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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리고 글'에 해당되는 글 87건
2009. 2. 5. 13:12
올해 책을 많이 읽고자 일주일에 하나씩 서평을 쓰겠다고 목표를 세웠습니다. 책을 보고 그에 대한 평을 쓰는 것은 나름의 재미가 있습니다. 내용을 되새김질하고 생각을 더하면서 읽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수 있기도 합니다. Inuit님 말한 것처럼 사전을 읽고도 서평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

글을 쓰면서 어떤 단계를 거치나 어떤 패턴을 취하나 스스로 분석해본 적이 있습니다. 서평도 글쓰기의 하나인지라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만, 나름대로 제가 사용하는 서평 쓰기의 원칙이 있는 듯 해서 한번 정리해봅니다.

1. 다 읽고 쓴다

당연한 원칙입니다. 그래도 여기에 적는 이유는 책을 다 읽지 않고도 서평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업적 공간에 올려 있는 서평(이라기보다는 책소개라 불러야겠습니다만)중에는 정말 책을 다 읽긴 읽었나 의심가는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앞의 몇장만 읽고 썼다는 물증은 없지만 심증이 가는 글들이 많이 있지요. 물론 책에 따라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을 필요가 없는 책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서평이라면 책을 완전히 소화한 다음에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2. 책을 통해 글쓴이를 본다

김훈의 칼의 노래가 전환점이었을 겁니다. 언제부턴가 책을 통해 글쓴이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 책을 왜 썼을까? 저자는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나? 그의 인생관은 어떤가? 외국 저자라면 위키를 참조하고 국내 저자라면 검색이라도 한번 해봅니다. 그리고 책이 아니라 글쓴이의 생각에 마음을 맞추고 서평을 씁니다.

3. 우뚝 솟은 나무를 중심으로 숲을 말한다

영화평에 비유한다면 제 서평은 스포일러 투성이입니다. 책의 내용을 너무 많이 소개하는듯 합니다. 그래도 처음에 서평을 쓸 때 순서대로 내용을 요약했던 것(예: 마지막 통찰)에 비해 요즘은 전체 내용을 간단히 흝고 중심이라 생각하는 내용에만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서는 '진짜되기'가 중심이었고, '나는 학생이다'에서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평을 했습니다.

4. 책과 글쓴이가 어떻게 다가오는가를 적는다

책에서 그리고 글쓴이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적습니다. 그리고 글쓴이가 나와 세상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집어내려 노력합니다. '마시멜로 이야기'에서는 아이에게 성공지향주의의 이 책을 읽어주는게 옳은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고, '바리데기'에서는 작가의 무기력을 이야기했습니다. '남한산성'에서는 치욕스러운 과거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듯한 한국을 이야기했습니다. 무엇을 적을지는 그때 그때 다릅니다. 한마디로 느낀대로 적습니다 ^^ 글의 패턴도 무엇을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자연스레 달라집니다.

5. 서평을 쓰기전에는 서평을 읽지 않는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서평을 쓰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의 서평을 읽지 않습니다. 찬성을 하던 반대를 하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될수 있는 한 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습니다. 자료조사가 아닌 이상 책에 대한 글은 안보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책 읽기 시작하기 전에 접했던 서평은 괜찮습니다. 책을 읽으며 다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ㅡ.ㅡ

6. 서평을 쓰고 나서는 다른 서평을 찾아 다닌다

서평을 쓰고 나서는 적극적으로 다른 분들의 글을 찾아다닙니다. 서평을 읽고, 댓글도 달고 트랙백도 남겨봅니다. 책을 읽고 서평을 썼을 때는 제 하나 몫의 지식을 쌓았습니다. 다른 분들 서평을 읽고 교류를 하면서 여러 사람분의 지혜를 얻습니다. 다양한 시각만큼 이해도 좋아집니다.

7. 인용을 하되 문장을 재구성한다

단순인용은 주로 안하는 편입니다. 인용을 하되 원래의미를 변경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문장을 재구성, 전하고자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합니다. 읽으며 밑줄을 많이 그었던 책인 경우 특히 인용을 하고 싶은 욕심이 많이 생기지요. 최근에 읽은 책중에서 '나는 학생이다'가 그런 책이었습니다.

8. 책이 아니라 나에 대해 쓴다

서평은 또 다른 글쓰기일 뿐입니다. 책에 대한 글이지만 책에 비추어 내 이야기를 담아내려 애씁니다. 어느 분이 그러더군요. 과거에 쓴 서평을 보면 책이 아니라 당시의 자신이 담겨 있다구요.





