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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에 해당되는 글 2건
2009. 1. 18. 03:54
#1.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변화의 속도를 이야기한다. 분야별 변화속도가 다를 때 생기는 충돌을 이야기하며 각 분야별로 변화의 속도를 매겼다. 미국을 기준으로 하고, '부'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는 가정을 잊지 않는다면 곰곰히 생각해볼만한 주제다.

100마일 - 가장 빨리 움직이는 비즈니스 세계가 100마일로 기준이다.
90마일 - 그 다음으로 바짝 붙어 움직이는 것은 의외로 시민단체이다. 시민단체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진다.
60마일 - 약간 거리를 띄고 가족이 있다. 동성결혼, 노년결혼등 가족의 형태는 한세대 전과 확연히 다르다.
30마일 - 비즈니스 세계에 비해 노동조합은 천천히 움직인다. 조합원의 비율에 따라 영향력도 줄어든다.
25마일 - 정부 관료조직과 규제 기관들은 코끼리처럼 버티고 자리를 지킨다. 복지부동이다.
10마일 - 학교. 움직이지 않는 학교를 현상 유지하기 위해 해마다 4000억원이 투입된다.
5마일 - 국제적 조직들은 더 느리다. UN을 비롯 반세기가 넘은 조직들이 변화없이 운영된다.
3마일 - 미국 정치 시스템은 30년대 대공황 시절 변화가 있은 후 변화없이 계속 유지되었다.
1마일 - 남이야 움직이든 제자리를 단단히 지키는 것은 바로 법이다. 예를 들어 은행법은 60년이 되었다.

#2.

이 글을 읽으며 한국 사회를 생각했다. 겉에서 본 한국은 어떨까? 미국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50마일의 정부 - 한국 정부는 빨리 움직인다. 갈수록 더 빨라지는듯 하다. 문제는 기어가 전진이 아니라 후진에 놓여져있다는 거다. 미네르바 체포 같은 기본원칙에 대한 건 말할 가치조차 없고, 최소한 국민이 '살려 달라' 외쳐대던 경제라도 잘 했으면 하는데 그것조차 답이 안보인다. 50조를 투입해서 한다는 녹색뉴딜은 결국 '시멘트'다. 기껏 한다는게 '땅파자는 거냐'라는 비판이 싫었는지 얼마전에는 '그린IT'에 5400억을 쓴다고 한다. 첨단을 이야기하며 IT를 들먹이는게 일단 15년은 늦은건데, 안을 들여다 보니 더 가관이다. 신기술 개발 없이 남의 기술 가져다가 가공좀 하고, 오래된 장비 바꾸어 전기값이나 절약해보자는 거다. (장비 교체시 연줄맺기 성공한 납품업체가 가져가는 눈먼 돈이 절약되는 전기값의 백배는 될거다.) 어찌 발상이 이렇게 유치할까? 미국이 에너지에 의지해 경제를 살리려고 할 것이라는 예측은 이전부터 있었고, 예상대로 오바마는 에너지에 투자하고 있다. 그게 답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따라하는 것도 제대로 못한다. 진중권의 말처럼 군복이 녹색이라고 군대가 환경단체가 되는게 아니다.

속도 층적 불가의 대중 - 이전 글에 "최근 한국대선은 윤리나 사회정의가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대중적 합의"라는 표현을 썼다. 이명박이 악이고 상대방은 선이라서가 아니다. 윤리나 정의가 쟁점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 대중은 한나라당에도 힘을 실어줬다. 희안한 것은 부유계층의 사람들이 명박을 지지한 것이야 이해가 가지만, 상대적 박탈은 더 커질 사람들조차 명박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명박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거라고 정말 믿는 것 같았다. '대중은 지혜로운가?'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최소한 한국 대중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광우병 같은, 중요하지만 전략적으로 모든 걸 다 걸 문제는 아니라 생각되는, 문제에 있는 힘 다 빼고 결국 '문화제'로 끝내버리는 모습에 실망감은 더 켜졌다. 사람들은 스스로 진보한다 생각하는데 겉에서 보기에는 '글쎄올시다'이다.

절대값 30마일의 개신교 - 경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개신교는 30마일 정도로 빨리 달리고 있다. 어쩌면 더 빠를 수도 있다. 최신 마케팅 기법을 첨단의 엔테테인먼트에 섞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부에 대한 집착과 날로 고도화되는 경영기법은 왠만한 회사 못지 않다. 사람들에게 성공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면에서 사회에 대한 공헌도도 높다. 하지만 종교라는 면,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라는 빛과 소금의 사명에서 보면 개신교도 후진이다. 한국 개신교는 조엘 오스틴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3.

