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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24. 03:34

천주교의 "내 탓이오" 운동을 기억한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기도문과 함께 자신의 가슴을 치는 것이다. 책임지지 않고 남 탓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내 탓이오" 운동은 이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세월호 사고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승객이 있기를, 그리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가능성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몇몇 정신병자 말고는 온 국민이 충격에 빠지고 눈물을 흘렸다. 사고 하나로 수많은 부패와 무능과 부실이 드러났다. 모두 답답하고 안타까움에 고함을 치고, 손가락질하고, 자기 생각과 의견을 내놓았다. 

때가 되었나 보다. 세월호 사고와 물리적으로 연관이 없을 사람들이 내 탓이라며 나타났다. 기독교인들이다. "이제 손가락질 그만하고 침묵하고 회개합시다"라고 한다. 예상했던 일이다.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왔기에 그 말이 어떤 성경적 의미인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참담한 현실 앞에, 설사 내가 원인이 아니더라도, 나의 죄를 보게 된다. 이웃을 위해, 민족을 위해 했어야 하는데 하지 못했던 것들이 생각난다. 무릎 꿇고 회개하며 나라와 열방을 위해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은 성숙한 태도다. 권할만 하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신앙인이 해야할 전부라 생각지는 말자. 

회개하는 것에서 멈추면 안된다. 지금은 "손가락질 그만하고 침묵"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왜 부실하게 개조된 배가 안전 검사를 마쳤는지, 왜 권장항로를 벗어나 유속이 두번째로 빠르다는 곳으로 배를 몰았는지, 왜 안정을 위해 채워야 하는 물이 적게 차 있었는지 확실히 가려내야 한다. 왜 20년이었던 배의 수명이 30년으로 늘어났는지, 왜 힘들여 만들어놨던 재난대피 매뉴얼들이 휴지로 사라졌는지, 왜 호평받던 방재청을 분산시키고 능력없는 이들로 채웠는지 확실히 밝혀야 한다. 왜 얼마 동원하지도 않았는데 최선을 다한다고 거짓말을 했는지, 왜 사재를 들여 가져온 구조장비를 돌려보내고 다른 곳에서 몰래 구해 사용했는지, 왜 문제점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지 지적해야 한다. 나라의 선장이 세월호 선장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제일 먼저 탈출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공의가 강물 같이 흐르기 위해 불의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여섯살 짜리 아이가 다섯살 짜리 동생에게 구명복을 입히고 엄마 아빠 찾겠다고 나서고는 돌아오지 못했다. 부모가 자기 쉽게 찾으라고 학생증을 손에 꼭 쥐고 죽은 학생도 있다. 맞다. "내 탓"도 있다. 하지만 더불어 "그들의 탓"도 분명히 해야한다. 지금은 손가락질을 멈출 때가 아니라 제대로 해야 할 때다. 광기는 멈출지라도 분노는 오래 간직하고 쉽게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겨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이쯤에서 침묵하고 내 탓만 하며 정작 그들의 탓은 덮어 버리고, 몇년후 또 다른 죽음 앞에 가슴을 치며 회개만 할 것인가. 그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2014. 4. 22. 00:27
우리의 신앙이 분별력과 만나기까지 - 8점
송인규 지음/부흥과개혁사

교회 책꽂이에서 우연히 송인규 목사님의 책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대출해 읽었습니다. IVFer 시절 송목사님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은 필독도서 중의 하나였습니다. 설교집 이외의 기독교 책을 쓰는 당시로는 매우 드문 저자였지요. 

이 책은 그리스도인에게 분별력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분별력은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가 구체화되는 중요한 방도이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증표이며, 지도자의 필수자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리와 신학, 목회 사역, 생활, 그리고 신앙 전반에 걸쳐 40개의 주제를 다룹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나, 방언을 어떻게 대할까, 성모 마리아에 대한 바른 관점, 왜 악이 존재하는가, 크리스찬의 자녀 교육, 왜 기도해야 하는가, 헌금, 고지 점령론과 낮아짐 등의 주제입니다. 

주제별로 편차가 좀 있습니다. 주제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장단점을 소개하며 바람직한 시각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는데, 대체적으로 자세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어떤 주제는 문제점 소개 정도에 끝날 때도 있습니다. 특히 관심이 있었던 인간의 자유와 악의 문제는 너무 짧아서 아쉽더군요. 또한 민감한 주제들, 예를 들어, 목사와 당회의 권위, 교회 건축, 십일조는 성경적인가 등은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추천합니다. 한국 교회 타락의 주 원인은 목회자에게서 나왔고, 이는 성도들의 분별력 없는 순종및 목회자 우상화이 뒷받침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느 때보다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별로 한권씩 비치해놓고 성도들이 다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음 ... 이 책을 비치해둘 교회와 목회자라면 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요.




