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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 27. 22:10
어떤 정보든 수집한 이후에 활용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메모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메모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서 정보 수집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날로그(종이)보다는 디지탈 정보가 이용하기 편합니다. 게다가 많은 경우 정보 소스가 디지탈입니다. 결국 디지탈로 정보를 저장하는게 필요합니다. 제 경우 보이스 레코더에 있는 녹음은 애초 임시목적이고, 블랙베리에 저장된 것은 싱크를 통해 아웃룩으로 전달이 되기에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근데 플래너에 손으로 쓴 내용이 걸립니다. 플래너는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지만, 잘 관리하지 않으면 죽은 정보가 됩니다.

사실 이 딜레마는 플래너 써본 분은 한번은 겪었을 겁니다. 디지탈이 편하긴 하지만 종이가 주는 자유도를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또 아날로그의 감성이랄까 펜을 들고 직접 쓸 때 생각이 더 잘 되는것 하기도 합니다. 결국 저처럼 두가지 다 사용을 하게 되지요.

그래도 장기적으로 보관하는 정보나 디지탈이 소스인 정보 관리를 위해 솔루션을  찾아봤습니다. 사실 전에는 관리를 잘 못했습니다. 폴더관리가 유일하다 할까요? 마인드맵, 워드 파일, 아웃룩 등등 여기저기 정보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하나로 통합하는게 필요했습니다.

찾아보니 몇가지 툴이 있더군요. 에버노트, 스프링노트, 구글노트등이 물망에 올랐습니다만 구글노트는 개발을 중단했더군요. 구글독도 사용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온라인, 오프라인 둘다 제공하는 에버노트로 갈까 망설이다가, 결국 선택한 것은 마소의 원노트입니다. 오프라인밖에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종이 못지 않은 자유도를 준다는 것이 선택의 이유였습니다. 원노트의 기본 특징은 잘 정리해놓으신 분이 있기에 링크를 거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윈도우즈 환경에서는 이것 저것 바로 연결하고 클리핑하고 복사할 수 있습니다. 멀티미디어 지원 괜찮고, 노트를 여러권 가지고 다니면서 쓰는 느낌을 주는 인터페이스도 나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하얀 백지위에 쓰고 싶은 곳에 바로 쓸 수 있는 방식이 맘에 들었습니다.

마소의 정책인지 몰라도 API 공개가 잘 되었나 봅니다. 시간과 공을 들여 정성스레 만든 애드온 - 원노트의 애드온은 파워토이라 부릅니다 - 들 사용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파워토이 모음 사이트) 불여우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다양한 장난감들이 있습니다. 음... 어떤 사람은 원노트에서 간이 노래을 구현했더군요 (이건 좀 심한듯 ㅡ.ㅡ)


제가 원노트를 이용하는 목적은 세가지입니다. 괜찮은 정보가 있으면 집어다가 원노트에 넣습니다. 링크까지 바로 복사해주는게 맘에 듭니다. 텍스트 카피가 안되면 스크린 복사도 가능합니다. 마인드매니저, 워드, 불여우, IE 등에서 원노트로 바로 보내기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플래너를 보면서 오래 저장해야겠다 싶은 정보가 있으면 원노트에 옮깁니다. 타이핑하는게 귀찮으면 스캔해서 그림으로 저장하기도 합니다 ^^ 마지막으로 노트에 적듯이 아무거나 적습니다. 책을 읽다가 기억나는 문구가 있거나 그냥 생각나는데로 적습니다. 블로깅 아이디어도 적구요. 버튼 하나로 입력창이 열리고, 나중에 분류 정리하기가 편해서 간단한 정보입력이 거의 포스트잇 수준입니다. 회의록 적을 때 쓰기도 합니다.

원노트는 태그를 지원합니다. 하지만 블로그 혹은 구글환경처럼 편하지는 않습니다. 태그를 미리 정의를 해야하고 태그 클라우드도 지원안합니다. 태그 클라우드 만들어준다는 파워토이가 있습니다만 제 경우에 작동을 안하더군요.

