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26. 12:42
[책 그리고 글]
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지음/난다 |
이 책의 선택은 전적으로 <문학 이야기> 팟캐스트 덕분이다. 책이 나왔을 때 <문학 이야기>에 소개도 되었고, 황현산 선생이 직접 출현도 했다. 진행자인 신형철 평론가의 극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저자의 진솔하고 깊이 있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렇게 삶과 문학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하는 분의 글이라면 믿고 읽을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책은 저자가 다른 매체에 실렸던 글을 모은 거다. 책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부에는 어딘가 (한겨례 신문?) 정기적으로 쓴 글을, 2부에는 사진에 대한 평을, 그리고 3부에는 여타 다른 매체에 쓴 글이 담겨 있다. 문학에 관한 논문이나 문학비평이 아닌 글로는 처음 엮는 책이라고 한다.
저자는 불문학자로 시 평론가로, 그리고 번역가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여러분야에서 많은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듯 하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나? 첫 몇 글을 읽고 당혹스러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짜임새 있게 연결되는 글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저자의 글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세쪽, 길어야 네쪽에 끝나는 짧은 글인데 이야기가 계속 바뀌는 거다. 그것도 앞 이야기가 뒷 이야기를 자연스레 끄집어낸다기보다 샛길로 샌다는 느낌이 들고, 또 마지막 결론은 뜬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게 저자 글의 특징인지, 아니면 문학 평론이 원래 이런식인지 모르겠지만 글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할 정도다. 뒤로 갈수록 그런 느낌이 덜 들어 다행이었지만.
짜임새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각 단락만 놓고 보면 너무 좋다. 문학적이라는 상투적 표현이 아까운, 깊이 있고 세밀한 문장들이 가득하기에 열심히 밑줄을 치며 읽게 된다. 따라할 수 없이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그중 몇개 단락을 소개한다.
"그래서 몽유도원도의 관람은 일종의 순례행렬이 되었다. 사람들은 반드시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해도 위대한 어떤 것에 존경을 바치려 했으며,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저마다 자기들이 서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아흐레동안 국림중앙박물관의 광장에 구절양장을 그린 긴 행렬은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의 끈질긴 시위였다." - 몽유도원도 관람기, p27.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청소된 후)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 p33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 시가 무슨 소용인가, p184.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을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레 말해야겠다." - 먹는 정성, 만드는 정성, p218.
이 아름다운 문장들은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에서 나온듯 하다. 특히 2부 사진에 대한 평은 멋지다. 사진에 담겨있는 혹은 담겨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세밀한 성찰은 정작 사진보다도 풍성하다.
황현산 선생의 글을 또 찾아보고 싶다. 문학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한 적이 없었던 내게 선생이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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