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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13. 14:36
사진을 좋아하다보니 찍어놓은 사진이 많습니다.
이 블로그의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사진이 제 관심분야의 하나이다보니
가끔 찍은 사진을 올려놓고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게다가 지금 쓰는 글이 시간이 걸려서
포스팅을 못하고 있는 것도 이유입니다 ㅡ.ㅡ

겨울이 깊었습니다. 사진 보면서 기분 전환하시라고
기념 삼아 작년 여름에 찍은 꽃 사진 하나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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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 아침고요수목원
F3 : 50mm f1.4 : RV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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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11. 14:11
오랜만에 잡아본 사진...

찍은지 몇달이 넘었지만
스캔 작업을 안하고 놔두었던 필름들을
하나 하나 스캔하기 시작했습니다.

뷰파인더를 통해 발견하는 또 다른 모습들
그 매력에 다시 빠지고 싶습니다. ^^

2007년 8월 @ Winchester, MA
F3 : 50mm f1.4 : 400T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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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9. 13:43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스터 브룩스. 이 영화는 케빈 코스트너와 데미 무어. 전성기에서 꽤 벗어나 있지만, 아직도 관객 동원력을 어느 정도 갖춘 두 배우를 내세운 2007년 여름을 겨냥한 블록버스터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살인중독자인 '브룩스', 그를 잡기 위해 애를 조금 쓰는 '트레이시'. 브룩스의 살인장면을 목격하고 살인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스미스', 그리고 '마샬'이라 불리우는 브룩스의 다른 인격, 그렇게 네 사람이 영화를 이끌고 있다.

'이중인격'은 오래전부터 창작의 중요한 소재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고전이고, 이외에도 수많은 이중인격자가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미스터 브룩스는 이중인격자를 다룬 영화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난 느낌은 참 불편했다.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권선징악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밑에는 영화에 반영되는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이 깔려있다.

*** 이 밑으로 영화에 대한 자세한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지만, 나중에 볼 의향이 있는 분이라면 영화를 보고 다시 오시기를 권합니다 ^^;;

영화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올해의 인물로 뽑힌 사업가 브룩스에게 몇년간 억누르고 있었던 살인충동(마샬로 형상화되는)이 찾아온다. 그 욕구를 억누르지 못한 브룩스는 한 커플을 찾아가 그들을 살해한다. 이를 수사하기위해 형사 트레이시가 투입되고, 그녀의 탐문수사 대상의 하나가 스미스다. 스미스는 커플의 정사를 훔쳐보다 브룩스를 목격하였지만, 이를 신고하지 않고 오히려 브룩스의 살인에 자신을 동참시켜주길 요구한다. 한편 브룩스는 자신의 딸이 학교에서 친구를 살인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살인중독이 딸에게 넘어간 것이다. 브룩스는 딸의 학교에 찾아가 다른 사람을 살인함으로 딸에 대한 경찰의 의심을 돌려버린다. 브룩스는 스미스와 함께 살인의 대상을 찾다가, 트레이시를 성가시게 하는 전남편과 그와 바람난 여자 변호사를 선택하고 살해한다. 그 살인을 끝으로 스미스 손에 생을 마감하겠다고 하던 브룩스는 오히려 스미스를 죽여 묻어버림으로 살인의 혐의를 스미스에게 씌우고 자신은 안전하게 숨어버린다.

1. 범'죄'가 아니라 중독?

절대적인 가치를 배제하고 모든 것을 개인적인 선호로 돌리는 것이 현대 사회의 흐름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을 올리려고 한다.) 그래서인가? 영화속 브룩스의 연쇄살인은 악이 아닌 것 같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중독, 혹은 아직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나쁜 취미의 하나라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를 위해 영화 속에는 많은 장치들이 등장한다.

> 브룩스 자신도 괴로워 한다?
영화 초반에 브룩스는 마샬에게 살인을 하지 않겠다고 저항한다. 하지만 곧 유혹에 넘어간다. 딸이 살인욕구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 한다. 그리고 딸을 위해 살인을 한다. 스미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결국 스미스에게 자신의 죄를 뒤집어 씌운다. 딸에게 죽임을 당하는 꿈을 보여주면서 브룩스의 고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그가 괴로워 하니 이해해 달라는 것인가?

