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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23. 13:18
만약 우리의 삶이 정말 현생 뿐이라면...
영혼이란 없는 거고, 숨이 끝나는 순간 의식도 끝이라면...

온 우주가 정말 빅뱅으로 생겼는지 확인할 수 없다.
공룡들이 주라기 공원에 나오는 모습처럼 생겼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왜 생겨났고, 무슨 의미로 살아야하는지 찾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봤다는 원반들이 정말 외계에서 온 것인지 알수 없을 것이다.
네스호에서 보인다는 목긴 동물의 정체가 뭔지 모른채로 끝날 것이다.
지구인들이 살기에는 태양계 하나로 충분한데 왜 우주는 이렇게 큰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다.
고주몽이 정말 활을 잘 쐈는지, 아들 유리왕과 사이가 정말 좋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순신 장군은 왜 마지막 전투에 갑옷을 입고 나가지 않았는지, 정말 그는 그때 죽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예수님은 정말 마굿간에서 태어났는지, 헤롯은 정말 애들을 죽였는지 알 수가 없다.
왜 로마는 호구조사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어리석은 명령을 내렸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언제 만났는지, 첫 데이트 때 어떤 설레임을 느꼈는지 알 수가 없다.
내 사랑하는 예한이 예지가 나 죽고 난 후 어떻게 살지 볼 수가 없다.
생각만 해도 애틋한 사랑하는 내 아내의 입술에 더이상 키스할 수가 없다.

...

알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데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볼 수 없다면...
난 죽어서도 아마 눈을 못 감을 것 같다.


2008. 1. 23. 13:1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컴퓨터나 새로운 전자제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국에 오면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CompUSA다. 처음 미국와서 3년정도 살던 아파트의 바로 옆에 CompUSA가 있었다. 컴퓨터를 좋아하고 또 그때만해도 직접 조립도 했었기에 이곳을 참 많이 들락거렸다. 별로 살 것 없어도 휘~ 들러보고... 싸게 나온 게임 있음 들었나 놨다 하면서 ^^

이곳이 2008년 1월말이면 문을 닫는다. 작년초에 매장수를 절반으로 줄이면서 회생의 기회를 잡으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였나보다. CompUSA의 위기는 오래전부터 예견되어졌다. Dell등 컴퓨터를 조립해서 판매하는 회사들의 가격이 손수 조립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해지고, 컴퓨터의 성능이 충분히 좋아지면서 전처럼 자주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에 따른 매출 부족을 매꾸기 위해 DVD Title도 가져다 팔고, Home Entertainment로까지 영역을 넓히려고 애를 썼지만, BestBuy등 경쟁자들보다 10% 정도 비싼 가격을 유지하는한 경쟁이 될 수가 없었던 거다. 기존 시장이 작아지면서 새로운 시장으로 진출했지만 그 시장을 지키고 있던 기존의 경쟁자들을 넘어설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팔리고 만 것이다.

1984년에 설립되어 Computer City, Good Guys등의 동종업체를 삼키며 한때 CompUSA도 잘나가는 때가 있었다. 미전역에 230개의 대형매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공룡의 덩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런 상황을 예견했을까? 예견했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까?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아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어쨋든 CompUSA는 변화에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을 닫게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좋아했던 곳이고, 또 처음 봤을 때는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회사가 문을 닫는 것을 보면서,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새삼 깨닫게 된다. 이제 CompUSA란 이름은 여기 저기 Case Study에서나 듣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세상에 영원한 강자는 없다는 말이 기억난다.



