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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해당되는 글 4건
2012. 3. 10. 14:05

What?

Last time, I wrote about how to handle troubled situations. I laid down the best approaches when you are stuck in a difficult situation. I liked it. The three actions you should take in the situation are the best choices, I believe. But, I got another question. Is that it? The thought was very 'Humanistic'. There was no room for Divinity.

So What?

Last Sunday, my church's pastor gave a great sermon. Interestingly, the topic was same. How to handle troubled situations. But the conclusion was totally different my writing.

The passage of the sermon was from Exodus where Moses and Israelite were facing red sea and Egyptian army was chasing them. Israelite didn't go there by a chance. Bible says that God told Moses to bring his people to that place and wait. It was near important army base of Egypt. The instruction did not make any sense. No wonder Israelite complained. But that's when God showed who HE is - dividing Red Sea so people can cross and making it collapsed with Egyptian army.

With God in the picture, it becomes a totally different story.

Now What?

First, do not fear. You need to trust HE has a plan for you no matter what the situation is. You may be there by your mistake or some force beyond your control. Still have faith. HE can turn the trouble into a blessing. HE is the king.

Second, know your place and know how HE works. In previous posting, I said you need to do your best as if your life depends on it. But Bible teaches other way. Sometimes you should shut your mouth and watch what HE does. It is tricky because sometimes HE wants you to act. You need to know how HE works. A good news is as the situation gets worse and you have less options, HE shows greater things.

Third, grow through the experience. HE turns your trouble into a training. Not just a training. It makes you distinguished. Blessing when you are thrown into a fire furnace transforms you. Again, everything is about YOU. HE wants YOU to grow. What HE cares is only YOU.



2011. 1. 27. 11:56
요즘 40일 특별새벽기도 기간이다. 아내는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꼬박꼬박 참석한다. 나도 회사와 학교 때문에 바쁜데도 교회 재정을 맡고 있고 지난주는 골수 기증도 했다. 둘다 나름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살려 애쓰고 있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이쯤 되면 좋은 일만 생기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나쁜 일은 막아주시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걸거다. 

근데 실제로는 안 그렇다. 오히려 정반대라고 할까? 다음주 월요일에 이사하는 마당에 거절하기 힘든 그렇지만 반갑지도 않은 손님이 금요일에 방문을 하고, 토요일에는 왕복 아홉시간을 운전해 조카를 뉴욕 공항에 데려다 줘야한다. 그거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며칠전에는 차고 문이 고장나고 화장실 수도꼭지가 부러졌다. 어제는 모기지가 꼬여 반나절 꼬박 은행을 쫓아다녔고 오늘은 아내 차가 눈에 빠져 한시간반을 고생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게다가 딸아이는 오케스트라 오디션장에서 누가 첼로를 넘어뜨리는 바람에 손에 맞지도 않는 첼로를 빌려 시험을 치러야했고 결국 1점차로 떨어졌다. 

골수 기증 이후 오히려 안 좋은 일만 꼬리를 문다. 그래도 누가 다치거나 하는 심각한 일이 없는게 다행이라 할까?  

어째 시험을 치루는 기분이다. "너가 얼마나 신실하게 감사하며 사는지 한번 봐야겠다" 하시는 것 같다. 감사의 테스트라 할까? 아니면 새벽기도니 골수기증이니 하는 눈에 보이는 걸로 마치 우리가 훌륭하게 사는 것처럼 착각하면 안된다는 걸 가르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몸과 마음이 힘들지만 서운하다거나 걱정되는 마음은 없다. 물론 "좀 쉽게 좀 하시지"하는 생각은 든다.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게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감사해야겠다. 이해는 안되도 맘에 들지는 않아도 감사하다. 나중에 돌아보면 다 이유가 있을거라 믿기 때문이다. 이전에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갈수록 시험이 어려워질 것 같아 걱정이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지금 시험이나 잘 치뤄야겠다. 이사 마치고 정돈될 때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감사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감사할 일이 참 많이 보인다 ^^ 좋은 조건으로 렌트로 들어온 사람도 금방 찾게 되고 이사갈 집도 좋은 조건으로 구하게 되고. 그것만 해도 정말 감사한 일이지. 감사의 눈으로 보면 참 감사할 일이 많아진다.