웹 저장, 태그 클라우드, 다양한 스킨 등의 기능이 제공되었으면 하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 그래도 정보 저장및 관리에 이만한 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툴이 중요한게 아니죠. 꾸준히 잘 쓰는게 중요합니다.

여기 오시는 이웃분들은 정보관리 어떻게 하시나요? 좋은 팁 있음 공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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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 25. 23:32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10점
옥성호 지음/부흥과개혁사

한국 개신교에서 옥한흠 목사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강남역 바로 옆 "황금"의 땅에 위치한, 교인수 5만에 육박하는, 사랑의 교회는 그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제자훈련과 평신도운동을 통해 현재의 성장을 이루어냈고, 예상보다 빨리 후배 목사에게 교회를 넘겨주고 은퇴를 했다. 개신교 간판스타 세명처럼 세습이니 불륜이니 하는 스캔들도 없었던 목회적 성공과 개인적 명예를 동시에 얻은 드문 경우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다른 목사들의 잘못을 두둔하고, 사회 불의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는 한계점이 있지만, 그래도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몇 안되는 분 중 하나이다.

옥한흠 목사의 아들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자유스럽지는 않았을 거다. 지켜보는 눈이 많으니 맘대로 행동할 수도 없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성실한' 크리스찬으로 행동해야 했을게 분명하다.

그런 그가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책을 썼다. 뿐만 아니라 "20대 후반 어느 시점에 '기독교는 코미디'라는 결론을 내리고 기독교에 대해 관심 자체를 끊었다. 그러나 가정적 환경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교회출석은 빠지지 않았으며 겉으로는 기독교인으로 행세했"다고 고백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책을 통해 신앙을 회복하였다 말하며, 스승이라 여기는 다섯명에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다. 아니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의 근처에도 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한국'이라며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이뻐해 주었을 아버지 친구들이 들으면 '꽤씸하다'며 분개할 발언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그게 아버지에 대한 반항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객기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 보니 그것은 '진리에 대한 그의 열정'이었다.

그는 부족한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를 변질시키고 있는 심리학, 마케팅, 엔터테인먼트의 문제점에 대해지적한다. 이 책은 그 시리즈의 첫권이다. 책은 심리학은 (객관적인) 과학이라기 보다는 종교의 속성이 강하다고 지적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심리학이 기독교의 진리를 대치하거나 보완한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를 지적한다. 인간 중심인 심리학이 신 중심인 종교와 섞일 수는 없다. 모든 문제를 무의식의 책임으로 돌리는 (프로이트류의) 심리학과 자신이 죄됨을 인정하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는 기독교는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성공의 한가지 방법으로 심리학에 의존하고 있다. 처음 지적되는 문제점은 '자기사랑'에 대한 강조다. 자존감의 회복이나 내적치유가 유행한 것은 꽤 되었다. 성경을 사실대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모든 것의 답이 되어야할텐데,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완전하고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야 완전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몇년전 목사가 내적 치유랍시고 '이년 저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잘못되었다고 느꼈던 그 부분이다. '쓴 뿌리'가 남아 있다고 구원 못받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다음 문제점은 '긍정적 사고'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다. '긍정의 힘'과 같은 복음과는 상관없는 (최동석님 표현대로) 연설집이 유행하고 있다. 조엘 오스틴처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나쁘다 말할 수는 없지만, 설교자가 그것만 말한다면 분명히 잘 못되었다. '죄인됨'을 말하지 않는 설교는 립서비스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 받음'을 말하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성공의 법칙'에 열광하는 기독교를 비판한다. 의식에 얽매였던 한국 개신교에 꿈이니 비전이니 하는 것들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다. 비전이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를 위한 비전인지, 어떻게 그것을 이루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문처럼 외우고 멋진 비전을 꿈꾼다고 해서 이루어 진다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설교가 유행인게 현실이다. (강남같이 부유한 지역의 교회에서는) 아주 넘쳐난다.