2009. 2. 1. 07:34
장영주는 우리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바이얼리니스트다. 네살때 바이얼린을 시작 여섯살에 줄리어드의 (아이작 펄먼, 미도리등을 가르쳤던) 도로시 딜레이의 제자로 들어가고, 같은 해 필라델피아 뮤직홀에서 데뷰했다. 9세 데뷰앨범 레코딩(최연소), 11세 베를린필과 협연(메뉴인과 같이 최연소), 19세 에버리 피셔 프라이즈(Avery Fisher Prize), 24세 할리우드볼 명예의 전당(최연소)등 천재소녀로 시작 끊임없이 성장해가고 있다. 그녀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타고난 천재성'과 '끊임없는 노력'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천재성과 노력만 있으면 모두 장영주처럼 성공할 수 있을까? [각주:1]


아웃라이어 - 10점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김영사

아웃라이어(Outlier)는 원래 통계 용어다. 검출된 값중 다른 값들에 비해 지나치게 높거나 낮은 값을 말한다. 실험결과 분석시 아웃라이어는 보통 제외한다. 이상한 결론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용어를 말콤 글래드웰이 빌려온 것이다. 좋은 선택이다. 책에서 예로 들은 비틀즈나 빌게이츠 모두 보통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이다. 블랙스완이니 롱테일이니 하며 두드러진 것에 관심이 많은 세상이다 보니 아웃라이어라는 용어도 시류에 편승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굳이 통계 용어를 가져다가 성공한 사람을 지칭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웃라이어>는 잘하는 사람은 더 잘하게 된다는 성공의 부익부 빈익빈으로 시작한다. 그 이유로 10,000시간의 법칙을 든다. 비틀즈, 빌게이츠, 모짜르트, 체스마스터등 두드러진 성공에 이르기까지는 대략 잡아 십년, 10,000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십년법칙은 하워드 가드너, 공병호등 여러 사람이 이야기한 성공의 조건이다. 한가지 일에 십년정도 노력을 기울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원칙으로 새로울 것은 없다. 모두가 알고 있다. 지키기가 어려울 뿐 ㅡ.ㅡ

'결국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네.'라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다. <아웃라이어>는 성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는 일인칭의 책이 아니다. '성공'은 어떻게 오는가 하는 삼인칭의 책이다. 말콤은 질문한다. 만시간의 노력을 들일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있는가? 그리고 만시간의 노력을 들이면 누구든지 성공할 수 있는가? 대답은 둘다 'No'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재능이나 노력 이외에도 기회(Opportunity)와 유산(Legacy)이 필요하다.

기회나 유산이 성공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말콤은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캐나다의 뛰어난 하키 선수들 중 많은 수가 1월부터 3월에 태어났다는 것, 같은 뛰어난 IQ를 가지고 출발했지만 다른 결과를 보여주는 아이들, 한국을 비롯 아시아 학생들이 수학에 뛰어난 이유, 켄터키 할란에서 벌어진 복수극들, 칼 801의 괌에서의 추락사건,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둘 다 55년생인 이유. 관련없어 보이는 케이스들이지만 밑바닥에는 한가지 원리가 흐르고 있다. 작은것들이 쌓여 큰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가 성공이나 실패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1월 1일 기준으로 선수의 학년을 나누는 캐나다에서는 1월에 태어난 아이는 12월에 태어난 아이보다 하키연습을 할 시간이 많다. 연습할 시간이 많으므로 더 좋은 팀에 선발이 된다. 더 좋은 팀이기에 더 열심히 연습을 시키고,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는 더 벌어지게 된다. 작은 차이에서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빌 게이츠는 학생시절 자유롭게 컴퓨터를 사용할 기회가 주어졌고, 프로그래밍에 시간을 많이 보내며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퍼스널 컴퓨터의 탄생을 맞이했다. 빌 게이츠와 같은 시기의 아이들 전부 컴퓨터를 쓰고 싶은데로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 아니었고, 프로그래밍 연습을 많이 했던 사람들 모두가 퍼스널 컴퓨터와 같이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다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한다고 시기를 잘못 만나면 소용이 없다.

장영주는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고 또 엄청난 노력도 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장민수가 도로시 딜레이의 제자였기에 남들보다 더 빨리 출발할 수 있었다는 것도 분명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계층간의 간격이 커지는 것도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개천에서 용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미국의 경우) 학기중에는 모든 아이들이 성적에서 비슷한 진보를 보인다. 하지만 부유한 집 아이들은 3개월간의 여름 방학동안 꾸준히 관리를 받으며 실력이 느는 반면 가난한 계층의 경우 오히려 후퇴한다. 이런 차이가 초등학교 기간 내내 쌓이면 졸업할 때쯤 되면 확실하게 차이가 난다.

이쯤되면 슬슬 기분이 나빠진다. 그렇다면 운도 없고 빽도 없는 나 같은 놈은 그냥 이렇게 살다 죽으라는 거냐. 답은 'Yes AND No'다. 많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다 평범하게 죽는다. 정해진 범위에 머무를 뿐이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뉴욕의 사우스 브롱크스 지역, 가난하고 위험한 지역에 KIPP이라는 학교가 있다. 부모들 대부분 대학에 못가고, 아이들 지원도 못해주는 형편이지만 졸업할 때쯤이면 84프로의 학생들이 평균이상의 수학 성적을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통학교에 비해 KIPP는 30~40% 정도 수업시간이 길다. 부모가 지원못해주는 것을 학교가 대신해주는 거다.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기회조차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쩔 수 없다. 스스로 만들수 밖에.

성공이란 결국 남들보다 더 많이 나아가는 거다. 어떤 이는 기회가 있어 몇미터 점프를 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환경의 영향으로 몇미터 더 앞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그게 없다면 열심히 하면 된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왔다.


