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564)
책 그리고 글 (87)
미래 빚어가기 (79)
시간/행동 관리 (44)
조직을 말한다 (16)
마케팅 노트 (14)
짧은 생각들 (33)
사랑을 말한다 (27)
세상/사람 바라보기 (40)
그밖에... (83)
일기 혹은 독백 (85)
신앙 이야기 (24)
음악 이야기 (19)
법과 특허 이야기 (13)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황석영'에 해당되는 글 2건
2009. 5. 20. 13:46
날자보다는 요일에 더 신경을 쓰고 살 때가 있다. 요즘이 딱 그렇다. 어제도 월요일을 맞아 일주일의 계획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날자를 봤다. 5월 18일이다. 대학교 1학년 '...넘어 ...넘어'를 보고 그 믿겨지지 않는 역사에 울분을 토하던 때가 어느덧 이십여년이 흘렀건만, 5.18 그리고 광주의 의미는 매년 생생히 다가온다. 어쩌면 그 사건을 기억하며 자꾸만 작아지는 시선을 크게 만들고자 하는 내 무의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회적 모순은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있다는 것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파하는 자들은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거의 한달동안 관심을 끄고 있었던 한국 소식이 궁금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으며 '다음'을 열었다. 그리고 황석영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황석영, MB, 중도실용... 제목에 쓰여진 생소한 단어의 조합을 보며, 놀라기도 했지만 머리 한편에서는 '황석영 이 사람도?' 하는 나름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기사를 읽어보니 역시 그랬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구차한 변명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안 좋은 것 한가지는 존경하는 이들의 리스트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한때는 내 인생에 좋은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들이 어느날 보니 추한 모습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박성수가 그랬고, 김진홍이 그랬다. 하다 못해 조갑제도 내게는 고등학교 시절 '민은 졸이다'라는 책으로 대입을 위한 공부가 다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 사람이었다. 박홍, 김민석, 서경석, 김동길... 한때는 청년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치던 사람이다. 하물며 박찬종이나 이인제도 좋은 시선으로 본 적이 있다.

자신의 좋은 의도가 오해받고 있다는 황석영의 말은 자체로 역겹다. 자신의 발언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랐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완전 바보임이 분명하다. 소설가 황석영은 바보는 아니었던 것을 생각하면 추하게 늙었거나 늙어가며 멍청해진 것이리라. 하긴 '비명을 찾아서'라는 획기적인 작품을 썼던 복거일이나 '사람의 아들'의 이문열의 지금 모습을 본다면 황석영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지만.

세상 변해가는 것 모른체 하며 고집 부리라는 것은 아니다. 시대에 따라 유연함을 보일 수 있는, 그럼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멋있게 나이들어가는 그런 지식인이 보고 싶다. 아니다. 자신이 유치하다는 것도 모르고 어떻게든 뜨기위해 짖어대는 '변희재' 같은 인간을 보면 내가 너무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하다. 머지 않아 '지식인'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혐오단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을 지도 모르고.

참 지랄같은 세상이다.






2008. 7. 3. 14:49
바리데기 - 6점
황석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세상에 존재하는 부조리는 글쓰는 이의 중요한 소재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부조리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이를 없애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혹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부조리를 까발리어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부조리가 사라질 수 없고, 세상의 모순은 확대재생산되어 간다면, 세상을 향해 외치던 이로서는 허탈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내가 읽은 황석영의 첫 작품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다. <넘어 넘어>로 불리우던, 당시로는 유일하게 광주항쟁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던, 80년대를 살며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든 읽어봤을 필독 도서다. 솔직히 이 '황석영'이 대입 시험에 등장했던 <장길산>의 그 황석영인줄 전혀 생각못했었다. (황석영이 <넘어넘어>를 쓸 줄 알았다면 대입시험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을까? 절대 없었을 것이다.)

