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소개한 스티븐 킹의 창작론은 글을 쓰기 위한 "어떻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이를 위한 실천적인 가르침이 담겨있지요. 그렇다면 글이란 어때야 할까요? 흔히들 마음을 담백하게 들어내는 글이 좋은 글이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가끔 이 말은 위로와 격려를 위해 쓰이기도 합니다 ^^ 내용을 떠나 잘 쓰여진 문장이 있고, 평범하게 쓰여진 문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잘 쓰여진 문장이 갖추어야할 조건은 무엇일까요?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연암 박지원은 당대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문장가였습니다. 기존 틀을 벗어난 그의 글은 당송의 일부 문장만 최고로 치던 시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대문장가인 연암이 생각했던 좋은 문장이란 어떤 것일까요? 정민 선생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 소개된 연암의 글 <종북소선자서鍾北小選自序>에서 연암은 좋은 문장의 조건으로 성색정경聲色情境을 강조합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말에서 강조하듯 연암은 다른 이들을 흉내내기보다 자신의 것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남을 닮지 않는 나만의 것, 즉 정체성이 닮겨있는 글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렇다고 다름 자체가 최고의 선은 아닙니다. 다르되 법도를 갖추어야합니다. 좀 까다롭죠? 그 법도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聲色情境이 그 법도중의 하나가 아닐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聲色情境은 연암의 말이고 이에 대한 해석은 정민 선생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 기반했으되, 제 표현으로 풀어썼음을, 그리고 제 생각대로 가감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문장에는 소리(聲)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과거 어떤 이의 말이 지금 옆에서 들리듯 생생해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고, 문장이 마치 대화를 나누듯 부드러워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울림이라 생각합니다. 소리는 울림이 있어야 전달이 됩니다. 울림이 크기 위해서는 파장이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경우는 울림이 상쇄되어 아무리 큰 소리라도 종래 잦아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장도 마찬가지 입니다. 글안에 담겨있는 글자 하나 하나가 읽는 이의 마음을 때림으로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감이 필요합니다. 읽는 이가 공감할 수 없는 글은 소리가 안 납니다. 난다 하더라도 잡음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문장에는 색(色)이 있어야 합니다. 색에는 화려한 색도 있고 은은한 색도 있습니다. 화려함은 은은함이 받추어 줄 때 더 빛을 발하고, 화려함에 대한 실증을 잠재워 줄 수 있는 것은 은은함의 끈기입니다. 문장에도 색이 있습니다. 화려한 문장의 기교로 말하고자 함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평이한 문장으로 전달함으로서 오히려 더 강한 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강조하고자 맘껏 드러낼 수도 있고, 강조하고자 살짝 감추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둘 사이의 미묘한 저울질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장의 색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필요합니다.
문장에는 정(情)이 있어야 합니다. 굳이 외롭다 구구 절절 표현하지 않아도 가을 하늘 날아가는 외기러기의 울음 하나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한달째 입고 다니는 셔츠 소매끝의 때자욱으로 곤궁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뚜벅 뚜벅' 말아먹는 비빔밥 한 사발로 슬픔과 의지를 동시에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자연과 사물은 그대로지만, 그 위에 '내'가 비추어짐으로 내 마음을 대신 말해줍니다. 열마디 말보다 더 진하게 감정을 나타내주는 그것. 문장 안에 그것을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문장에는 경(境)이 있어야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의 얼굴에는 눈코입을 그리지 않는 법입니다. 하지만 초상화에는 눈썹, 입술, 얼굴의 표정까지 자세히 그립니다. 눈앞의 광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고 좋은 그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미묘한 저울질.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강조할 것은 강조함으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다채로운 빛깔로 나타나듯이, 사물은 작가의 눈을 통하여 제각금의 빛깔을 드러내야 합니다. 수십가지의 이야기들이 작가의 마음을 통하여 생략과 강조를 거쳐 하나의 경치로 나타나야 합니다. 할 말을 다해 버리면 경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아픈 사랑의 이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시를 쓰지 말라는, 다소 상투적인, 표현을 연암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픔을 아프다고 쓰지말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말하되 그 사랑을 담담히 감정의 체로 걸러 사물에 얹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말합니다. 정신의 귀와 마음의 눈을 통해 농축된 정밀한 표현. 그것이 연암이 말하는 좋은 문장의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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