말콤 글래드웰은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일반화의 오류가 없을리 없는 주장임에도, 다양한 꺼리를 엮어 탁월하게 엮어놓은 그의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엇보다 성공을 개인의 노력으로만 바라보던 기존 시점에 비해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에 읽지 않았던 그의 다른 책들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1. 장영주는 이 책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장영주와 같은 시기에 천재로 출발한 다른 바이얼리니스를 비교하는 것도 아웃라이어에 대한 흥미로운 케이스 스터디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본문으로]


2009. 1. 25. 23:32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10점
옥성호 지음/부흥과개혁사

한국 개신교에서 옥한흠 목사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강남역 바로 옆 "황금"의 땅에 위치한, 교인수 5만에 육박하는, 사랑의 교회는 그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제자훈련과 평신도운동을 통해 현재의 성장을 이루어냈고, 예상보다 빨리 후배 목사에게 교회를 넘겨주고 은퇴를 했다. 개신교 간판스타 세명처럼 세습이니 불륜이니 하는 스캔들도 없었던 목회적 성공과 개인적 명예를 동시에 얻은 드문 경우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다른 목사들의 잘못을 두둔하고, 사회 불의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는 한계점이 있지만, 그래도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몇 안되는 분 중 하나이다.

옥한흠 목사의 아들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자유스럽지는 않았을 거다. 지켜보는 눈이 많으니 맘대로 행동할 수도 없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성실한' 크리스찬으로 행동해야 했을게 분명하다.

그런 그가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책을 썼다. 뿐만 아니라 "20대 후반 어느 시점에 '기독교는 코미디'라는 결론을 내리고 기독교에 대해 관심 자체를 끊었다. 그러나 가정적 환경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교회출석은 빠지지 않았으며 겉으로는 기독교인으로 행세했"다고 고백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책을 통해 신앙을 회복하였다 말하며, 스승이라 여기는 다섯명에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다. 아니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의 근처에도 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한국'이라며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이뻐해 주었을 아버지 친구들이 들으면 '꽤씸하다'며 분개할 발언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그게 아버지에 대한 반항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객기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 보니 그것은 '진리에 대한 그의 열정'이었다.

그는 부족한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를 변질시키고 있는 심리학, 마케팅, 엔터테인먼트의 문제점에 대해지적한다. 이 책은 그 시리즈의 첫권이다. 책은 심리학은 (객관적인) 과학이라기 보다는 종교의 속성이 강하다고 지적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심리학이 기독교의 진리를 대치하거나 보완한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를 지적한다. 인간 중심인 심리학이 신 중심인 종교와 섞일 수는 없다. 모든 문제를 무의식의 책임으로 돌리는 (프로이트류의) 심리학과 자신이 죄됨을 인정하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는 기독교는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성공의 한가지 방법으로 심리학에 의존하고 있다. 처음 지적되는 문제점은 '자기사랑'에 대한 강조다. 자존감의 회복이나 내적치유가 유행한 것은 꽤 되었다. 성경을 사실대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모든 것의 답이 되어야할텐데,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완전하고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야 완전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몇년전 목사가 내적 치유랍시고 '이년 저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잘못되었다고 느꼈던 그 부분이다. '쓴 뿌리'가 남아 있다고 구원 못받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다음 문제점은 '긍정적 사고'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다. '긍정의 힘'과 같은 복음과는 상관없는 (최동석님 표현대로) 연설집이 유행하고 있다. 조엘 오스틴처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나쁘다 말할 수는 없지만, 설교자가 그것만 말한다면 분명히 잘 못되었다. '죄인됨'을 말하지 않는 설교는 립서비스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 받음'을 말하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성공의 법칙'에 열광하는 기독교를 비판한다. 의식에 얽매였던 한국 개신교에 꿈이니 비전이니 하는 것들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다. 비전이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를 위한 비전인지, 어떻게 그것을 이루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문처럼 외우고 멋진 비전을 꿈꾼다고 해서 이루어 진다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설교가 유행인게 현실이다. (강남같이 부유한 지역의 교회에서는) 아주 넘쳐난다.

심리학이 대상이었지만 근본으로 들어가면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는가'라는 뉴에이지의 질문이 깔려있다. 기독교밖 사람들에게는 사과를 먹었느니 안먹었느니 하는 별 시덥잖은 이야기로 생각될 선악과에는 '먹어. 먹으면 너가 하나님이 돼'라고 하는 유혹이 담겨있다. '신은 필요없다. 인간은 인간을 책임질 수 있다'라는 인본주의와 '신은 존재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라는 신본주의는 인간이 의식을 가지기 시작할 때부터 대립해왔었다.

나의 존재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인본주의다. 신이 존재할 자리는 없다. 심각한 것은 교회가 똑같은 메시지를 성경적이라며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이 나쁜 학문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류의 노력에 의해 발전되어온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 중심으로 출발한 심리학이 기독교의 진리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동감한다.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는다면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교회의 성공을 위해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심리학, 마케팅, 엔터테인먼트에 의존하는 한국 교회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신학도 심리학도 아마추어인 저자로서 이만한 책을 쓴다는 것이 놀랍다. 표현이 직설적인 경우가 많아 교계 주류 ^^ 에게 비난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아쉬움이 있다면 몇번의 경우 실명을 거론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때문일까?