2014. 4. 16. 00:32
모험으로 사는 인생 - 10점
폴 투르니에 지음, 정동섭 옮김/IVP


폴 투르니에의 <모험으로 사는 인생>을 읽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다!"라는 부제로 삶과 신앙을 모험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바라봅니다. 


인간은 원천적으로 모험을 원함을 설명하고, 삶에서 나타나는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가치있는 모험을 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우리 삶을 모험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투르니에는 묵상을 제안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살피면 살필수록 그만큼 행동을 적게 한다. 적게 행동할수록 그들이 해야 할 바를 알아내는 것이 어렵게 된다. 그들은 쓸데없이,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따져 묻지만 거의 대답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멈춰 서 있을 때가 아니라 뭔가 하고 있을 때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움직이지 않는 자동자의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여러번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간다면 우리가 설사 잘못된 방향으로 가더라도 하나님이 방향을 틀어주신다. 하지만 가만히 멈추어 서 있다면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 방향이다 싶으면 주저없이 나아가라." 


폴 투르니에의 책을 읽다 보니 발견한 글귀와 비슷하기에,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가 보다 싶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

가끔 보면 '나의 갈 길을 모르오니' 하며 주저 앉아 있는 친구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정말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싶어서 살펴보는 건지, 아니면 게으름인지 분간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쨋든 일단 움직여야하지요. 다만 민감하게 반응을 살피면서 방향을 조정해나가면 되는 겁니다.


많이 밑줄 치고 많이 끄덕였습니다. 현재의 내가 아닌 무언가 다른 모습이 되기를 원하는 욕구는 왜 생기는지, 어떻게 더 나은 나를 만들어내는 모험을 해나갈지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2014. 4. 7. 10:20
'대체 나에게 왜 이런 재수 없는 일이?'하는 상황도 곰곰히 돌아보면 몇번의 '만약에'하는 순간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만약 이 순간에 좀 더 조심했다면,' '만약 그 사람에게 내가 먼저 전화를 했다면,' 등등. 

실수에서 배운다는 것은 그 '만약에'하는 순간들이 다시 돌아올 때 이번에는 다른 결정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이의 실수는 쉽게 잊어버리더라도, 자신의 실수는 오래 기억하며 곱씹어봐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는 거다. 

곁다리지만, 모든게 마음먹기 달렸다던가 과거와 현재는 잊고 현재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을 달가와하지 않는 것이 이런 이유다. 현실은 내버려두고 자기 최면을 통해 얻는 행복이 행복일 수 있겠는가.




2014. 3. 27. 06:02

크리스찬은 답을 가진 사람들이다. 최소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도, 어떠한 궁지에 처해 있어도 의지하면 해결해 줄 분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렇기에 고난도 감사함으로 지날 수 있고, 절망함이 마땅한 상황에도 희망을 붙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때로 다른 이의 아픔에 둔감하다. 같은 상황에도 체감하는 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겪었던 상황은 어떤 이에게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려움일 수도 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지할 분이 있었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최근 몇달동안 자살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의 시작은 문학이었다. 자살하는 사람에 대한 소설을 읽고 평을 들었다. 처음 든 생각은 그들의 선택은 틀렸다였다. 하지만 문득 내가 너무 쉽게 답을 던지고 있구나 깨달았다. 

세모녀의 자살이 있었다. 노동당 부대표도 자살하고, 장애인도 자살했다. 공부하던 학생도 자살하고, 답을 가르치던 목사도 자살했다고 한다. 그들이라고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세상에 아픈 사람이 너무 많다. 눈 앞에 벌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벌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정답은 정답이다. 내가 가진 그 답을 나누고 싶다. 힘들어 하는 이들이 내가 간직한 소망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게 도와주고 싶다. 그러나, 아픔에 대한 동감 없이 쉽게 던지는 해결책은 또 다른 폭력이다. 현실은 그대로 개판인데 잘 될거라는 어설픈 위로는 공허하다. 왜 포기해 노력하면 되잖아라는 충고는 애써 잡고 있던 끈마저 놓아버리게 할 수 있다. 믿고 기도하자는 말은 아직 답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답이 아닌 거다. 

더 민감해야겠다. 내가 가진 답을 제시하기 전에, 아픔을 같이 느끼는 것이 먼저다. 그게 시작이다. 

...

갑자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시는 곳까지 자신을 낮추신 그 분의 마음이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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