고 원하는 시기에 졸업할 수 있었다. 제2외국어로 선택한 독일어가 너무 힘들어 논문심사에 떨어질 위험이였지만 다행히 번역할 본문으로 로마서가 나와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혹은 차가 없는 사람들을 태우고 교회에 가고 싶어서 미니밴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문제가 많아 팔 수도 없던 차를 누가 뒤에서 받았다. 차는 완전히 부서졌는데, 다행히 보험회사에서 산 가격보다도 더 많이 보상을 해주어 아주 쉽게 중고 미니밴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이런식을 우연들이 가득 차 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비판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선택적 관찰'이다. 잘 되도 신의 뜻, 잘못 되도 신의 뜻. 이렇게 해석을 하고 나면 세상에 신의 뜻이 아닌게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도 같은 비판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학을 가기전 그는 공부하던 중국사를 계속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중국사로 지원한 학교는 다 떨어지고, 중동사로 지원한 하버드에 붙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생각한다. 원하고 기도하던 것을 받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지금의 선교를 감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였다는 거다. 반면, 아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영양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선교에 쓰이게 되었다.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도 그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였다.

하지만 그저 벌어진 일만 놓고 본다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뜻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신의 인도하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이른바 믿음이 성장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신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 이렇듯 이성적으로 접근했을 때 신에 대한 믿음이 자라날 틈은 별로 없다.

#4.

사실 기독교에는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아이러니들이 상당히 많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은 중요한 전쟁을 준비하며 제사장인 사무엘을 기다린다. 하지만 사무엘은 약속한 기한인 일주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백성들의 사기는 떨어져 도망가기 시작한다. 이에 사울은 스스로 제사를 지내고, 그 이후에야 도착한 사무엘은 오히려 사울을 책망한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사실 사울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말이 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상황에 따라 유연한 선택을 한 사울은 좋은 리더다. 게다가 먼저 약속을 어긴것은 사무엘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한다.

이 책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다. 어떤 문제를 놓고 시한이 다 되도록 기도해도 응답이 없더라는 말에, 저자는 이렇게 질문을 한다. "해결시한이 다 지나고 나서도 믿고 기다려 본적이 있느냐"라고. 집안 문제로 인해 백만원이 급히 필요하다고 치자. 내일 아침에 필요한데 밤 열두시가 다 되었는데, 돈 나올 구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다 믿어진다면 믿고 기다리는게 신앙이라는 것이다.

살아 생전 오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조지 뮬러의 일화는 많이 알려져 있다. 평생 고아원을 운영하던 뮬러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았다. 어느날도 당장 다음날 아침 아이들 먹일 식량이 없었다. 마침 같은 지역의 정치인이 기부금을 냈는데, 그 금액이 아이들을 먹이고 남을만큼 충분했다. 하지만 이 정치인이 부도덕한 인물이였는지 뮬러는 그 돈을 거부했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 기대했을 때 다음날 아침 근처 제과점에서 원래 시간보다 조금 더 요리된, 하지만 먹기에는 충분한 빵을 보내왔다. 딱 아이들을 먹일만큼의 양이였다고 한다.

학비야 장학금을 받는다 쳐도 매달 2000불 정도가 생활비로 필요했다. 근처에 넉넉한 사람이 없기에 어디 도움 받을데도 없었는데도 이용규선교사는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한다. 한번도 여유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부족한 적도 없었단다. 누구는 그럴 것이다. "그만큼 열심히 그리고 검소하게 살았을꺼야." 당연히 그는 검소하게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5.

지난 일년간 나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접근했다. 누군가 신앙은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반응"이라고 했다. 난 그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신앙은 머리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내 삶에서 "선택적 관찰"의 한가지 예를 경험했다. 이전 일을 내려놓고 다음 일이 결정되기까지 세달의 기간동안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사업부의 최고 책임자에게도 여러번 불평을 했다. 그래도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날 내가 참 교만했다는 생각을 했다. 절대자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나를 깨달았고, 그 문제를 내 손에서 내려놓았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절대적인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당신이 계시다면 당신이 책임져주세요"하고 하나님에게 맡겼다. 그리고 일주일도 채 안되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몇가지의 옵션이 주어졌고, 그 중에는 평소에 원했던 일보다 더 좋은 일도 있었다. 내가 최종목표로 삼는 일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일이다. 추가로 이전에 하고 싶었던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아직도 남아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조건이 좋아진 것이다.