> 살인을 하는 것은 마샬의 유혹 때문이지 브룩스의 잘못은 아니다?
살인을 하도록 유혹하는 마샬은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으로 등장을 한다. 브룩스는 마샬의 유혹에 넘어가는 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마샬이 문제지 브룩스는 책임이 없다. 브룩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좋아서 스미스를 죽인게 아냐. 다만 내가 중독되었기 때문이야."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이런 항변을 할 때가 있다. "너희 같이 편하게 사는 놈들이 내 괴로운 상황을 알기나 해?" 동정은 할 수 있다. 어떤 경우 이해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죽일만 하니까 죽인 거라니까?
살해된 인물중에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인 자들은 다 조금씩 문제가 있다. 거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트레이시의 남편은 그 재산을 뜯어내기 위해 정부인 변호사와 같이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한다. 스미스는 범죄를 목격하고도 신고하지 않고 살인에 동참한다. 브룩스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트레이시에 의해 죽임당한 두명은 탈옥 후에 트레이시를 위협하던 존재다. 처음에 브룩스에게 죽은 커플도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창문을 열어놓고 그 짓을 한 괘씸죄(?)가 있다.

이렇듯 살해당한 자들의 흠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심정적인 동의를 요구한다. 브룩스가 완전한 악인은 아니다. 죽일만한 놈들이니 죽은 거다. 정말 그런가? 그들은 그렇다 치고, 그외의 사람들은 어떤가? 딸에게 살해당한 친구. 덩달아 죽임을 당한 딸 학교의 또 다른 피해자. 그리고 브룩스에 의해 죽어갔던 수많은 사람들.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그들 모두 죽음을 당할 정도로 문제가 있던 사람들인가? 영화는 그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같은 영화 코드는 다른 곳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한니발'에서 자신의 뇌를 먹게 되는 수사관 크렌들러를 예로 들어보자. 그도 참 얄미운 모습으로 나오긴 한다. 그에 비하면 여자를 해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손목을 자르는 한니발이 멋있어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누가 더 악인인가?

> 형사나 범인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브룩스의 대척점에 있어야할 트레이시는 전형적인 형사가 아니다. 트레이시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재산과 미모까지 갖춘 트레이시가 형사 생활을 계속하는 이유가 뭘까? 책임감?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소망? 아니다. 그저 자신이 원해서다. 자신이 잡고 싶은 사람을 잡고 싶은 욕구. 트레이시와 마지막 통화를 나누며 브룩스는 서로 동질감을 느낀다. 형사나 살인범이나 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영화는 은연중 이야기를 한다.

> 그래도 브룩스는 최소한 기도라도 하잖아. 그러니 이해해줘라?
영화 중에 브룩스는 기도를 한다. "하나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옵소서. 바꿀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키는 용기를,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궁금하다. 만약 바꿀 수 없는 것이 살인중독이라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영화는 이야기하는 걸까?

2. 영화는 그냥 영화로 봐야하는 것인가?

영화는 단순히 영화로서 끝이 아니라 사회를 반영한다. 권선징악의 평면적 구도가 아니면 문제작이라 불리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이다. 선이 승리하지 않는 영화는 널려 있다. 그 변화가 세상의 흐름을 대변하는듯 해서 영화를 보며 불편했다.

현실 속에서 선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두가 그건 알고 있다. 그래도 전에는 선이 승리하는 세상을 희망했던 것 같다. 이전 세대의 창작물을 보면 그렇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선이 항상 승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필요하고 또한 중요하다. 현실인식이 없이는 더 좋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거기서 더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선과 악의 경계가 없다 말하고 있다. 개인의 선택이 옳고 그름의 자리를 대신하고 들어섰다.

