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은 헤롯왕은 예수님이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며 두려워했다. 그리고 성경은 드라마의 플래시백처럼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해 설명했다. 헤롯왕과 헤로디아의 불륜을 정죄했던 세례요한을 헤롯왕은 잡아 가두었다. 하지만 선지자로 존경받던 그를 차마 죽이지는 못했다. 그를 눈에 가시처럼 여겼을 헤로디아는 딸을 통해 결국 세례요한을 죽게 만들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요 예수의 앞길을 예비한 ‘인간의 태에서 태어난 사람중 가장 위대한’ 요한의 죽음치고는 참 아쉬운 죽음이었다.
큰 아들 예한은 세례요한에서 ‘례’와 ‘한’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세례요한은 신앙인으로서 예전부터 나에게 롤모델과 같은 인물이다. 단순한 삶을 살았던 전 역사에 흐르는 하나님의 큰 계획의 작지만 아주 중요한 순간을 담당한 사람.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자신의 기득권을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었던 사람. 불의를 보고 잠잠히 있지 않았던 그로 인해 세상을 훨씬 멋있게 만든 사람. 난 예한이가 그 세례요한과 같은 인물이 되길 바랬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마음에 걸린다. 말이 좋아 세례요한이지,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이름은 날렸지만, 자신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고생하며 살다가 결국 목이 잘려 죽고 말았다. 만약 예한이가 그렇게 산다면 내가 ‘그래 너 참 훌륭하게 사는구나’하고 박수치고 있을까? 아닐 것 같다. 왜 편하게 살 수 있는데 고생을 자처하냐며 끊임없이 논쟁을 하겠지. 막을 수 없다면 매일 마음아파하며 지켜보겠지. 눈물도 많이 흘릴거야. 내가 왜 예한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아마 아내와 싸움도 많이 할거야. 내가 그런 이름을 붙여서 예한이가 저렇게 되었다고.
성경에 나오진 않지만 세례요한의 부모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마리아가 가족들을 데리고 예수를 찾아가 말렸듯이 세례요한의 부모도 그러지 않았을까? 부모의 마음이야 항상 자식들이 편안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테니까 말이야. 부모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을 적용하면서 말이야.
예한이가 세례요한처럼 살 일은 없을거다. 그래도 난 그 정신만큼은 가르쳐주고 싶다. 예한이는 ‘잘’ 살거다. 완벽한 영어에 괜찮은 외모. 누구를 만나든 삼십분만에 친구가 될 수 있는 사교성. 갈수록 좋아지는 성적에 건장한 몸까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니까. 그래도 마음 한편에 그저 자기 혼자 잘사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난 그 아이를 통해 세상이 뒤집혀졌으면 좋겠다. 그 아이로 인해 세상이 훨씬 살기좋은 곳으로 바뀌어졌으면 좋겠다. 크고 놀라운 ‘선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와 아내가 그런 인물로 예한이와 예지를 키울 수 있을까? 부모의 신앙은 자녀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친다. 그런 거 생각하면 참 부끄럽다. 맨날 보여주는 모습이 컴퓨터 앞에 앉아있거나 잠자는 모습이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제 집에서 성경책도 읽고 기도도 하고 그런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세례요한을 딴 예한. 예수님의 지혜에서 온 예지. 그 이름들에 부끄럽지 않은 신앙의 자녀로 키우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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