심리학이 대상이었지만 근본으로 들어가면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는가'라는 뉴에이지의 질문이 깔려있다. 기독교밖 사람들에게는 사과를 먹었느니 안먹었느니 하는 별 시덥잖은 이야기로 생각될 선악과에는 '먹어. 먹으면 너가 하나님이 돼'라고 하는 유혹이 담겨있다. '신은 필요없다. 인간은 인간을 책임질 수 있다'라는 인본주의와 '신은 존재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라는 신본주의는 인간이 의식을 가지기 시작할 때부터 대립해왔었다.

나의 존재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인본주의다. 신이 존재할 자리는 없다. 심각한 것은 교회가 똑같은 메시지를 성경적이라며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이 나쁜 학문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류의 노력에 의해 발전되어온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 중심으로 출발한 심리학이 기독교의 진리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동감한다.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는다면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교회의 성공을 위해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심리학, 마케팅, 엔터테인먼트에 의존하는 한국 교회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신학도 심리학도 아마추어인 저자로서 이만한 책을 쓴다는 것이 놀랍다. 표현이 직설적인 경우가 많아 교계 주류 ^^ 에게 비난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아쉬움이 있다면 몇번의 경우 실명을 거론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때문일까?

나는 한국교회안에 더 많은 비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진리에 대한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C.S 루이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대적(modern)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과 모더니즘(modernism)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기독교에 위기가 닥쳐올 수 있음을 경고"했다. 마찬가지로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과 "세상 풍조를 좇아 진리를 변질시키는것'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세상이 변해도 진리는 진리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씀보존학회같은 식은 곤란하다. 이 단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포스팅할 생각이다.)

진리에 대한 옥성호 형제(이렇게 부르는 것이 훨씬 편하다 ^^)의 열심이 고맙다. 다음에 읽을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가 기대된다.


사족: 들리는 말로 저자는 책을 내기전 원고를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아버지는 아들을 지지해주었다고 한다. 그가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감안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에 이만한 어른이 많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2009. 1. 24. 19:13

단어의 모음이 무조건 문장을 이루지 않듯 의미 없는 필름 한 무더기를 일컬어 굳이 영화라 부르지 않는다. 싸늘한 정초, 애써 좋은 마음으로 가족 나들이에 나섰다가 명절에는 역시 코미디, 라는 마음에 이 동영상을 보게 될 어느 선량한 시민들이 불쌍해 죽겠다. 이 영화와 비교하면 <두사부일체>는 <시민케인>이고 <조폭 마누라>는 <벤허>다. - 허지웅

필름 무더기 ^^ <유감스러운 도시>에 대한 허지웅의 평이다. 영화 관계자가 보면 모멸감과 분노에 어쩔 줄 몰라 할 만 하다. 어쩌면 살의를 느낄지도. 하지만 관계없는 나에게는 너무나 상쾌하다. 항상 느끼지만 허지웅 이 사람은 글을 참 잘 쓴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멋진 표현을 써서 비판 한다면... 화야 나겠지만...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울 것 같다 ^^




2009. 1. 24. 02:53
부의 미래 - 10점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청림출판

앨빈 토플러를 처음 만났던 것은 <권력이동(Powershift)>이었다. 첫 직장의 교육 과정중에 이 책을 읽고 서평(당시에는 독후감이라 했던 것 같다)을 써내는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 충격>이나 <제3의 물결>등의 저서로 잘 알려져 있던 작가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권력이동>에서 보여준 그의 통찰은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그리고 지식사회로의 전환이라는 단순한 명제를 사용, 세상의 흐름을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그의 내공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십여년이 지났다. "웹이 뭐야?" 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세상은 너무나 달라졌다. 토플러가 예견한 "지식으로의 힘의 기반 이동"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 흐름 안에 있었기에 느끼지 못했지만 세상은 그가 예측했던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새 책이 나왔을 때, 사실 반신반의했다. 미래는 새로운 세대의 몫이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여든 가까운 할아버지의 예측이 얼마나 가치가 있나, 과거의 멋진 통찰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하지만 역시 절정고수는 달랐다. 복잡한 세상을 세가지의 팩터로 설명해버린다.