우연이라 해석할 수 있다. 시기가 무르익었기에, 충분히 기다렸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맘 깊은 곳에 침잠해 들어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 물어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라는 답을 듣는다. 그런 대답을 듣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믿고 싶으니까, 믿는 것일 수도. 하지만 그런 "우연"들이 계속된다면.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현상들이 "믿음의 눈"으로 해석된다면, 그게 바로 믿는다는 것이 아닐까? 내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참 많다. 그리고 나도 그런 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6.

아직도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세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을 배제하고도 세상은 해석되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는 없다. 절대자를 배제하고는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못찾겠다. 신이 있을 때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다.

그렇기에 나는 신을 믿고 싶어하고, 절대자를 그리워한다. 놀랍게도 내가 그를 따르려고 할 때 이성적으로 100%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너무나 좋은 "우연"들이 생기고,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가치있게 해석이 된다. 그를 의지할 때 행복하고, 그를 생각할 때 나의 결점들이 보인다. 그의 사랑을 느끼며,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 말씀에 순종하려 노력할수록 나는 내가 조금씩 더 "훌륭"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직도 난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을 소망한다. 하지만 분석만 한다고 이해되어지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인정한다. 내가 그 길을 걸어갈 때, 비록 하루 하루 이해할 수 없어도 돌이켜 보면 그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이였음을 믿게되는 것. 그것이 믿음임을 이 책 "내려놓음"이 가르쳐 주었다.

왜 그렇게 만드셨는지. 왜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없게 해놨는지 솔직히 불만이다. 그리고 죽고나면 따질 것이다. 그럼에도 절대자가 그것을 원한다면, 내가 어찌하겠는가. 결국 직접 걸어봐야 이해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걸어가 보면 그길은 더이상 착각, 망상, 혹은 자기 세뇌가 아니다. 그 길은 현실이 된다.





2008. 2. 1. 17:04
경영이나 회계쪽을 보면 '오버헤드(Overhead)'라는 말을 볼 수 있다. 혹은 '버든(Burden)'이라는 표현도 한다. 한국말로 마땅히 번역한 단어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이 단어들을 쓰기도 한다.

계산 방식에 따라 약간씩 차이야 있겠지만, 오버헤드의 정의는 직접적으로 제품 생산에 공헌하지 않는 간접비용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공장임대료, 전기세, 기계구입비, 청소용역회사 비용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중에는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관리자들의 연봉도 포함되어 있다. 일인당 가장 큰 오버헤드 비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면 단연 CEO를 포함한 임원회의 사람들일 거다.

오버헤드라는 말을 쓰든 버든이라는 말을 쓰든, 긍정적인 느낌보다도 부정적인 느낌이 더 많이 느껴진다. 잘 하면 회사 전체에 도움이 되지만, 안되면 짐만 된다는 말일 거다. 그런데 요즘은 오버헤드인 사람들이 훨씬 더 힘이 세다. 요즘 미국의 분위기는 아래 쪽의 만화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 이해가 안가네. 인력을 간소화할려고 예산을 한참 줄였건만, 왜 회사 움직이는게 이 모양이지?"



미국 회사에서 일한지 9년 가까운 세월동안 여러번의 정리해고를 보았다. 이유는 한결 같다. 상황이 안좋으니 회사를 더 가볍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정리해고 되는 사람들의 80% 이상이 실무진들이다. 매니저가 나가는 경우는 참 드물다. 회사에 별로 공헌하는 것도 없이 연봉만 더 받는 매니저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이런 현상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 심해진다.

'오버헤드'는 결국 실질적으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역할이다. 그것이 사무실 청소이든, 회사의 방향을 잡는 거든 말이다. 그 일을 잘 해내지 않으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책임져야할 짐이 될 뿐이다.

나도 어느덧 오버헤드로 분류된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하지 않아야겠다. 후배 사원들에게 짐이 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오버헤드의 말뜻을 항상 잊지 말아야겠다고 한다면 너무 심한 비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