2008. 12. 28. 16:22
왕멍의 '나는 학생이다'를 읽고 있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학생'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관리, 작가, 농부의 생활을 했지만 그중 어느것도 자신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며, 돌이켜 보건데 그는 항상 학생으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학생'이라 단정짓는 그의 단호함이 부러웠다.

내가 무엇인가하는 고민 뒤에 이 책을 읽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를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아직 살아온 날 못지 않게 남은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에 대한 정의에는 지금까지 삶에 대한 고백도 있겠지만, 이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의지의 부분도 있다. 지금까지의 길을 정리하는 것임과 함께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겠다는 결단이다.

나는 엔지니어인가 질문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오랫동안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살았다. 엔지니어 특히 프로그래머가 좋았고, 평생 그 길을 가고자 미국에 건너왔다. 하지만 계기가 있어 엔지니어보다는 매니저의 삶을 선택했다. 엔지니어링 마인드는 항상 가지고 살겠으나 엔지니어라 부르기에는 실제 기술에서 너무 떨어져있다. 나는 엔지니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매니저인가? 그렇게 부르기에는 아직 매니저로 보낸 시간이 전체 인생에 비해 짧다. 그리고 지금 계획하는 일이 성공한다면 또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남은 생애 무엇을 할지 모르기에 매니저라 부르기도 힘들다.

나는 작가인가? 글과 사진을 좋아하고 언젠가 글과 사진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소망이 있으나, 작가라 부르기에는 시간과 경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적지 않은 관심을 쏟기는 하나, 주업에 비하면 우선 순위는 한참이나 밑이다. 나는 작가는 아니다.

40년 남짓한 인생중, 18년을 학교 생활을 했고, 미국에 와서도 MBA다 뭐다 하면서 3년 넘게 학교를 다녔으니 '학생'이라 나를 규정할 수 있을 법 하다. 평생 공부하며 살겠다는 것이 내 주장이기도 하니 '나 학생이다' 선언할 수 있겠으나... 뽀대가 안난다. 따라하는 것은 왠지 캥긴다 ㅡ.ㅡ

그러다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회에 발을 들인 이후 30년 가까이 내가 크리스찬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년간 진리를 확인하고 싶어 신을 부정하고자 노력한 적도 있었고, 지금도 성경의 모든 것을 이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내 생각 근본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이 떠났던 적이 없다. 한국 기독교의 썩어 있는 모습울분을 쏟는 이유도 '내가 크리스찬'이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선이 있다고 믿으며 또한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인정한다. 또한 세상에는 내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함을 경험하여 알고 있다. 세상은 신을 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과학적 가설의 조합보다 절대선을 통한 설명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절대선이 존재할 때, 귀결점은 인격신이라는 논리에 찬성한다. 인격신이 존재한다면, 그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 인류에 평화와 소망을 주길 원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인격신에 가장 근접한 모습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라는 결론을 내렸다. (충분한 비교가 없었기에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라고 단정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가 가장 쉽고 확실한 길임을 믿는다.)

나는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구원관을 믿는다. 예수의 오심과 죽으심, 부활하심이 거대한 시나리오에 맞추어진 꼭 필요한, 그러면서도 참으로 감사한 사건임을 믿는다. 그 예수의 가르침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것임을 믿으며, 더불어 그에게는 단지 '좋은 선생'을 넘어선 신적 초월성이 있음도 믿는다. 그를 따라가며 '거룩'해지는 것이 내 삶의 목표이며 그게 내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임을 믿는다.

그렇다. 나는 크리스찬이었고, 크리스찬이며, 앞으로도 크리스찬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게 나의 정체성이다. 그가 열심히 살라 하였기에 나는 내 직업에 충실할 것이고, 그가 거룩하라 하였기에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가 사랑하라 하였기에 내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것이며, 그가 남을 도와주라 하였기에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애쓸 것이다. 그가 희생을 보여주었기에 나도 희생을 치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도록 그를 닮아갈 것이다. 지금까지 부족했기에 앞으로 더 열심을 낼 것이며, 또한 도움을 청할 것이다.

나는 크리스찬으로서의 내가 좋다. 그리고 그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다.






2008. 2. 4. 16:17
#1.

