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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22. 01:16
이 글은 전에 올린 "미스터 브룩스 -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와 연결되어 있는 글입니다. 원래 하나의 글로 쓰다가 성격이 약간 다른 것 같아 분리했습니다. 이전 글을 읽고 이 글을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신문 기사를 읽다보면 가끔 "어떻게 사람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일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마저도 더 이상 놀라움이 아니다. 그래도 화가 나서 저지른 우발적 행동, 혹은 생활고로 인한 자살등 설명한 건덕지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지속적으로 나쁜 일을 저지르면서 양심의 가책을 못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본 기사중 가장 지독한 것은 친딸, 친동생을 몇년간 성폭행한 사건이다. 음란물을 보던 오빠가 초등생이었던 동생을 협박해서 성폭행했다. 근데 더 황당한 것은 그걸 안 아빠가 거기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아빠와 아들이 번갈아 딸/동생을 성폭행했다고 한다.

이런 기사를 보면 인간에 대한 회의를 지나 궁금하기까지 하다. 도데체 어떤 사람이 이런 악한 일을 지속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걸까?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게 있는데,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인간성도 없는 걸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럴 수 있는 걸까? 이런 기사를 볼 때면 나는 성악설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만 있는 건 아니다. 나 또한 내 안에 나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내안에 순간적으로 나쁜 마음이 드는 것을 나는 안다. 예를 들어보자. 순진했던 어린 시절을 ^^ 지나 성에 눈뜨기 시작했던 고등학교 시절, 간혹 강간을 상상했던 나를 기억한다. 모르겠다. 내가 불량 학생이였나? 그렇지도 않다. 비윤리적이였나? 아니다. 게다가 굉장히 종교적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쑥 불쑥 생기는 악한 마음 때문에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나 규칙이나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폭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작은 경우는 사회나 환경에 대한 반항이고, 커질 때는 범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안의 나쁜 생각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제대로 살아갈려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더 많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를 나쁜 마음에 제동을 거는 그 무엇때문이라 생각한다. 마틴 루터가 말했다. "머리 위에 새가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라고. 나쁜 생각이 드는 것까지 막을 수야 없지만, 그 생각이 또아리를 틀고 자라나는 것은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악한 생각이 들었을 때 제동을 걸어주는 그 무엇.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 부른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알려주는 방향타인 것이다. 양심이라 불리우는 이 브레이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험악한 곳이 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 브레이크가 존재하지 않는 곳. 그곳이 지옥이라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이 브레이크에 대해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브레이크를 해제시키려 한다. 물론 겉과 속이 다른, 깨끗하고 교양있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 멋대로 해라"가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상함이 위선으로 통하고, 경박스러움이 솔직함으로 인정받는 세상이 정말 '옳은' 세상인가? 하나 하나 마음 속의 브레이크를 해체하면서 마음 가는데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라 말하며, 결국 선과 악에 대한 것까지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 보기 힘든 영어단어가 있다. 죄(Sin)라는 단어다. 교회 안에서나 이 단어가 쓰이지 밖에서는 전부 범죄(Crime)로 바뀌었다. 요즘은 나아가 현상이나 문제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죄라는 말은 절대적인 기준을 전제로 한 말이다. 이에 반해 범죄란 인간이 만든 기준에 관한 말이다. 죄에는 절대적인 개념이고, 범죄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범죄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죄의 기준은 달라지지 않는다.

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회분위기는 절대선을 인정하지 않는 현대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다. 물질주의에 기준해 보면 우리 마음속의 양심, 규칙, 그리고 절대선에 대한 개념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혹은 동양사상에는 하늘(세상)의 도로 해석한다. 인격신은 아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양심이나 윤리성을 '신이 있는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에는 절대선(신)이 존재하고 그 절대선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양심의 근거가 인격신이여야 할 필요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논리는 이렇다. 비인격적 자연에서 어떻게 인격적인 윤리성이 나올 수 있는가. 그리고 윤리성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는 대치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보다 반대편의 주장(자연적 생성 혹은 비인격적인 하늘의 도)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며 절대선을 생각하고 양심을 만들어냈다고 믿겨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아니 모든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한몸 잘 살기 원하고, 내 식구들 편하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의 근본 성향이다. 그런데 어떻게 희생 정신 같은 것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절대적인 원칙은 존재한다. 앞에 소개한 아빠와 아들의 예를 들어보자. 이들의 행위가 옳다고 인정되는 시대/사회/집단이 있을 수 있을까? 어느 경우에든 절대적으로 그들은 나쁘다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어떻게 주어진 것일까?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다. 그 가족 안에서 벌어진 것이다. 다른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한 소녀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나쁜 행위를 인정한다면 사회를 유지하는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에? 어느 것도 절대적인 이유가 되기 힘들다. 사람은 전쟁이나 자기보호를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의 행위가 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것도 아니다. 가족 안의 일이다. 쪼개 놓고 보면 상황논리로 정당화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누가 뭐래도 이들을 죽일 놈들이다.

무엇이 절대선인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정할 수 있는가?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의문들은 남아있다. 그럼에도 절대선은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절대선, 양심, 윤리성...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상황논리로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원칙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 속의 악한 생각을 제동 걸어줄 브레이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브레이크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세상에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선은 필요하다.

그리고 절대선이 자연적인 산물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절대원칙을 무효화시키면서 세상이 더 살기 좋아졌는가? 사람들 마음속의 선한 것들이 더 많이 표출되어지는가? 도그마는 없어졌을지 몰라도, 세상은 더 악해져간다고 생각지 않는가?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절대선이나 윤리성이 생겨났을까? 한번 망해보면 생길까? 몇천년 후에?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선은 자연적 산물은 아니다.

그 절대선이 인격적 원인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은 다음 단계의 이야기이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지만, 한편 신앙이 없이는 넘어갈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어느 단계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을 말하면 나는 신이 인간에게 양심을 주었고, 그 신이 절대선임을 믿는다. 일년 남짓 고민하고, 아직도 모든것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그래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것은 내 마음을 들여다 본 결과이다. 언젠가 이런 개인적인 고백을 정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