세상 어디든 그렇게 변하고 있다. 최근의 대선은 어떤가? 나는 최근의 한국대선은 윤리나 사회정의가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대중적 합의라고 해석한다. 정동영이나 신당이 정의라서가 아니다. 이명박이 악이기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 해석이나, 이후 벌어질 일들은 차치하고라도, 윤리나 청렴이 선택의 기준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개인적 평안이 사회정의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정직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돈없어 치료를 못받는 사회가 되더라도 나와 내 가족 잘먹고 잘 사는게 최고다. 내 자식 특목고 보내서, 좋은 대학 보낼 수 있으면 까짓 부정 좀 저지르고, 거짓말 좀 한게 뭐가 문제냐.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나는 놈 있나.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달라지니, 죄의식이니 양심이니 하는 말도 별볼일 없어진다. 돈 많이 못버는 억울함은 있어도, 세금 떼어먹는 것에 대한 가책은 없다. 초등생 친딸을 성폭행하더라도 들키지만 않는다면 그게 본인한테는 '선'인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누가 미스터 브룩스를 악이라 말할 수 있을까? 브룩스의 아내는 마치 지금의 세상을 보는 것 같다. 브룩스는 성공한 사업가다. 엄청나게 좋은 집에서 산다. 딸을 위해 멀리 날아가 살인까지 할 정도로 딸을 끔찍하게 사랑한다. 자신의 범죄를 완전히 감출 정도로 머리도 좋다. 그거면 다 된거다. 편안한 침대에서 따뜻하게 잘 수만 있으면 밤중에 몰래 나가 무슨 짓을 하고 오든 나는 계속 잠만 잘거다. (실제로 그녀는 밤중에 몰래 들어오는 남편에게 한번도 어디 갔다 왔는지 물어보질 않는다.) 완전한 불감증이다.

미스터 브룩스를 그냥 영화로 볼 수 없었던 것은 그 속의 세상이나 현실이나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친 비약인가? 영화야 그 속성상 몇배로 증폭하긴 했으나, 가는 방향은 별반 다르지 않다. 나에게는 세상이나 영화나 모두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이냐? 세상에 옳고 그름은 없는 거다. 내 한몸 등따시고 배부르면 그게 옳은 거고 그게 정의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없는 그곳으로 부지런히 달려가는 세상이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 같아 나는 이 영화가 참 불편하다.




2007. 12. 28. 02:36
얼마전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작년 겨울부터 벼르던 일을 이제야 시작한 거다. 동기부여는 확실했다. 큰 아이와 이틀 연속 스키를 타러갔다. 첫째날은 둘다 재밌게 탔다. 그러나 둘째날, 여전히 날라다니는 아들과는 달리 내 다리는 완전히 풀려있었다. 다리에 힘이 없으니 기술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쩜 첫째날 힘을 다 뺀 것이 기술 부족이였는지도... 어쨋든 난 그날 아들에게서 엄청 구박 받았다 ㅡ.ㅡ

다시 겨울이 되어 스키시즌이 되었다. 이번에도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체력을 길러야한다. 운동이라야 어디 가서 하는 건 아니고 집에서 러닝머신위에서 한시간 걷는 것이다. 시속 3.5mi이니 5.6km정도다. 그냥 걸으면 너무 평이하기에 프로그램을 설정, 중간에 경사를 올린다. 6분은 평지, 12분은 6도 경사 그렇게 세번 반복하고 마지막 6분을 평지로 마무리한다.

걸으며 음악 듣는 것 밖에 할 일이 없기에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중 많이 드는 생각은 내가 너무 편하게 살았다는 것. 객관적으로 내 삶이 평안했던 것은 아니다. 나름 험한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숨이 턱에 차듯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요즘 너무 헤이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중간에 약간 경사를 주는 것이 꽤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 12분정도 경사진 상태에서 걷다 보면 숨이 차 오기 시작한다. 난방이 없어 쌀쌀한 곳에서 러닝셔츠만 입고 걷는데도 금새 땀으로 젖게 된다. 그리고나서 경사가 없어지면 참 편해진다. 160정도던 맥박도 130으로 떨어진다. 세번째 경사를 마치고 평지에서의 마지막 6분에는 힘든게 다 없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속도를 높여서 3분정도는 8km정도로 뛴다.