최근 일년동안, 아니 훨씬 이전부터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는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그 얼마전부터 우리 가족은 나와 아버지를 빼놓고는 모두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환경의 영향도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놀러다니다 "심심해서" 가족들이 다니던 교회에 들어섰던 그날 오후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이후 기독교는, 그리고 교회는 내 삶에서 빼놓기 힘든 것이였다. 목사가 되고 싶었던 중고생 시절, 독재와 사회 모순에 대한 대안으로 기독교 밖에 없다 믿었던 대학시절을 보냈다.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고, 부모님을 보내드리고, 미국에 오는 인생의 굴곡에 맞추어 신앙의 업다운도 경험했다. 그리고 지난해 그동안 회피하고 있었던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정말 믿을만한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답을 찾기 쉽지 않은 질문들을.

#2.

질문과 고민으로 점철된 2007년 말에 이 책을 만났다. "내려놓음" 2006년과 2007년에 걸쳐 5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이 책을 쓴 이용규선교사는 원래 역사학도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하버드에서 중동사로 박사를 받았다. 박사를 받고나서 신학이나 선교학 공부도 하지 않은 저자는 몽골로 날아간다. 몽골국제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이레교회의 담임으로, 부인은 몽골영양개선연구소의 소장으로 그 지역을 섬기고 있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저자가 경험했던 "은혜"를 기록하고 있는 일종의 간증서적이다.

간혹 어떤 간증서적은 개인의 경험과 보편적 진리를 혼동해서, 자신이 겪은 일이 전부인양 주장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간증서적을 즐겨읽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일관된 추천 때문이였다. 그렇게 좋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을 제시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런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오랜 교회 생활로 머리만 커지고 줏어들은 것은 많았기에,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이미 한번씩은 들어봤던 원리와 비슷한 경험들이였다. 하지만 고민 하나는 나에게 확실하게 던져주었다. 그것은 '과연 믿는다는게 도데체 뭔가?'라는 질문이다.

#3.

책을 통해 나타나는 이용규선교사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을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지도교수가 바뀌면서 준비하던 논문을 재구성해야 했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기에 기도하면서 결정했던 기간내에 졸업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믿고 맡기며 한달반을 준비한 결과 예상보다 너무나 쉽게 정리가 되었다. 새로운 교수도 그 결과에 너무 흡족해했고 원하는 시기에 졸업할 수 있었다. 제2외국어로 선택한 독일어가 너무 힘들어 논문심사에 떨어질 위험이였지만 다행히 번역할 본문으로 로마서가 나와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혹은 차가 없는 사람들을 태우고 교회에 가고 싶어서 미니밴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문제가 많아 팔 수도 없던 차를 누가 뒤에서 받았다. 차는 완전히 부서졌는데, 다행히 보험회사에서 산 가격보다도 더 많이 보상을 해주어 아주 쉽게 중고 미니밴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이런식을 우연들이 가득 차 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비판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선택적 관찰'이다. 잘 되도 신의 뜻, 잘못 되도 신의 뜻. 이렇게 해석을 하고 나면 세상에 신의 뜻이 아닌게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도 같은 비판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학을 가기전 그는 공부하던 중국사를 계속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중국사로 지원한 학교는 다 떨어지고, 중동사로 지원한 하버드에 붙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생각한다. 원하고 기도하던 것을 받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지금의 선교를 감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였다는 거다. 반면, 아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영양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선교에 쓰이게 되었다.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도 그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였다.

하지만 그저 벌어진 일만 놓고 본다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뜻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신의 인도하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이른바 믿음이 성장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신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 이렇듯 이성적으로 접근했을 때 신에 대한 믿음이 자라날 틈은 별로 없다.

#4.

사실 기독교에는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아이러니들이 상당히 많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은 중요한 전쟁을 준비하며 제사장인 사무엘을 기다린다. 하지만 사무엘은 약속한 기한인 일주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백성들의 사기는 떨어져 도망가기 시작한다. 이에 사울은 스스로 제사를 지내고, 그 이후에야 도착한 사무엘은 오히려 사울을 책망한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사실 사울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말이 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상황에 따라 유연한 선택을 한 사울은 좋은 리더다. 게다가 먼저 약속을 어긴것은 사무엘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한다.