나는 한국교회안에 더 많은 비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진리에 대한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C.S 루이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대적(modern)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과 모더니즘(modernism)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기독교에 위기가 닥쳐올 수 있음을 경고"했다. 마찬가지로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과 "세상 풍조를 좇아 진리를 변질시키는것'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세상이 변해도 진리는 진리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씀보존학회같은 식은 곤란하다. 이 단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포스팅할 생각이다.)

진리에 대한 옥성호 형제(이렇게 부르는 것이 훨씬 편하다 ^^)의 열심이 고맙다. 다음에 읽을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가 기대된다.


사족: 들리는 말로 저자는 책을 내기전 원고를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아버지는 아들을 지지해주었다고 한다. 그가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감안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에 이만한 어른이 많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2009. 1. 24. 19:13

단어의 모음이 무조건 문장을 이루지 않듯 의미 없는 필름 한 무더기를 일컬어 굳이 영화라 부르지 않는다. 싸늘한 정초, 애써 좋은 마음으로 가족 나들이에 나섰다가 명절에는 역시 코미디, 라는 마음에 이 동영상을 보게 될 어느 선량한 시민들이 불쌍해 죽겠다. 이 영화와 비교하면 <두사부일체>는 <시민케인>이고 <조폭 마누라>는 <벤허>다. - 허지웅

필름 무더기 ^^ <유감스러운 도시>에 대한 허지웅의 평이다. 영화 관계자가 보면 모멸감과 분노에 어쩔 줄 몰라 할 만 하다. 어쩌면 살의를 느낄지도. 하지만 관계없는 나에게는 너무나 상쾌하다. 항상 느끼지만 허지웅 이 사람은 글을 참 잘 쓴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멋진 표현을 써서 비판 한다면... 화야 나겠지만...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울 것 같다 ^^




2009. 1. 24. 02:53
부의 미래 - 10점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청림출판

앨빈 토플러를 처음 만났던 것은 <권력이동(Powershift)>이었다. 첫 직장의 교육 과정중에 이 책을 읽고 서평(당시에는 독후감이라 했던 것 같다)을 써내는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 충격>이나 <제3의 물결>등의 저서로 잘 알려져 있던 작가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권력이동>에서 보여준 그의 통찰은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그리고 지식사회로의 전환이라는 단순한 명제를 사용, 세상의 흐름을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그의 내공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십여년이 지났다. "웹이 뭐야?" 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세상은 너무나 달라졌다. 토플러가 예견한 "지식으로의 힘의 기반 이동"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 흐름 안에 있었기에 느끼지 못했지만 세상은 그가 예측했던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새 책이 나왔을 때, 사실 반신반의했다. 미래는 새로운 세대의 몫이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여든 가까운 할아버지의 예측이 얼마나 가치가 있나, 과거의 멋진 통찰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하지만 역시 절정고수는 달랐다. 복잡한 세상을 세가지의 팩터로 설명해버린다.

<부의 미래>는 지금까지 해온 그의 작업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아직 제3의 물결안에 있다. 다른 점이라면 이전 책이 새로운 물결이 어떠할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면, 이번에는 그 결과가 어떠한가를 보여준다고 할까? 토플러는 현재진행형인 변화들을 커다란 흐름속에서 바라보며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부'를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변화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이 변화를 만들어내는가를 이야기한다. '심층기반'이라 부르는 변화의 동인은 시간, 장소, 그리고 지식이다. 시간은 재정렬된다. 변화는 갈수록 빨라지며 동시에 속도가 다른 영역간에 충돌이 생긴다. 비개인적인 시간에서 개인적인 시간으로 옮겨간다. 장소는 확장된다.  세계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세계화를 막는 요소가 발생한다. 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지역이 바뀌는 동시에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지역도 달라진다. 지식의 양은 급속히 늘어나지만, 무용지물이 되는 지식(Obsoledge)이 되는 속도는 빨라지고,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는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심층기반이 움직임에 따라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생산하는 것으로 만족시키는 프로슈머 경제는 갈수록 중요해지지만, 기존 경제학으로는 프로슈머의 영향력을 계산해낼 수 없다. 기존 질서의 권위는 무시되며, 이는 종종 사회적 퇴폐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작용도 존재한다. 자본주의 그리고 화폐는 새로운 흐름 속에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계속 존재할지는 의문이다. 늘어난 지식과 확장된 공간을 통해 아직도 제1의 물결에 남아있는 절대빈곤 지역을 구제해 낼 가능성이 생겼다.

심층기반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는 세계 곳곳에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중국, 일본, 한국, 유럽, 그리고 미국은 내부와 외부의 문제를 직면하며 발전 혹은 고전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내내 토플러가 바라보는 세상,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생각했다. 변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떻게 변하고 있고, 또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는 예측가능하다. 하지만 그 이후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예를 들어 미래의 경제체계는 지금의 자본주의와는 다를 것이다. 화폐가 없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세상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토플러는 그것까지 제시하지는 못한다. 여기서 미래학이 예언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학은 볼 수 있는데까지만 말한다. 그 이상 말하는 것은 상상이거나 점치는 것이다.
 