2008. 1. 22. 06:55
1월 21일 오늘은 미국 전체가 마틴 루터 킹(정확하게는 마틴 루터 킹 Jr.)을 기념하는 날로 지냅니다. 그의 생일인 1월 15일에 가장 가까운 월요일이 마틴 루터 킹의 날이지요. 학교도 관공서도, 은행도 문을 닫습니다. 하지만 이런 국경일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의 인종간 평등은 멀고 먼 길입니다. 하물며 마틴 루터 킹이 살던 당시에는 어땠을까 생각하니 그의 위대함이 새삼 다가옵니다. 그의 꿈이 실현될 때 미국은 진정 위대한 국가라 불릴 수 있을 겁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념하는 오늘. 그의 기념비적인 1963년 8월 28일의 연설을 옮겨봅니다. 연설 전문은 이곳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자유를 위한 가장 훌륭한 시위가 있던 날로 기록될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백 년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이 노예해방령에 서명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그 상징적인 자리입니다. 그 중대한 선언은 불의의 불길에 시들어가고 있던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희망의 횃불로 다가왔습니다. 그 선언은 오랜 노예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즐겁고 새로운 날의 시작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흑인들이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백 년 후에도 흑인들은 여전히 인종 차별이라는 속박과 굴레 속에서 비참하고 불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 년 후에도 흑인들은, 이 거대한 물질적 풍요의 바다 한가운데 있는 빈곤의 섬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 년 후에도 흑인들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한 귀퉁이에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끔찍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국가로부터 받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야 할 시기에 온 것입니다. 이 나라의 개척자들이 헌법과 독립선언문에 훌륭한 구절을 적어 넣었을 때, 그들은, 모든 미국인이 상속받게 되어 있는 약속어음에 서명한 것입니다. 그 약속어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삶과 자유, 행복 추구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이, 시민의 피부색에 관한 한, 이 약속어음이 보장하는 바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미국은, 이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흑인들에게 잔고부족이라는 도장이 찍힌 채 되돌아오는 불량어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의의 은행이 파산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있는 거대한 기회의 금고에 잔고가 부족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갖고 있는 이 수표를 현금화하기 위하여 여기에 왔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즉시 풍성한 자유와 정의를 확보해 줘야 할 수표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바로 지금“이라고 하는 이 순간의 긴박성을 미국인들에게 일깨우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선 냉정을 되찾으라는 사치스러운 말을 들을 여유도, 점진주의라는 이름의 진정제를 먹을 시간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민주주의의 약속을 실현할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어둡고 외진 인종 차별의 계곡에서 벗어나 햇살 환히 비치는 인종간의 정의의 길에 들어설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신의 모든 자손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줄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인종간의 불의라는 모래 위에서 형제애라는 단단한 바위 위로 올라서야 할 때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긴박성을 간과하고, 흑인의 결의를 과소 평가한다면, 그 것은 이 나라에 치명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흑인들의 정당한 불만이 표출 되는 이 무더운 여름은 자유와 평등의 상쾌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1963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만일 이 나라가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간다면, 흑인이 좀 진정을 하고 만족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친 방식으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흑인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받기 전에는 미국에 휴식도 평온도 없을 것입니다. 정의가 실현되는 밝은 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 나라의 기반을 뒤흔드는 폭동의 소용돌이가 계속될 것입니다.

정의의 궁전으로 이르는 출발점에 선 여러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정당한 위치를 찾을 때까지는, 나쁜 행동을 해서 죄인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점입니다. 비탄과 증오로 가득 찬 술잔을 들이키는 것으로 자유를 향한 갈증을 달래려 하지 맙시다.

위엄과 원칙이 있는 높은 곳을 향한 투쟁을 영원히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의적인 저항이 폭력으로 변질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또다시, 우리의 힘이 영혼의 힘과 맞닿을 수 있는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 흑인 사회를 휩쓸고 있는 저 새롭고도 훌륭한 투쟁 정신이 백인의 불신을 받는 데로 이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백인이 증명하듯이, 우리의 많은 백인 동지들은 그들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과 이어져 있으며, 그들의 자유가 우리의 자유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혼자서만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 전진해야 한다는 맹세를 해야 합니다.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권운동가에게 “언제가 되면 만족하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흑인이 경찰의 무지막지한 폭력의 공포에 희생되고 있는 한, 우리에게 만족이란 없습니다. 흑인이 여행하다가 피곤에 지쳤을 때 고속도로 근처의 여관이나 시내의 호텔에 잠자리를 얻을 수 없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이 이주한다고 해야, 고작 작은 흑인 거주지에서 더 큰 흑인 거주지로 가는 것이 전부일 때, 우리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미시시피의 흑인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뉴욕의 흑인이 마땅히 투표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정당성이 힘찬 흐름이 될 때까지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이 재판을 받다가 여기 오게 되었다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좁은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를 추구하다가 도리어 기소되어 두들겨 맞거나, 경찰의 야만스런 폭력에 고통받는 지역에서 오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오는 갖가지 고통을 겪는데는 베테랑입니다. 그런 고생이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계속 일하십시오.

미시시피로 돌아가십시오. 앨라배마로,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조지아로, 루이지애나로 돌아가십시오. 우리들의 현대적인 도시인 빈민가로, 흑인 거주지로 돌아가십시오. 상황이 달라질 수 있고, 달라질 것이라는 점은 명심하고 계십시오. 이제 절망의 계곡에서 뒹굴지는 맙시다.