부조리에 대한 고발은 그의 문학의 큰 줄기이다. <장길산>이 지나간 역사를 들어, 그 시대의 부조리를 이야기하였다면, <넘어 넘어>는 살아가고 있는 그 시대의 모순을 목숨걸고 고발하였던 작품이다.

이후 그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소설의 소재가 되어도 충분할 인생의 곡절을 겪었다. 그런 그가 최근에 <바리데기>를 들어 다시 세상의 부조리를 이야기했다. 80년대와 차이가 있다면 스케일이 커졌다고 할까? 전작 <심청, 연꽃의 길>이 제국주의 시대에 가상의 인물 '청'을 등장하여 그 당시의 모순을 이야기했다면, <바리데기>의 '바리'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지금의 세상 어딘가에 꼭 한명 있을 것 같은, 우리 세상의 아픔을 담고 있는 여인이다.

태어나며 받았던 남존여비의 차별은 어쩌면 바리가 받았던 가장 신사적인 부조리였을 것이다. 북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그리고 영국으로 흘러가는 그녀의 삶에는 시대의 모순이 새겨져 있다. 인민이 살기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던 그 곳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자본주의의 돈맛을 알아 다른 이의 생명을 죄의식 없이 짓밟는 인간들. 나라의 독립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임에도, 힘이 없기에 폭력에 의지하고, 또 그래서 악으로 치부되는 민족. 지독한 인생 피할 곳은 중독밖에 없기에 다른 이의 호의를 죽음으로 돌려주는 불쌍한 인생.

작가는 바리의 삶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잘 엮어냈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사실적인 묘사. 바리가 무당의 끼를 타고났다는 설정을 통해, 여러 등장인물들의 절망과 희망을 드러내는 것은 탁월했다. 특히 상세히 묘사된 북한, 그리고 탈북자들의 상황은 같은 시대에 이렇게 다른 삶이 있나 하는 이질감까지 느끼게 했다.

하지만 작가는 세상에 대한 고발에서 한발짝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소설 속의 바리는 고난과 아픔을 겪고 생명수를 찾아오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허나 어쩌나. 생명수 하나 찾아서 없어질 세상의 모순이 아닌 것을. 결국 바리가 찾아온 '생명수'는 어설픈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되고 만다. 잘 풀어나가던 이야기 보따리를 마지막에 황급히 닫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차피 세상의 모순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작가의 절망 때문이 아닐까? 9.11 이후 이라크 침공이 진행되는 시대속에 아랍인 남편 알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는 바리에게서 '생명수'는 보이지 않았다. 허탈했다.

'바리가 구한 생명수는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작가는 '생명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바리는 그것을 찾기라도 했을까요?'라고 답한다. 이 부분에서 작가에 대한 배신감마저 느낀다면 심한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무기력함을 공유해야 하는 것일까?

광주의 죽음을 한참동안 이야기할 수 없었던 나라가, 대통령을 온국민의 놀림감으로 삼는 나라로 바뀌었다. 최류탄 연기로 눈물 흘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거리에 나가 정부를 비판할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만큼 더 밝아졌을까? 그만큼 더 나아졌을까? 잘 살게 해준다면 윤리의식은 개에게나 주라고 반이 넘는 국민이 합의했던 사건은 또 다른 모순이다. 진실을 찾는 목소리가 개인의 이해관계로 필터링되는 세상의 소통은 해결책이 없을 또 다른 부조리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전보다 더 지능적으로, 더 치사하게 진화해갈 뿐이다.

<바리데기>에 생명수는 없었다.

다만 답을 제시하고자 붓을 들었으나, 답을 찾지 못한 작가의 회피하는 모습만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책 그리고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티븐 킹의 창작론  (30) 2008.07.14
문학에 관한 10문 10답  (10) 2008.07.09
칼의 노래 - 김훈을 생각하다  (14) 2008.06.21
[서평]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6) 2008.05.29
[서평] Getting Things Done  (16) 2008.04.05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