앞으로 세상은 더 빨리 변할 것이다.  지식이 쌓이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그 축적된 지식이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누구도 분명히 예측할 수는 없다. 버스로 30분 거리가 세계의 끝이였던 어린 아이가 30년 후 미국에 집을 두고 인도에 출장와서 한국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지금의 모습을 상상하는 정도? 30년 또 60년 후에는 어떤 세상이 기다릴까?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며 살아갈까? 이전에 비해 빈곤은 줄어들고 일하는 환경도 더 인간다워지는 것을 보면 최소한 미래는 더 좋아질 거라고 토플러는 말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그 말에 희망을 가져볼까?
 
분명한 것은 "다른 요인들이 중간에 끼어들어" 훼방을 하더라도, "혁명적 부는 전세계에 걸쳐 전진을 계속할 것"이라는 거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세상에게 좋은 변화일지 나쁜 변화일지 모르지만,  "모든 사항을 고려했을 때, 이것도 한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환상적인 순간"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21세기의 끝이 어떤 세상일지 이 책은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과는 분명히 다른 세상일 것이다. 그 세상에 대한 힌트를 조금이라도 얻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

 


2009. 1. 12. 15:58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 8점
조은 지음, 최민식 사진/샘터사

사진 한장이 백개의 문장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도 있다. 사진의 미덕이다. 대상을 그래로 보여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무엇이 아닌가, 왜 그런가, 누구를 위해서 그런가, 언제 그런가, 어디에서 그런가를 말할 수도 있는 것이 사진이다[각주:1]. 한장의 좋은 사진은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

사진도 글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모양이 있다. 까르띠에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을 보여주고, 엔젤 아담스는 자연의 진중함을 보여준다. 로버트 카파는 역사적 순간을 증언한다. 인간이라는 주제에 집중, 삶의 표정을 담는 작가가 있다. 최민식 작가는 그런 작가다.

50년 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진에 담아온 최민식 작가의 사진중 97장에 조은 시인이 글을 더하였다.

열장 남짓의 사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람이 대상이고, 그들의 대부분은 "태어날 때부터 배경이 어두움 뿐인 사람들"이다. 갓난 아이를 돌봐야 하는 어린 여자 아이, 삶에 지친 노동자, 거리의 걸인, 길가에 누워자는 아이와 아버지, 죽은 아들의 사진을 들고 시위의 현장에 선 어머니... 전쟁 후의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부터 2000년대 풍요함 속의 빈곤까지, 그의 시선은 줄곳 소외된 곳, 아파하는 이웃에 머물러 왔다.

하지만 2009년의 오늘날, 이전 세대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한 현재, 그의 사진을 바라보는 감정은 단순하지 않다. 사진 속에 보이는 사회적 절대빈곤은 사라졌다. 생활수준이나 근무환경은 훨씬 좋아졌다. 치열한 경쟁 속에 더 나은 미래만 바라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우리들에게 최민식의 사진은 불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이런 삶이 싫다. 나는 더 나은, 더 풍족한 삶을 살고 싶다. 어느 누가 사진 속의 모습처럼 살고 싶어한단 말인가.

그래도 그의 사진을 보아야하는 것은 잊지 않기 위함이다. 이미 지나간 혹은 주위에 보이지 않는 모습이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과거였고 누군가의 현재이며, 누군가의 미래일 것이다. 고개를 돌리면 수많은 소외된 이웃이 있다. "절망만을 길어올리는" 체념이 있다. "평생 일으켜 세워야할 삶이 안쓰러운" 아이들이 있다. 상대적 빈곤으로 인해 없는 자들의 겨울은 더 춥게만 느껴진다. 그들의 "내일은 오늘과 달라져야 한다."

최민식은 삶의 저 낮은 곳을 지내온 이들의 시선을 같은 높이에서 잡아냈다.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눈. 어떤 이에게 삶은 참으로 가혹한 것이다. 하지만 그 눈은 나의 눈일 수 있고, 내 친구의 눈일 수 있다. 오늘 아침 스쳐 지나간 그 남자의 눈일 수도 있다. 우리 삶에는 아직 아픔이 있음을, 우리는 서로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함을, 때로는 고개를 돌려 낮은 곳을 바라봐야 함을 그의 사진은 가르쳐 주고 있다. 사람, 결국 사람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가족이라는 이웃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랑만이 어둠을 역전시킨다."
 



  1. 좋은 사진을 찍는 스물한가지 방법 (http://futureshaper.tistory.com/92) [본문으로]


2009. 1. 5. 13:17
나는 학생이다 - 10점
왕멍 지음, 임국웅 옮김/들녘(코기토)

왕멍의 '나는 학생이다'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중용을 요구하고, 가치를 중시하며, 순리를 강조한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어느 것 하나 지금까지 배운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역경을 당할 때야말로 "자기를 반성하고, 타인을 원망하지 않으며, 억지로 변명하지 않으며, 가능한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작은 집단으로 묶지 말라" 하고 "기쁘게 헤어졌다 기쁘게 헤어지라" 말한다. 세속화를 경계하나 혁명만이 답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이치에서 벗어나는 것 없이 모든 말이 타당하다. 새로운 교훈이나 시대를 뛰어 넘는 해석은 없다.