만약 경사가 없이 계속 평지였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난 마지막 6분동안 힘들다고 빨리 끝나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경사가 주는 힘듬이 있기에 평지가 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편안함이란, 행복함이란 결국 어려움이 있어야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비약을 해보기도 한다.

지금 하는 코스가 쉽게 느껴지면 난 속도를 높일 것이다. 처음부터 뛰는 것이 무릎에 무리가 갈지도 몰라 지금은 걷고 있지만, 목표는 한시간 동안 계속 뛸 수 있는 체력을 가지는 것이다. 꾸준히 하면 이룰 수 있는 목표일 것이다.

삶에 대한 나의 내공도 더 쌓아야겠다. 요즘 너무 쉽게 살고 있다. 수면시간도 많이 늘었다.

나를 훈련시킬만한 상황이 안된다면 내 스스로 찾아가야할지도. 욕심을 좀 더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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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2. 25. 16:23
경제학 콘서트 - 8점
팀 하포드 지음, 김명철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2006년의 베스트셀러였던 '경제학콘서트'를 이제야 봤다. 경제학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고 싶었던 이유가 컸지만, 경제 관련해 많은 이들이 읽었던 책을 무시하고 있다는, 그래서 읽어봐야 한다는 은근한 의무감도 한몫했다.

책을 분류하는 방법이야 여러가지 있을 수 있지만, 그중 한가지 기준이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책과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한 책으로 나누는 것이다. '경제학 콘서트'는 제목도 그렇고, 목차도 그렇고 단순히 정보 전달을 위한 책이라 생각을 했다. 경제학자가 풀어쓴 경제학 이야기. 하지만 읽다보니 뭔가 달랐다. 정보전달을 위주로 하지만 어딘가 정해진 결말로 이끌고 있다는 느낌이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팀 하포드가 이 책을 쓴 이유를 발견했다. 하포드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경제학자가, 아니 하포드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경제학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부유해지며 성장하는 나라들은 우리가 이 책에서 배웠던 경제학 교훈을 받아들였다. 희소성에 맞서고, 부패와 싸우고, 외부효과를 수정하고,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고, 올바른 동기를 부여하려 하고, 다른 나라와 친해지려고 애썼고, 무엇보다 시장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 모든 일을 했다. (342쪽)

하포드가 바라는 세상은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학문 중의 하나가 경제학이다. 그에게 경제학은 돈 벌기 위한 것이 아니다. 좋은 데 투자를 해서 최대한 수익을 얻기 위한 학문이 아닌 것이다. 그보다는 카메룬 국민들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가난 속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학문이다. 경제학자들의 성향 (예를 들어 사회주의 기반 혹은 자본주의 기반)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기에 뭐라 판단할 수 없다. 다만 하포드의 사상이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경쟁식 자본주의에 근본을 두고 있지 않는다는 짐작이 든다.

(경제적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포드는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하는가? 그는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희소성의 원칙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1. 스타벅스의 경영 전략
스타벅스 커피의 가격 -> 비싼 임대료 -> 목좋은 장소의 희소성으로 연결하면서 하포드는 리카도의 차액지대론을 소개한다. A라는 것이 B보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때 A는 B에 비해 희소해지는 것이고, 그 희소성 자체가 가치가 되는 것이다. 노동조합, 전문직 진입이 어려운 이유, 보통의 미국인이 이민을 반대하는 이유 등은 희소성의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포드는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려면 기업들이 너무 많은 희소성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117쪽).

