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3. 14:49
[책 그리고 글]
바리데기 - 황석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
세상에 존재하는 부조리는 글쓰는 이의 중요한 소재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부조리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이를 없애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혹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부조리를 까발리어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부조리가 사라질 수 없고, 세상의 모순은 확대재생산되어 간다면, 세상을 향해 외치던 이로서는 허탈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내가 읽은 황석영의 첫 작품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다. <넘어 넘어>로 불리우던, 당시로는 유일하게 광주항쟁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던, 80년대를 살며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든 읽어봤을 필독 도서다. 솔직히 이 '황석영'이 대입 시험에 등장했던 <장길산>의 그 황석영인줄 전혀 생각못했었다. (황석영이 <넘어넘어>를 쓸 줄 알았다면 대입시험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을까? 절대 없었을 것이다.)
부조리에 대한 고발은 그의 문학의 큰 줄기이다. <장길산>이 지나간 역사를 들어, 그 시대의 부조리를 이야기하였다면, <넘어 넘어>는 살아가고 있는 그 시대의 모순을 목숨걸고 고발하였던 작품이다.
이후 그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소설의 소재가 되어도 충분할 인생의 곡절을 겪었다. 그런 그가 최근에 <바리데기>를 들어 다시 세상의 부조리를 이야기했다. 80년대와 차이가 있다면 스케일이 커졌다고 할까? 전작 <심청, 연꽃의 길>이 제국주의 시대에 가상의 인물 '청'을 등장하여 그 당시의 모순을 이야기했다면, <바리데기>의 '바리'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지금의 세상 어딘가에 꼭 한명 있을 것 같은, 우리 세상의 아픔을 담고 있는 여인이다.
태어나며 받았던 남존여비의 차별은 어쩌면 바리가 받았던 가장 신사적인 부조리였을 것이다. 북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그리고 영국으로 흘러가는 그녀의 삶에는 시대의 모순이 새겨져 있다. 인민이 살기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던 그 곳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자본주의의 돈맛을 알아 다른 이의 생명을 죄의식 없이 짓밟는 인간들. 나라의 독립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임에도, 힘이 없기에 폭력에 의지하고, 또 그래서 악으로 치부되는 민족. 지독한 인생 피할 곳은 중독밖에 없기에 다른 이의 호의를 죽음으로 돌려주는 불쌍한 인생.
작가는 바리의 삶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잘 엮어냈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사실적인 묘사. 바리가 무당의 끼를 타고났다는 설정을 통해, 여러 등장인물들의 절망과 희망을 드러내는 것은 탁월했다. 특히 상세히 묘사된 북한, 그리고 탈북자들의 상황은 같은 시대에 이렇게 다른 삶이 있나 하는 이질감까지 느끼게 했다.
하지만 작가는 세상에 대한 고발에서 한발짝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소설 속의 바리는 고난과 아픔을 겪고 생명수를 찾아오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허나 어쩌나. 생명수 하나 찾아서 없어질 세상의 모순이 아닌 것을. 결국 바리가 찾아온 '생명수'는 어설픈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되고 만다. 잘 풀어나가던 이야기 보따리를 마지막에 황급히 닫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차피 세상의 모순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작가의 절망 때문이 아닐까? 9.11 이후 이라크 침공이 진행되는 시대속에 아랍인 남편 알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는 바리에게서 '생명수'는 보이지 않았다. 허탈했다.
'바리가 구한 생명수는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작가는 '생명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바리는 그것을 찾기라도 했을까요?'라고 답한다. 이 부분에서 작가에 대한 배신감마저 느낀다면 심한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무기력함을 공유해야 하는 것일까?
광주의 죽음을 한참동안 이야기할 수 없었던 나라가, 대통령을 온국민의 놀림감으로 삼는 나라로 바뀌었다. 최류탄 연기로 눈물 흘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거리에 나가 정부를 비판할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만큼 더 밝아졌을까? 그만큼 더 나아졌을까? 잘 살게 해준다면 윤리의식은 개에게나 주라고 반이 넘는 국민이 합의했던 사건은 또 다른 모순이다. 진실을 찾는 목소리가 개인의 이해관계로 필터링되는 세상의 소통은 해결책이 없을 또 다른 부조리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전보다 더 지능적으로, 더 치사하게 진화해갈 뿐이다.
<바리데기>에 생명수는 없었다.
다만 답을 제시하고자 붓을 들었으나, 답을 찾지 못한 작가의 회피하는 모습만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다만 답을 제시하고자 붓을 들었으나, 답을 찾지 못한 작가의 회피하는 모습만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책 그리고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티븐 킹의 창작론 (30) | 2008.07.14 |
---|---|
문학에 관한 10문 10답 (10) | 2008.07.09 |
칼의 노래 - 김훈을 생각하다 (14) | 2008.06.21 |
[서평]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6) | 2008.05.29 |
[서평] Getting Things Done (16) | 2008.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