그럼에도 왕멍의 책은 읽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한다. 인생의 세파를 거친 그의 인생 철학에 읽는 내내 가슴 깊은 동의를 하며 기본 원칙에 대한 생각을 다시 가다듬게 된다. 노작가의 말에는 힘이 있다. 귀에 듣기 좋은 미사여구도 아니고, 듣는이의 마음을 계속 찔러대는 야단조도 아니다. 오히려 담담하다 할 수 있는 그의 말에는 그 앞에 무릎꿇고 귀기울이고 싶게 만드는 깊이가 있다. 물론 작가로서의 표현력도 한 몫을 한다.

왕멍은 열한살때 혁명에 투신했다 한다. 책을 쓸 때 그의 나이 예슨여덟. 57년의 시간동안 그는 분별없었을 어린 혁명당원, 혈기 왕성한 젊은 작가, 권력에서 밀려난 유배자, 화려하게 복귀한 작가, 작가회의 부주석, 중앙의회 의원등 정치가의 생활을 살았다.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맛보았다고 할까? 해마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까지 다다른, 그가 정의하는 그 자신은 무엇일까?

왕멍은 스스로를 학생이라 칭한다. 농민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고, 관리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다. 생각의 끄뜨머리에서 발견한 것은 자신은 평생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학생은 그의 신분만이 아니고 그의 세계관이자 인생관이며, 성격과 감정의 세계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단어였다." "생활을 하나의 큰 책으로 보고, 한권 또 한권의 책을 생활의 지침과 참고로 삼거나 대화와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학습과 생활이 일치된 삶의 자세인 것이다. 자신을 학생이라 단정짓는 그의 단호함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같은 강물을 두번 건널 수 없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생에 대해 왕멍은 기다림을 논하고, 큰 덕과 큰 지혜를 논하고, 벽을 쌓아놓지 않는 처세를 논하고, 품격을 논한다. 깊이 있는 그의 교훈은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다. 당연히 따라야할 삶의 자세이건만, 세상이 굽었는지 사람이 굽었는지 주위에 그에 따라 사는 이 보기가 쉽지 않다.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비상식적인 세상에서 왕멍이 주는 교훈은 도드라진다.

400페이지 남짓 되는 책에 얼마나 많이 밑줄을 그었는지 모른다. 그중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것은 "사람의 일생은 곧 연소이다"라는 문장이다. "한 사람은 한 에너지의 발원지이다. 사람의 일생은 곧 연소이다. 즉 에너지의 충분한 방출이다... 빛과 열이 없고, 연소하지도 않는다면, 조금 타다가 불을 끈다면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너무 커다란 고통일 것이다." 왕멍이 말하는 연소는 순간적 뜨거움에 모든 것을 태우고 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신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기다리며, "도전과 초월을 선택하는" 긴 호흡이다. "이것이 나의 인생이고, 나의 가치이며, 나의 선택이고, 나의 쾌락이며, 나의 고통이다. 한평생 진정한 고통을 겪어보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을 헛되이 산 것이 아닌가?"라며 당당히 외칠 수 있는 뜨거움이다.

왕멍은 단순히 새 세대가 윗세대를 능가할 것이라 생각지 않아도 "적어도 인간은 발전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발전은 이전 세대의 경험을 통한 교훈이 받아들여지고, 또 발전되어질 때 가능할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으로, 일생을 거진 사회주의에서 보낸 사람으로, 어떤 말은 어색하고 어떤 말은 진부하다. 그럼에도 귀담아 들어야할 "어른"의 이야기가 이 책에는 참 많이 담겨있다. 들을만한 이야기를 듣고, 따를만한 이야기를 따를 때 사람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자주 들추어볼 것 같다.





2008. 12. 29. 12:27
2008년 한해 147개의 포스팅을 올렸습니다. 이 글이 올해 148번째의 공개 포스팅입니다. 평균 일주일에 세개가 약간 안되네요. 한 해를 정리하면서 올해 올렸던 포스팅중 베스트 7를 골라봤습니다. Inuit님처럼 댓글이 많이 달린 글을 골라볼까 하다가 너무 많이 따라하는듯 하여 ^^ 예전처럼 제 맘에 가장 남는 포스팅을 선택했습니다.

닌텐도의 역습 - 발상의 전환 & 고슴도치 컨셉
닌텐도 Wii와 DS의 성공을 발상의 전환 그리고 Good to Great의 고슴도치 컨셉으로 설명한 글입니다. 제가 다음 블로거뉴스에 세번에 한번 꼴로 발행을 하는데, 유일하게 메인에 걸려서 트래픽 폭탄을 안겨주었던 글이지요. 마케팅이나 전략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있지만, 공들여 케이스 분석을 해본 적은 이 글이 처음입니다. 이후에도 몇개 손을 댄 글이 있지만 게으름에 완성을 못했네요. 내년으로 넘어가려나 봅니다 ㅡ.ㅡ

[크리스찬들에게 고함] 잘못된 목회자를 비판하자
자정능력을 잃어가는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이며 제 나름대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애썼던 글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빛을 잃은 한국 교회에 대한 우려는 제 오래된 고민입니다. 아직도 교회의 변화는 요원한듯 합니다만, 변화가 필요함을 인식한 사람은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생각은 그대로입니다. 크리스찬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재인식을 계기로 해당 영역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경쟁력 높이기 #6 - 싸움의 기술
논쟁이 아닌 싸움이라 불릴만한 직장내의 다툼에 대한 글입니다. '직장인 살아남기'가 시리즈의 원래 제목이듯, 직장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경험과 생각들을 영역넓히기, 토론하기, 적 만들지 않기, 다음 단계 준비하기, 이끌며 가기등의 주제로 적은 글의 연장이지요. '미래 빚어가기' 시리즈가 '무엇'에 중점을 두는 글이라면 '경쟁력 높이기'는 '어떻게'에 중점을 둔 글들입니다.

