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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0. 12. 06:13
예수전 - 8점
김규항 지음/돌베개

장님이 먼나라로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코끼리'라는 동물을 만져볼 기회가 있었다. 돌아와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전했다. '코끼리는 엄청 굵은 기둥과 같은 동물'이라고. 그때부터 동네 사람들은 코끼리는 기둥같은 동물이라 믿어왔다. 나중에 그 동네에 책이 한권 흘러들어왔다. 코끼리에 대한 책인데 오래전에 쓰여졌고, 작자는 있으되 정말 그 사람인지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책의 내용이 논란이다. 기둥같은 다리가 있다고 적혀있기는 한데, 구렁이 같은 코와 넓적한 귀도 있다는 것이다. 고민하던 동네 사람들이 결론을 내렸다. 기둥처럼 생긴 것이 코끼리의 본 모습이고 코와 귀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사람들이 자기 생각대로 추가한 내용이라고.

'장님과 코끼리' 이야기를 좀 각색했다. 김규항의 예수전을 읽으며 이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거다. 작은 나라 변방에 태어나 3년간 지방무대에서 전전하다 중앙무대에 진입한지 일주일만에 잡혀서 죽은, 내노라할 만한 제자 하나 없는 목수의 아들이 있었다. 잊혀지는 것이 당연한 그런 삶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30년이 채 안되어 많은 사람이 그의 전설을 이야기하고 그의 가르침이라는 성서를 쓰기 시작했다. 문제는 스승이나 제자나 사회적 유명인사는 아니었고, 공식기록도 없는데다, 오래전 일이다 보니, 어느게 진짜 가르침인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 거다. 해석하는 이마다 원래의 가르침이라고 다른 것을 내어놓는다. 처한 상황에 따라 생긴 시각을 적용해 곁가지를 쳐내고 입맛에 맞는 '중요' 메시지만 남겨놓을 수도 있다.   

사실 어떤 관점으로 예수를 해석하려 하던 이를 지지할 수 있는 내용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정치, 경제, 문화, 철학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일례로 평생 결혼한 적 없는 예수지만, 결혼한 사람도 이혼한 사람도 예수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 이중 저자는 '죽음으로 내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 예수, 즉 신학과 교리 속에 갇힌' 종교적 예수를 버리고 '역사 속의 예수', 계급적 관점을 가졌던 다분히 정치적인 예수를 말했다. 가장 처음 쓰였기에 예수의 가르침에 근접할 것이라는 마가복음을 강독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나는 (이전에도 꾸준히 진행되어 왔던) 이런 시도가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속에 갇혀있는 예수는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예수는 정치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정치적'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넒고 깊어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정치적 메시지를 제외한 종교적 메시지는 후세의 변질이라 쳐버린다. 그를 따르는 이들이 종교적 예수라고 포지셔닝을 했기에 종교적 예수가 된 것이고, 따라서 종교적 예수를 주장하는 메시지는 모두 이후에 추가되거나 변질된 것이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런 식이다. 예수가 가르침을 전했다. 아쉽게 본인은 기록을 남기지 않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남긴 책 밖에 없다. 참고로 이 집단의 특징을 말하자면 순수성을 굉장히 강조한다는 거다. 조금이라도 해석을 달리하거나 다른 내용을 추가하면 저주를 하며 난리다. 그들이 남긴 기록은 예수의 죽음 이후 30년 이내부터 쓰여지기 시작했고 당대의 어느 기록물보다도 사본이 많이 남아 있으며, 사본간의 일치율도 뛰어나다. 그럼에도 이 기록들은 믿을 수가 없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거다. 자신들이 믿는데로 스승의 가르침을 변형시킨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같이 생활했고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이들의 기록을 무시하고) 예수 가르침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과연 그럴까? 내가 가진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다.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기반으로 전체적인 이해를 해야지 미리 짜여진 틀을 가지고 재단하듯 맘에 드는 것만 남겨놓으면 안된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김규항은 '예수가 왜 죽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왜 그가 '정치적' 죽음을 당했는지 설명할 수 없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기에 영성가인, 사랑과 용서만을 주장하는 예수는 잘못된 것이라 단정한다. 하지만 나는 더 본질적인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왜 죽으려고 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왜 그토록 죽기를 원했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면 예수를 이해할 수 없다.