<부의 미래>는 지금까지 해온 그의 작업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아직 제3의 물결안에 있다. 다른 점이라면 이전 책이 새로운 물결이 어떠할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면, 이번에는 그 결과가 어떠한가를 보여준다고 할까? 토플러는 현재진행형인 변화들을 커다란 흐름속에서 바라보며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부'를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변화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이 변화를 만들어내는가를 이야기한다. '심층기반'이라 부르는 변화의 동인은 시간, 장소, 그리고 지식이다. 시간은 재정렬된다. 변화는 갈수록 빨라지며 동시에 속도가 다른 영역간에 충돌이 생긴다. 비개인적인 시간에서 개인적인 시간으로 옮겨간다. 장소는 확장된다.  세계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세계화를 막는 요소가 발생한다. 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지역이 바뀌는 동시에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지역도 달라진다. 지식의 양은 급속히 늘어나지만, 무용지물이 되는 지식(Obsoledge)이 되는 속도는 빨라지고,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는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심층기반이 움직임에 따라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생산하는 것으로 만족시키는 프로슈머 경제는 갈수록 중요해지지만, 기존 경제학으로는 프로슈머의 영향력을 계산해낼 수 없다. 기존 질서의 권위는 무시되며, 이는 종종 사회적 퇴폐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작용도 존재한다. 자본주의 그리고 화폐는 새로운 흐름 속에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계속 존재할지는 의문이다. 늘어난 지식과 확장된 공간을 통해 아직도 제1의 물결에 남아있는 절대빈곤 지역을 구제해 낼 가능성이 생겼다.

심층기반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는 세계 곳곳에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중국, 일본, 한국, 유럽, 그리고 미국은 내부와 외부의 문제를 직면하며 발전 혹은 고전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내내 토플러가 바라보는 세상,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생각했다. 변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떻게 변하고 있고, 또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는 예측가능하다. 하지만 그 이후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예를 들어 미래의 경제체계는 지금의 자본주의와는 다를 것이다. 화폐가 없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세상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토플러는 그것까지 제시하지는 못한다. 여기서 미래학이 예언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학은 볼 수 있는데까지만 말한다. 그 이상 말하는 것은 상상이거나 점치는 것이다.
 
앞으로 세상은 더 빨리 변할 것이다.  지식이 쌓이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그 축적된 지식이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누구도 분명히 예측할 수는 없다. 버스로 30분 거리가 세계의 끝이였던 어린 아이가 30년 후 미국에 집을 두고 인도에 출장와서 한국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지금의 모습을 상상하는 정도? 30년 또 60년 후에는 어떤 세상이 기다릴까?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며 살아갈까? 이전에 비해 빈곤은 줄어들고 일하는 환경도 더 인간다워지는 것을 보면 최소한 미래는 더 좋아질 거라고 토플러는 말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그 말에 희망을 가져볼까?
 
분명한 것은 "다른 요인들이 중간에 끼어들어" 훼방을 하더라도, "혁명적 부는 전세계에 걸쳐 전진을 계속할 것"이라는 거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세상에게 좋은 변화일지 나쁜 변화일지 모르지만,  "모든 사항을 고려했을 때, 이것도 한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환상적인 순간"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21세기의 끝이 어떤 세상일지 이 책은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과는 분명히 다른 세상일 것이다. 그 세상에 대한 힌트를 조금이라도 얻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

 


2009. 1. 20. 22:32
미국의 1월 19일은 마틴 루터 킹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작년 이맘 때 그의 유명한 1963년 설교 동영상과 한글 번역을 올렸었다.

그 연설이 있은지 25년이 조금 안되는,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의 날 다음날인 1월 20일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다.

킹 목사의 꿈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200명대 13명이라는 전쟁의 결과가 있는 한. 남들처럼 살아보고 싶어 악쓰던 사람들이 불에 타죽는 일이 있는 한. 그가 바라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의 당선이 그 길에 이르는 하나의 발걸음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꿈이 있을 때, 그리고 그 꿈이 정의일 때, 언젠가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될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