[왜] 사진을 찍는가?
제가 하는 일의 의미를 한번쯤 되집어 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블로깅MBA에 대한 의미를 정리했습니다. 그 다음이 사진입니다. 사진은 가장 중요한, 블로깅을 제외하고는 유일하다 할 수 있는, 취미입니다. 평생 같이 할 것이고, 언젠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은 전시회를 여는 것이 소망 중 하나입니다. 사진은 평소에 보기 힘든 세상을 발견하기 위한 행위라는 제 생각을 그동안 찍었던 사진 몇장을 곁들여 올렸습니다.

GTD 따라잡기 #1 - 원리 그리고 프로세스
GTD를 처음 접하면서 혼란스러웠던 부분을 정리한 'GTD 따라잡기' 시리즈의 총론이 되는 포스팅입니다. 올 한해 제 블로그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GTD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GTD 때문에 제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이 꽤 되니까요. 시간/행동 관리는 능률적인 삶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시간을 아껴 쓴다고 반드시 삶이 나아진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생활이 엉망이면서 성공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는 것이 제 신념입니다.

칼의 노래 - 김훈을 생각하다
이 글은 칼의 노래의 서평이 아닌 김훈에 대한 평입니다. 김훈은 제게 처음으로 문장의 힘을 알게해 준 작가입니다. 그의 문장이 너무나 색다르기에 나름대로 흉내를 내어봤습니다. 길이는 짧지만 오랫동안 생각하고 공을 들인 포스팅입니다. 문체 훔치기는 이후 남한산성의 서평에도 적용해봤습니다만, 정작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칼의 노래 포스팅에 더 잘 담겨져있습니다.

靜心如水- 물과 같이 고요한 마음
2008년 연말 격물치지님으로 시작해 진행된 사자성어 릴레이는 한해를 돌아보며 2009년을 준비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흔이면 불혹의 나이라 하였는데, 불혹은 커녕 롤러코스터같은 격동의 시기를 보내는 제 마음을 다스리고 싶어서, '물과 같이 고요한 마음'을 2009년의 지향으로 삼았습니다.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다시 본래의 고요함으로 돌아가는 수면과 같은 마음을 배우고 싶습니다.

돌이켜 보면 2008년에도 블로그를 통해 생각을 가다듬고, 블로그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많은 좋은 분들과 교류를 맺은 것은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다시 한번 올 한해 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또 구독하여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이런 인사 드린다고 이 포스팅이 올해 마지막 포스팅은 아닙니다 ^^)


추신:
혹시 인상 깊었던 글이었는데 이번 리스트에 들어가 있지 않다면 알려주세요.
어떤 글을 좋아하시는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일종의 선호도 조사라 할까요? ^^





2008. 12. 24. 14:25
산나님Inuit님이 올해 읽은 책을 정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말이 되어 올해를 돌아보는 의미로 게다가 포스팅 거리도 떨어지다 보니 저도 동참을 합니다. 생각해 보니 최근 몇년간 올해만큼 책을 적게 읽은 해가 없는 듯 합니다. 학습에 책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무엇하느라 책읽기를 게을리 했는지... 많이 반성이 됩니다. 내년에는 매주 한권을 위해 열심히 뛰어야 겠습니다 ^^;; 어쨋거나 얼마 안되는 책중에서 추려낸 ㅡ.ㅡ 2008년 베스트 5입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 10점
정민 지음/태학사

2007년에 다산 선생을 만났다면, 2008년에는 연암을 엿보고자 시도했던 해입니다. 그래봐야 책 두권 (비슷한 것은 가짜다, 열하일기) 읽은 게 다였지만, 그래도 연암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라 추천하고 싶습니다. 정민 선생의 정성스런 해석과 해박한 주석은 책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조선시대 지식인의 삶과 사상은 아직도 큰 관심으로 남아있습니다. 2009년에는 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학생이다 - 10점
왕멍 지음, 임국웅 옮김/들녘(코기토)

아직도 읽고 있는 책이지만 올해가 가기전에 끝낼 것이므로, 그리고 당연히 올해 베스트 5에 들어갈만 하므로 여기에 선택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혁명에 가담, 정권의 부침을 경험한 노작가가 후배들에게 권하는 글은 문장마다 힘이 실려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학생'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 10점
고든 맥도날드 지음, 홍화옥 옮김/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십여년만에 다시 이 책을 읽었습니다. 세번째 읽은 것이고 개정판으로는 처음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단순히 종교적인 열심만이 아닌 가치있고 정돈된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봐야할 책입니다. 실패의 경험만큼 그리고 지속적인 성찰과 단련만큼 깊어진 고든 맥도날드의 교훈은 나도 그러한 질서 정연한 삶을 살고 싶다는 긍정적 욕심을 갖게 만듭니다.



