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9. 11:22
얼마전 옆주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잠시 동네가 술렁거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소위 '문제아'들로 구성된 네명의 고등학생이 외딴 곳에 위치한 집 하나를 골라 이른 새벽 찾아가 무조건 안에 있는 사람을 죽이기로 한겁니다. 11살난 딸과 편하게 자고 있던 42살 엄마는 이들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딸은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갱단의 리더라도 되는 양' 나쁜 일을 자랑스러워 하던 스티븐 스페이더라는 17세 퇴학생이 주도하고 다른 세명이 참가한 것입니다. 완전히 '묻지마 살인'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별것 아닌 일로 홧김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자기 가게 앞에 옆집 사람들이 왔다 갔다해서 성가시다고 도끼로 찍고, 강아지에 목줄을 안맨 것을 지적한다고 옆집 여자를 낫으로 찍어죽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영화 보고 흉내낸다고 선배를 찔러죽이려 한 20대도 있더군요.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기까지는 여섯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여섯단계가 몇초안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몇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첫번째, 죄를 저지르겠다는 마음이 들면, 두번째, 정말 저지를까 말까 앞뒤를 재어봅니다. 세번째, 정말 죄를 짓겠다는 결심을 하고, 네번째, 범죄를 준비합니다. 다섯번째 범죄의 첫 행동을 시작하고 여섯번째, 범죄를 마침내 저지릅니다. 여자를 향해 음욕을 품고 (첫째), 강간을 저지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두번째), 저지르기로 결심을 하고 (세번째), 대상과 장소를 물색한 후 (네번째), 여자를 뒤쫓아 끌고간 후 (다섯번째), 마침내 강간을 저지르는 겁니다 (여섯번째) 1
범죄의 구성요소를 정신과 행동으로 나누는데 세번째 단계를 마치기 전까지는 정신적인 구성요소를 만족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다섯번째 단계까지는 행동의 구성요소를 만족하지 않는 것이구요. 즉 여섯단계중 다섯단계 전에 생각을 돌이킨다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은 있을지언정 법적인 책임은 없습니다.
대부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단계에서 다음단계로 넘어갈 때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죄를 저지르겠다는 마음조차 먹지 않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실행에 옮기기까지 단계별로 제동을 거는 것이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양심이라는 브레이크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나쁜 생각이 드는 때부터 실행에 옮기기까지 쭉 내달리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이의 생명을 중히 여기는 것. 다른 이의 행복을 중히 여기는 것. 사람이라면 마땅히 간직해야할 기본적인 양심입니다. 이를 외면할 때 브레이크는 먹히지 않게 됩니다. '정의'라는 가치가 '경제'라는 논리에 지배당하고, '진리'라는 가치가 '이익'이라는 논리에 의해 외면당할 때 '양심'이라는 단어는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우리 정신의 브레이크는 해체당하고 마는 겁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분명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조두순이나 스티븐 스페이더나 자신의 목숨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자들입니다. 하지만 '양심'이라는 브레이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흐름이 지속되는 한 세상은 더 많은 조두순을, 더 많은 스티븐 스페이더를 만들어낼 겁니다. 물론 그런 세상의 흐름이 죄 지은 자에게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죄를 저지르기 전에 여섯번의 멈출 기회가 있습니다. 여섯번중 한번만이라도 브레이크가 작동되면 됩니다. 그조차 못하는 '양심'이라면 살아있다 말하기 힘들지요.
삭막한 세상입니다. 세상의 흐름이 바뀌어, 참다운 가치가 인정받아 '양심'이 힘을 얻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정신이 깨어나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세상을 바로 잡는 일이 필요합니다. 세상도 '브레이크'가 필요합니다. 그냥 이대로 간다면 무서워서 어딜 살겠습니까.
- 굳이 강간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치졸하고 저열한 범죄가 강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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