#2. 슈퍼마켓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
희소성이 가치를 만들어 내지만, 한계가 있다. 고객으로 하여금 최대한 구매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추가 전략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표적화이다. 표적화에는 개인별로 다른 가격을 매기는 단일 표적화가 있고, 여러 그룹으로 가격을 나누어 고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게 만드는 그룹표적화가 있다. 예를 들어 '카라멜 마끼아또'와 일반 커피의 비용 차이는 $0.10에 불과해도 가격표에는 $1.50이 더 매기어져 있는 것과 같다. 여러 등급의 비행기 좌석, 나라마다 다른 약값 등이 가격표적화의 예이다. 표적화가 잘 적용될 때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고 최소한 한 사람에게 이득을 준다. 즉 더 효율적이 되는 것이고, (더 많이 판매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심이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게되는)공익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3. 경제학자가 꿈꾸는 세상, 완전시장
완전시장이란 생산비용, 구매욕구등의 모든 정보가 알려져 있고, 완전 경쟁이 이루어지며, 어떠한 제한규정도 없는 시장이다. 실제로 존재할 수 없음에도 완전시장을 생각하는 것은, 이를 통해 현재 상황을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시장은 또 다른 고민거리를 제시한다. 효율성과 공정성이라는 문제다. 완전효율적인 시장이 곧 공정한 것은 아니다. 완전시장은 극단적인 부익부 빈익빈을 만들 것이다. 그렇기에 정부는 세금을 통한 세금의 재분배를 시도하는 것이다. 효율적이며 또한 공정한 시장을 바라는 이론 중에 케네스 애로우의 '유리한 출발 원리'가 있다. 타이거 우즈같이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많은 사람에게 한차례 큰 세금을 부과해 다른 사람과 같은 라인에서 출발하게 한다는 것이다. 실현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좋은 정책을 만들 생각의 단초를 제공한다.

#4. 출퇴근의 경제학
외부효과란 의도하지 않은 혜택이나 손해에 대해서 대가를 받지도 않고 비용을 지불하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대기오염은 대표적인 부정적 외부효과이다. 운전자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대기오염에 대해 '바른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운전하고 다닌다. 경제학자들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혼잡세를 제시한다. 이와 다르게 집 외부를 새로 칠하는 것 같은 '긍정적 외부효과'에 대해서는 지원해주기를 제안한다. 외부효과에 대한 세금(예: 오염세)이 GDP를 적게 한다는 비판이 있다. 그에 대한 하포드의 멘트가 흥미롭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GDP에 크게 인연하지 않는다. 경제학은 누가, 무엇을, 왜 얻느냐에 관한 것이다. ... 인생에는 숫자로 측정할 수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다. 심지어 경제학자들도 이를 알고 있다."

#5. 좋은 중고차는 중고차 시장에서 팔지 않는다
'정보의 비대칭'은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방해한다. 중고차 딜러는 차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 그래서 좋은 차는 높은 값을 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구매자는 그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평균적인 기대치에 따라 지불하기를 원한다. 결국 좋은 차는 안팔리고 문제있는 차만 판매되는 불합리가 생긴다. 같은 이유로 미국의 의료비는 갈수록 비싸진다. 정보의 비대칭을 해결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정부가 강제적으로 저축하게 하면서도 개인에게 어디 쓸지 판단을 맡기는 싱가포르의 의료제도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것에서 한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6. 주식으로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주식을 로또처럼 고르는 경향이 있다. 어떤 제품이 요즘 뜨니까, 주식값도 오를 것이다 이런 식이다. 하지만 하포드는 주식이란 기업 이익의 일부를 배분받는 권리이고, 주가는 미래의 기업이익을 반영하게 된다고 말한다. 어빙 피셔는 '영원히 허락하지 않을 고지'를 말하며 20년대말 주가 폭락을 예견했다. 여러가지를 조합하면 이해가 된다. 철도가 미국 역사에 미친 영향은 인터넷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개별 회사의 수익은 크지 않았다. 철도처럼 웹은 희소성을 떨어뜨린다. 결국 주식에 투자할 때는 희소성을 가지고 이를 지속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회사를 선택해야한다.