2008년 제 블로그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GTD였습니다. 프랭클린 시스템의 Top Down과는 다른 Bottom Up 방식의 시간/행동 관리 방식으로 저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공병호 번역의 '끝도 없는 일 깔끔하게 해치우기'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번역판은 절판이고 또 번역상 문제가 있다는 평이 있어 원서를 추천합니다.


칼의 노래 - 10점
김훈 지음/생각의나무

평소 경영/자기계발/리더십 관련된 책만 보던 저에게 문학에 대한 재미를 일깨워준 책입니다. 더불어 좋은 문장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김훈의 모든 책을 구해서 읽고 싶었지만 올해는 칼의 노래남한산성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내년에도 꾸준히 김훈의 책은 읽어야할 책 목록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2008. 12. 22. 11:51

일전에 소개 스티븐 킹의 창작론 글을 쓰기 위한 "어떻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이를 위한 실천적인 가르침 담겨있지요. 그렇다면 글이란 어때야 할까요? 흔히들 마음을 담백하게 들어내는 글이 좋은 글이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 가끔 이 말은 위로와 격려를 위해 쓰이기도 합니다 ^^ 내용을 떠나 잘 쓰여진 문장이 있고, 평범하게 쓰여진 문장이 있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잘 쓰여진 문장이 갖추어야할 조건은 무엇일까요?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연 박지원은 당대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문장가였습니다. 기존 틀을 벗어난 그의 글은 당송의 일부 문장만 최고로 치던 시대에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대문장가인 연암이 생각했던 좋은 문장이란 어떤 것일까요? 정민 선생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 소개된 연암의 <종북소선자서鍾北小選自序>에서 연암은 좋은 문장의 조건으로 성색정경聲色情境을 강조합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말에서 강조하듯 연암은 다른 이들을 흉내내기보다 자신의 것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남을 닮지 않는 나만의 것, 즉 정체성 닮겨있는 글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렇다고 다름 자체가 최고의 선은 아닙니다. 다르되 법도를 갖추어야합니다. 좀 까다롭죠? 법도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聲色情境이 그 법도중의 하나가 아닐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聲色情境은 연암의 말이고 이에 대한 해석은 정민 선생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 기반했으되, 제 표현으로 풀어썼음을, 그리고 제 생각대로 가감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장에는 소리(聲)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과거 어떤 이의 말이 지금 옆에서 들리듯 생생해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고, 문장이 마 대화를 나누듯 부드러워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울림이라 생각합니다. 소리는 울림이 있어 전달이 됩니다. 울림이 크기 위해서는 파장이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경우는 울림이 상쇄되어 아무리 큰 소리라도 종래 잦아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장도 마찬가지 입니다. 글안에 담겨있는 글자 하나 하나가 읽는 이의 마음을 때림으로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감이 필요합니다. 읽는 이가 공감할 수 없는 글은 소리가 안 납니다. 난다 하더라도 잡음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문장에는 색(色)이 있어야 합니다. 색에는 화려한 색도 있고 은은한 색도 있습니다. 화려함은 은은함이 받추어 줄 때 더 빛을 발하고, 화려함에 대한 실증을 잠재워 줄 수 있는 것은 은은함의 끈기입니다. 문장에도 색이 있습니다. 화려한 문장의 기교로 말하고자 함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평이한 문장으로 전달함으로서 오히려 더 강한 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강조하고자 맘껏 드러낼 수도 있고, 강조하고자 살짝 감추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둘 사이의 미묘한 저울질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장의 색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필요합니다.

문장에는 정(情)이 있어야 합니다. 굳이 외롭다 구구 절절 표현하지 않아도 가을 하늘 날아가는 외기러기의 울음 하나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한달째 입고 다니는 셔츠 소매끝의 때자욱으로 곤궁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뚜벅 뚜벅' 말아먹는 비빔밥 한 사발로 슬픔과 의지를 동시에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자연과 사물은 그대로지만, 그 위에 '내'가 비추어짐으로 내 마음을 대신 말해줍니다. 열마디 말보다 더 진하게 감정을 나타내주는 그것. 문장 안에 그것을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문장에는 경(境)이 있어야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의 얼굴에는 눈코입을 그리지 않는 법입니다. 하지만 초상화에는 눈썹, 입술, 얼굴의 표정까지 자세히 그립니다. 눈앞의 광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고 좋은 그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미묘한 저울질.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강조할 것은 강조함으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다채로운 빛깔로 나타나듯이, 사물은 작가의 눈을 통하여 제각금의 빛깔을 드러내야 합니다. 수십가지의 이야기들이 작가의 마음을 통하여 생략과 강조를 거쳐 하나의 경치로 나타나야 합니다. 할 말을 다해 버리면 경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아픈 사랑의 이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시를 쓰지 말라는, 다소 상투적인, 표현을 연암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픔을 아프다고 쓰지말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말하되 그 사랑을 담담히 감정의 체로 걸러 사물에 얹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말합니다. 정신의 귀와 마음의 눈을 통해 농축된 정밀한 표현. 그것이 연암이 말하는 좋은 문장의 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