이 책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다. 어떤 문제를 놓고 시한이 다 되도록 기도해도 응답이 없더라는 말에, 저자는 이렇게 질문을 한다. "해결시한이 다 지나고 나서도 믿고 기다려 본적이 있느냐"라고. 집안 문제로 인해 백만원이 급히 필요하다고 치자. 내일 아침에 필요한데 밤 열두시가 다 되었는데, 돈 나올 구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다 믿어진다면 믿고 기다리는게 신앙이라는 것이다.

살아 생전 오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조지 뮬러의 일화는 많이 알려져 있다. 평생 고아원을 운영하던 뮬러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았다. 어느날도 당장 다음날 아침 아이들 먹일 식량이 없었다. 마침 같은 지역의 정치인이 기부금을 냈는데, 그 금액이 아이들을 먹이고 남을만큼 충분했다. 하지만 이 정치인이 부도덕한 인물이였는지 뮬러는 그 돈을 거부했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 기대했을 때 다음날 아침 근처 제과점에서 원래 시간보다 조금 더 요리된, 하지만 먹기에는 충분한 빵을 보내왔다. 딱 아이들을 먹일만큼의 양이였다고 한다.

학비야 장학금을 받는다 쳐도 매달 2000불 정도가 생활비로 필요했다. 근처에 넉넉한 사람이 없기에 어디 도움 받을데도 없었는데도 이용규선교사는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한다. 한번도 여유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부족한 적도 없었단다. 누구는 그럴 것이다. "그만큼 열심히 그리고 검소하게 살았을꺼야." 당연히 그는 검소하게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5.

지난 일년간 나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접근했다. 누군가 신앙은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반응"이라고 했다. 난 그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신앙은 머리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내 삶에서 "선택적 관찰"의 한가지 예를 경험했다. 이전 일을 내려놓고 다음 일이 결정되기까지 세달의 기간동안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사업부의 최고 책임자에게도 여러번 불평을 했다. 그래도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날 내가 참 교만했다는 생각을 했다. 절대자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나를 깨달았고, 그 문제를 내 손에서 내려놓았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절대적인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당신이 계시다면 당신이 책임져주세요"하고 하나님에게 맡겼다. 그리고 일주일도 채 안되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몇가지의 옵션이 주어졌고, 그 중에는 평소에 원했던 일보다 더 좋은 일도 있었다. 내가 최종목표로 삼는 일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일이다. 추가로 이전에 하고 싶었던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아직도 남아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조건이 좋아진 것이다.

우연이라 해석할 수 있다. 시기가 무르익었기에, 충분히 기다렸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맘 깊은 곳에 침잠해 들어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 물어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라는 답을 듣는다. 그런 대답을 듣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믿고 싶으니까, 믿는 것일 수도. 하지만 그런 "우연"들이 계속된다면.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현상들이 "믿음의 눈"으로 해석된다면, 그게 바로 믿는다는 것이 아닐까? 내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참 많다. 그리고 나도 그런 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6.

아직도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세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을 배제하고도 세상은 해석되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는 없다. 절대자를 배제하고는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못찾겠다. 신이 있을 때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다.

그렇기에 나는 신을 믿고 싶어하고, 절대자를 그리워한다. 놀랍게도 내가 그를 따르려고 할 때 이성적으로 100%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너무나 좋은 "우연"들이 생기고,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가치있게 해석이 된다. 그를 의지할 때 행복하고, 그를 생각할 때 나의 결점들이 보인다. 그의 사랑을 느끼며,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 말씀에 순종하려 노력할수록 나는 내가 조금씩 더 "훌륭"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직도 난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을 소망한다. 하지만 분석만 한다고 이해되어지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인정한다. 내가 그 길을 걸어갈 때, 비록 하루 하루 이해할 수 없어도 돌이켜 보면 그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이였음을 믿게되는 것. 그것이 믿음임을 이 책 "내려놓음"이 가르쳐 주었다.

왜 그렇게 만드셨는지. 왜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없게 해놨는지 솔직히 불만이다. 그리고 죽고나면 따질 것이다. 그럼에도 절대자가 그것을 원한다면, 내가 어찌하겠는가. 결국 직접 걸어봐야 이해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걸어가 보면 그길은 더이상 착각, 망상, 혹은 자기 세뇌가 아니다. 그 길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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