#7. 인생도 세상도 게임이다
포커판 뿐만 아니라 실제 경제생활에도 게임은 존재한다. 포커든 경매든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은 베팅을 통해 정보를 전달한다. 하포드는 예상 수익의 1% 밖에 얻지 못한 미국의 2차 주파수 대역폭 경매와 30억 파운드 예상에 225억 파운드를 달성한 영국의 주파수 대역 경매를 비교한다. 그 차이는 게임의 설계방식에서 온 것이다. 비밀리에 입찰가만 제시하는 경매가 아니라, 상대방의 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환경에서 입찰자들은 면허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더 많은 금액을 베팅하게 된 것이다.

#8. 정부가 도둑인 나라
하포드의 관심은 갑자기 카메룬이라는 못사는 나라로 선회한다. 보통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도로 등의 인프라, 인적자원, 그리고 기술자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세가지가 다 있다고 하더라도 경제발전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카메룬 같은 나라는 너무나 뒤쳐져 있기에 조금만 투자를 해도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가난한 상태로 남아있다. 그것은 제도의 문제이다. 20년간 독재를 하는 비야 대통령과 그 밑에 계속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자 비야의 집권연장을 선호하는 부정부패가 카메룬을 계속 가난하게 남게 만든 것이다. 한마디로 정부가 도둑인 것이다.

#9. 다 함께 잘 사는 방법
한편 작은 나라라 하더라도 세계에 문을 열고 개방하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교환의 마법이다. 어느 나라든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것을 생산하고 다른 것은 교환으로 충당할 때 전체적으로 성장한다. 여러가지 이유로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보호무역은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 하포드의 주장이다. 개발도상국가에서 열악한 근무환경을 통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다국적기업(예: 나이키)에 대한 비판이 크지만, 그래도 현지 환경보다는 좋다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을 받아들임으로 부자가 된 나라의 예로 한국을 들고있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젊은 시절을 보낸 나로서 반발심이 없는 것은 아니나, 하포드의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개방을 할 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10. 중국, 무엇이든 기회가 되는 곳
마지막으로 하포드는 중국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국은 20세기 대부분의 기간을 카메룬보다도 가난하게 살았지만, 지금은 세계 경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나라다. 1976년까지 중국은 마오쩌둥의 불합리한 계획경제와 문화 대혁명으로 인해 수천만명이 기근으로 죽었고, 대학 시스템이 붕괴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오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은 계획경제를 유지하면서도 그 한계이상은 시장시스템에 맡기는 실험을 통해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개방 이전에 강조되었던 교육에 대한 투자와 세계와 통하는 홍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중국에게 행운이였다. 아직도 중국의 근로환경은 끔찍하지만, 경제성장은 중국인들에게 이전에 갖지 못했던 '어디에서 일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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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경제학을 해석의 학문이라 생각했다. 경제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 하지만 경제학은 또한 대안을 제시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떻게 하면 실패를 하는지 답을 발견할 수 있는 학문이다. 경제학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경제'는 2008년 한국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만이천불이였던 일인당 국민소득이 5년사이에 이만불이 넘었음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경제가 엉망이라며 정부 욕을 한다. '무능한 이상주의'를 거부하고 비윤리적이긴 하지만 '효과적인 현실주의'를 선택하겠다는 것이 50% 가까운 국민들의 선택이였다. '잘 먹고 잘 살자'가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 것이다. 뭐가 문제일까? 수치만 보면 국민들이 5년전보다 60%이상 잘 살아야 하는데 왜 청년실업은 늘어나고, 가난한 사람은 더 죽겠다고 하는 걸까? 언론의 호도만으로 이런 현상이 벌어질 수 있을까?

정치적인 견해야 여러가지 있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경제라는 것이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돈'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한국의 풍조가 한탄스럽지만 그럼에도 다만 바라기는 (하포드의 말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하고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이명박 밑에 한두명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사족) 책을 번역했다고 하면서도 마치 첫장만 읽고 쓴 것 같은 '옮긴이의 글'이 참 거슬린다. 번역은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역자가 단 글이 줄거리 다 적어놓고 '누구누구를 본받아야겠다'라고 하는 초등학교 시절 독후감을 보는 듯해 많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