나의 친구인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고난과 좌절의 순간에도,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이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 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던 저 황폐한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가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주지사가 늘 연방 정부의 조처에 반대할 수 있다느니, 연방법의 실시를 거부한다느니 하는 말만 하는 앨라배마주가 변하여, 흑인 소년 소녀들이 백인 소년 소녀들과 손을 잡고 형제 자매처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날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지고,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사람이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는 꿈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것이 내가 남부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가는 신념입니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절망의 산을 개척하여 희망의 돌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이 나 라의 이 소란스러운 불협화음을 형제애로 가득 찬 아름다운 음악으로 변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신념이 있으면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투쟁하고 함께 감옥에 가며, 함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자유로워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모든 자식들이 새로운 의미로 노래 부를 수 있는 날이 될 것입니다.

“나의 조국은 자유의 땅, 나의 부모가 살다 죽은 땅, 개척자들의 자부심이 있는 땅, 모든 산에서 자유가 노래하게 하라.“

미국이 위대한 국가가 되려면, 이것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유가 뉴햄프셔의 거대한 언덕에서 울려 퍼지게 합시다.

자유가 뉴욕의 큰 산에서 울려 퍼지게 합시다.

자유가 펜실베니아의 앨러게니 산맥에서 울려 퍼지게 합시다.

콜로라도의 눈 덮인 로키 산맥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캘리포니아의 굽이진 산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조지아의 스톤 마운틴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테네시의 룩아웃 산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미시시피의 모든 언덕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모든 산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할 때, 모든 마을, 모든 부락, 모든 주와 도시에서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할 때, 우리는 더 빨리 그 날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모든 자손들,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이교도, 개신교도와 가톨릭 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 영가를 함께 부르는 그 날이 말입니다.

“드디어 자유, 드디어 자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


2008. 1. 22. 01:16
이 글은 전에 올린 "미스터 브룩스 -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와 연결되어 있는 글입니다. 원래 하나의 글로 쓰다가 성격이 약간 다른 것 같아 분리했습니다. 이전 글을 읽고 이 글을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신문 기사를 읽다보면 가끔 "어떻게 사람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일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마저도 더 이상 놀라움이 아니다. 그래도 화가 나서 저지른 우발적 행동, 혹은 생활고로 인한 자살등 설명한 건덕지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지속적으로 나쁜 일을 저지르면서 양심의 가책을 못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본 기사중 가장 지독한 것은 친딸, 친동생을 몇년간 성폭행한 사건이다. 음란물을 보던 오빠가 초등생이었던 동생을 협박해서 성폭행했다. 근데 더 황당한 것은 그걸 안 아빠가 거기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아빠와 아들이 번갈아 딸/동생을 성폭행했다고 한다.

이런 기사를 보면 인간에 대한 회의를 지나 궁금하기까지 하다. 도데체 어떤 사람이 이런 악한 일을 지속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걸까?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게 있는데,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인간성도 없는 걸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럴 수 있는 걸까? 이런 기사를 볼 때면 나는 성악설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만 있는 건 아니다. 나 또한 내 안에 나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내안에 순간적으로 나쁜 마음이 드는 것을 나는 안다. 예를 들어보자. 순진했던 어린 시절을 ^^ 지나 성에 눈뜨기 시작했던 고등학교 시절, 간혹 강간을 상상했던 나를 기억한다. 모르겠다. 내가 불량 학생이였나? 그렇지도 않다. 비윤리적이였나? 아니다. 게다가 굉장히 종교적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쑥 불쑥 생기는 악한 마음 때문에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나 규칙이나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폭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작은 경우는 사회나 환경에 대한 반항이고, 커질 때는 범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안의 나쁜 생각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제대로 살아갈려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더 많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를 나쁜 마음에 제동을 거는 그 무엇때문이라 생각한다. 마틴 루터가 말했다. "머리 위에 새가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라고. 나쁜 생각이 드는 것까지 막을 수야 없지만, 그 생각이 또아리를 틀고 자라나는 것은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악한 생각이 들었을 때 제동을 걸어주는 그 무엇.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 부른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알려주는 방향타인 것이다. 양심이라 불리우는 이 브레이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험악한 곳이 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 브레이크가 존재하지 않는 곳. 그곳이 지옥이라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이 브레이크에 대해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브레이크를 해제시키려 한다. 물론 겉과 속이 다른, 깨끗하고 교양있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 멋대로 해라"가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상함이 위선으로 통하고, 경박스러움이 솔직함으로 인정받는 세상이 정말 '옳은' 세상인가? 하나 하나 마음 속의 브레이크를 해체하면서 마음 가는데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라 말하며, 결국 선과 악에 대한 것까지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 보기 힘든 영어단어가 있다. 죄(Sin)라는 단어다. 교회 안에서나 이 단어가 쓰이지 밖에서는 전부 범죄(Crime)로 바뀌었다. 요즘은 나아가 현상이나 문제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죄라는 말은 절대적인 기준을 전제로 한 말이다. 이에 반해 범죄란 인간이 만든 기준에 관한 말이다. 죄에는 절대적인 개념이고, 범죄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범죄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죄의 기준은 달라지지 않는다.

