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30. 15:00
[책 그리고 글]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옥성호 지음/부흥과개혁사 |
한국 기독교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크나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는 '대교회 지향주의'다. 교인수가 힘이 되고 예배당의 크기가 능력을 뜻하는 한국의 기독교가 부패하는 것은 어찌보면 '순리'이다. 그렇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가 자본주의 발전에 공헌했다고 한다. 이제 자본의 논리가 기독교를 썩게 하고 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통해 '진리에 대한 자존심'을 버리고 세상 학문에 의존하는 기독교를 비판한 저자는 이번에는 마케팅에 대해 이야기한다. 교회가 마케팅의 원리에 의존하는 이유는 결국 한가지다. 더 많은 사람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교회는 구매자(교인)의 욕구를 잘 파악해야한다. 그리고 복음을 구매 욕구에 맞추어 적절히 상품화해야한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약점은 감추고 강점은 부각해야한다. 남는 것은 현대인의 구미에 잘 맞는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메시지 뿐이다. 이것이 마케팅 교회의 모습이다.
MBA를 취득하고 세일즈와 마케팅 부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저자는 마케팅의 정의로 책을 시작한다. 이어서 현대사회의 두가지 특징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에 '옳은 것'이 아닌 '원하는 것'을 하라 (포스트모더니즘)"와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무엇이든 하라 (프래그머티즘)"이 교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런 시대적 배경하에 부흥을 절대시하는 주장과 종교 다원주의가 교회안에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이야기한다.
교회가 사람 모으는 것을 우선시할 때 복음은 상품화된다. 저자는 현대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고 많은 교회의 벤치마킹이 되는 두 교회에서 그 모습을 찾는다. 교회를 찾는 이와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윌로우 크릭,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채우려는 새들백 모두 복음이 변질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숫자가 우상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따라 오는 교회간의 경쟁과 교회 성장을 위한 컨설팅을 비판한다. 복음을 들고 세상과 경쟁해야할 교회가 서로 경쟁하기에 바쁘게 된 것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복음의 진정한 회복을 요구한다. 마케팅 교회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거룩한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복음은 (약점은 감추고 강점만 강조함으로) 설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선포되는 것이다. 교회의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지식은 필요하나, 복음을 세상지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지식을 복음에 비추어 살펴야하는 것이다. 가감되지 않은 '거친 십자가'의 복음을 그대로 전파하는 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다.
변질된 교회의 모습을 개탄하며 절대적 믿음으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옥성호 형제의 외침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몇가지 아쉬움과 우려가 있다.
첫째,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영혼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 그렇다면 전달하는 사람이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설교자가 전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듣는 이가 가져야할 자세지만, 중언부언과 우왕자왕으로 듣는 이들을 모두 졸게 만드는 설교자가 주장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절대주권에 대한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자칫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상의 노력은 모두 세상에 영합하는 행동처럼 비쳐질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하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다.
둘째, 사람을 모으려는 노력은 두가지로 구분되어질 수 있다.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어떻게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과 교회의 신도수를 늘리기위해 반짝 세일을 하는 것은 출발점이 다르다. 윌로우 크릭이나 새들백이 (저자가 말한대로) 복음을 변질할 위험은 있으나, 세상에 큰 해를 주는 것은 매출 신장을 위해 마케팅을 사용하는 (특히 한국의) 교회들이다. 이들 교회에 더 큰 비판이 가해져야하지 않을까?
C.S 루이스는 사람을 나눌 때 두가지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한가지는 원안의 사람과 원밖의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으로는 끊임없는 분열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다른 한가지는 진리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과 진리에서 멀어지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윌로우 크릭과 새들백은 진리를 향해 움직이는 교회이다. 시행착오를 범할 수는 있으나 진리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는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교회는 스스로 잘못을 고쳐나갈 것이다. 문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저버리는 목회자와 교회들이다.
셋째, '정의'와 '사랑'에 대한 강조이다. 친근한 아버지의 이미지만 강조되고 죄를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은 사라진 교회는 분명 문제이다. '거룩한 하나님'을 모르고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을 모른다면 또한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 '정의'를 강조하다 '사랑'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순수성을 지키려는 열정은 복음을 삶의 여러 부분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변질'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만들 우려가 있다. 하지만 복음은 크다. 하나의 시각으로 제한할 수는 없다. 미술에도 적용할 수 있고, 영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 결혼한 적 없는 예수님이지만 결혼하는 사람, 이혼으로 상심한 사람 모두 복음에서 자신들에 대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가감없는 복음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자칫 다른 이들에 대한 불필요한 정죄에 빠져서는 안된다. 방향성이 같다면 본질이 아닌 사소한 차이는 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에 영합하는 얄팍한 메시지에 대한 옥성호 형제의 비판은 정당하다. 복음의 능력은 숫자에 있지 않다. 예수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않았다. 옆에 두고 길러낸 제자가 고작 열두명 (가룟 유다 포함),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까지 기다린 사람이 120명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멀쩡한 부인 놔두고 정부와 함께 교회에 가서 바람피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한국 교회는 하루에도 열두번씩 스스로에게 되물어야한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과연 성경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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