나라의 독립을 오매불망 원하는 사람들이 '독립 기념일'을 맞이해 수도인 예루살렘에 모여있다. 그곳에 지방에서 활동하던, 독립을 가져다 줄 메시야라 소문난, 예수가 찾아온다. 이전에도 여러명의 '자칭' 메시야가 있었지만 사기꾼으로 판명되어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다르다. 능력도 있고 믿을 만하다. 이제 때가 되었구나. 드디어 독립이 되는구나 사람들의 기대는 대단했다. 그런데 정작 예수의 모습은 다르다. 혁명에 대한 의지도 없고, 죽기라도 작정한 것처럼 지도층과 마찰을 일으킨다. 안전에 대한 고려도 없고 '내가 하나님(I AM)이다'라며 신성모독을 저지르며, 재판정에 잡혀와서도 '내가 그리스도다'라는 말로 죽음을 자초한다. 마지막 일주일 예수의 행적은 자살 행위에 가깝다. 이렇게 죽기를 원하는 예수의 행동을 '계급적' 혹은 '정치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까? (개)죽음이 예상되는 상황에 왜 예수는 그렇게 자신을 몰아 넣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종교적인) 초월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빼버렸기에 부활에 대해서도 정면승부를 할 수가 없다. 부활이라는 비논리적 사건에 대해 직접적 설명보다 '문제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인가가 아니라 부활이 무엇인가'를 논하면서 비껴갈 수 밖에 없다. 제자들은 예수가 말한 '진정한 목숨'의 의미를 깨달았기에, '예수가 죽지 않았다고, 영원히 살아있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했다. 스승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도망쳤던 제자들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기에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놓았던 거라 이해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눔의 원리'만을 남겨놓는 '오병이어'에 대한 어정쩡한 해석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예수의 '정치적' 죽음에 결정적 증거 노릇을 한 '나는 그리스도'라는 발언에 대해 별다른 해석없이 넘어가는 부분에서는 당혹감마저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김규항을 좋아한다. 그의 글을 좋아하고 그의 생각을 좋아한다. 몇년에 걸쳐 그의 글은 하나도 빼어놓지 않고 읽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용해 교회를 키우고 제왕적 권위를 즐기다 자식에게 넘겨주는 일부 목사들보다 김규항이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까울 것이다. 간통 목사들은 비교할 가치도 없고. 그럼에도 이 책에 나타난 예수에 대한 그의 이해는 편협하다. '예수전'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닌 '예수의 말을 인용한 김규항의 세계관'이다.   

하긴 이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극단적 선택을 강요하는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다. 중간 어디쯤으로 해석하려는 어떤 시도든 무리수를 낳을 수 밖에 없다.

몇년전 신앙의 갈등을 겪고 있던 때 시절 쓴 글이 있다. 거기서 C.S 루이스의 다음 문장을 인용했다.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정말 멍청한 말이 있다. 난 그 말이 다시는 안나왔으면 좋겠다.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인 선생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이 말은 정말 말이 안되는 말이다. 만약 그저 인간이기만 한 어떤 사람이 예수와 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도덕적 선생이 될 수가 없다. 그는 미쳤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 정도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선택을 해야한다. 이 예수라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정신병자 혹은 그보다 더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우리는 그를 미쳤다고 입을 다물게 하고, 침을 뱉고, 혹은 그를 죽여버릴 수가 있다. 아니면 그의 발에 엎드려 그를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잘봐주는 척 하면서 예수가 위대한 스승이라고 하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말을 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런 선택권을 남겨주지 않았다. 그는 절대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를 주로 인정하고 굴복하던지 정신병자라고 무시하던지 둘 중 하나다. 이도 저도 아니면서 그 주위에 머무르는 것은 시간 낭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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