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회분위기는 절대선을 인정하지 않는 현대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다. 물질주의에 기준해 보면 우리 마음속의 양심, 규칙, 그리고 절대선에 대한 개념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혹은 동양사상에는 하늘(세상)의 도로 해석한다. 인격신은 아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양심이나 윤리성을 '신이 있는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에는 절대선(신)이 존재하고 그 절대선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양심의 근거가 인격신이여야 할 필요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논리는 이렇다. 비인격적 자연에서 어떻게 인격적인 윤리성이 나올 수 있는가. 그리고 윤리성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는 대치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보다 반대편의 주장(자연적 생성 혹은 비인격적인 하늘의 도)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며 절대선을 생각하고 양심을 만들어냈다고 믿겨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아니 모든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한몸 잘 살기 원하고, 내 식구들 편하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의 근본 성향이다. 그런데 어떻게 희생 정신 같은 것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절대적인 원칙은 존재한다. 앞에 소개한 아빠와 아들의 예를 들어보자. 이들의 행위가 옳다고 인정되는 시대/사회/집단이 있을 수 있을까? 어느 경우에든 절대적으로 그들은 나쁘다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어떻게 주어진 것일까?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다. 그 가족 안에서 벌어진 것이다. 다른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한 소녀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나쁜 행위를 인정한다면 사회를 유지하는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에? 어느 것도 절대적인 이유가 되기 힘들다. 사람은 전쟁이나 자기보호를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의 행위가 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것도 아니다. 가족 안의 일이다. 쪼개 놓고 보면 상황논리로 정당화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누가 뭐래도 이들을 죽일 놈들이다.

무엇이 절대선인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정할 수 있는가?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의문들은 남아있다. 그럼에도 절대선은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절대선, 양심, 윤리성...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상황논리로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원칙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 속의 악한 생각을 제동 걸어줄 브레이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브레이크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세상에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선은 필요하다.

그리고 절대선이 자연적인 산물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절대원칙을 무효화시키면서 세상이 더 살기 좋아졌는가? 사람들 마음속의 선한 것들이 더 많이 표출되어지는가? 도그마는 없어졌을지 몰라도, 세상은 더 악해져간다고 생각지 않는가?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절대선이나 윤리성이 생겨났을까? 한번 망해보면 생길까? 몇천년 후에?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선은 자연적 산물은 아니다.

그 절대선이 인격적 원인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은 다음 단계의 이야기이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지만, 한편 신앙이 없이는 넘어갈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어느 단계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을 말하면 나는 신이 인간에게 양심을 주었고, 그 신이 절대선임을 믿는다. 일년 남짓 고민하고, 아직도 모든것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그래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것은 내 마음을 들여다 본 결과이다. 언젠가 이런 개인적인 고백을 정리하고 싶다.


2008. 1. 19. 04:45
요즘 블로그에 올리는 글이 거의 신세한탄이네요 ㅡ.ㅡ;;; 빨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전에 써놓았던 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한발자욱 더 나갈 준비"라는 글이였습니다. 지금만큼 답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맘이 편하지도 않았던 시절에 써놓았던 글입니다. 돌아보니 제가 맘 고생을 좀 오래하긴 했군요. 그 때도 스스로 위로하면서 쓴 글이였는데 ㅡ.ㅡ;;;

객관적인 관점으로 글을 읽으니 딱 지금 제 상황입니다. 그때는 "그래도 괜찮아" 하며 잘난척 글을 썼는데 정말 말뿐이였나 봅니다.

...


고개를 한 5도 정도 돌려서 상황을 보니... 답답할 것도 없고 화날 일도 없네요.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구요.

신세한탄은 이글로서 끝... 맘 편히 기다리며 이 기회에 밀려 있던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