명박이 48.7%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을 때 솔직히 나는 한국사회에 환멸을 느꼈다. 먹고살기 힘들고 세상 모든 것이 경제논리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국민이 요청한 지상과제인 '경제'마저도 해결못하는 그를 아직도 지지하는 대중을 보면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인터넷을 보면야 명박이 아직도 대통령인게 신기하지만, 그가 아직도 수구리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도데체 아직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4.

인터넷 이야기가 나온 김에 블로그스피어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도 블로거지만 내가 보기에 블로그스피어는 '시속 200마일의 빠른 속도를 내지만 사회적 영향력은 전혀 없는 집단'이다. 사회에 미치는 파장도 적거니와 목소리도 제각각이다. 각자 200마일로 달려대지만, 혹은 그렇다고 착각은 하지만, 총합으로 보면 한쪽 귀퉁이에서 꼬물대는 것뿐이다. 사회적 영향력면에서는 미안하지만 정지다. (개인의 영역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자신을 투사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키보드 워리어는 '키보드' 워리어일 뿐이다. 블로그를 통한 의견개진이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인식이 부족한 과다한 의미부여는 곤란하다는 거다.

#5.

세상은 변한다. 하지만 변한다고 꼭 성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008. 1. 9. 13:43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스터 브룩스. 이 영화는 케빈 코스트너와 데미 무어. 전성기에서 꽤 벗어나 있지만, 아직도 관객 동원력을 어느 정도 갖춘 두 배우를 내세운 2007년 여름을 겨냥한 블록버스터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살인중독자인 '브룩스', 그를 잡기 위해 애를 조금 쓰는 '트레이시'. 브룩스의 살인장면을 목격하고 살인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스미스', 그리고 '마샬'이라 불리우는 브룩스의 다른 인격, 그렇게 네 사람이 영화를 이끌고 있다.

'이중인격'은 오래전부터 창작의 중요한 소재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고전이고, 이외에도 수많은 이중인격자가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미스터 브룩스는 이중인격자를 다룬 영화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난 느낌은 참 불편했다.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권선징악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밑에는 영화에 반영되는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이 깔려있다.

*** 이 밑으로 영화에 대한 자세한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지만, 나중에 볼 의향이 있는 분이라면 영화를 보고 다시 오시기를 권합니다 ^^;;

영화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올해의 인물로 뽑힌 사업가 브룩스에게 몇년간 억누르고 있었던 살인충동(마샬로 형상화되는)이 찾아온다. 그 욕구를 억누르지 못한 브룩스는 한 커플을 찾아가 그들을 살해한다. 이를 수사하기위해 형사 트레이시가 투입되고, 그녀의 탐문수사 대상의 하나가 스미스다. 스미스는 커플의 정사를 훔쳐보다 브룩스를 목격하였지만, 이를 신고하지 않고 오히려 브룩스의 살인에 자신을 동참시켜주길 요구한다. 한편 브룩스는 자신의 딸이 학교에서 친구를 살인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살인중독이 딸에게 넘어간 것이다. 브룩스는 딸의 학교에 찾아가 다른 사람을 살인함으로 딸에 대한 경찰의 의심을 돌려버린다. 브룩스는 스미스와 함께 살인의 대상을 찾다가, 트레이시를 성가시게 하는 전남편과 그와 바람난 여자 변호사를 선택하고 살해한다. 그 살인을 끝으로 스미스 손에 생을 마감하겠다고 하던 브룩스는 오히려 스미스를 죽여 묻어버림으로 살인의 혐의를 스미스에게 씌우고 자신은 안전하게 숨어버린다.

1. 범'죄'가 아니라 중독?

절대적인 가치를 배제하고 모든 것을 개인적인 선호로 돌리는 것이 현대 사회의 흐름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을 올리려고 한다.) 그래서인가? 영화속 브룩스의 연쇄살인은 악이 아닌 것 같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중독, 혹은 아직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나쁜 취미의 하나라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를 위해 영화 속에는 많은 장치들이 등장한다.

> 브룩스 자신도 괴로워 한다?
영화 초반에 브룩스는 마샬에게 살인을 하지 않겠다고 저항한다. 하지만 곧 유혹에 넘어간다. 딸이 살인욕구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 한다. 그리고 딸을 위해 살인을 한다. 스미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결국 스미스에게 자신의 죄를 뒤집어 씌운다. 딸에게 죽임을 당하는 꿈을 보여주면서 브룩스의 고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그가 괴로워 하니 이해해 달라는 것인가?

> 살인을 하는 것은 마샬의 유혹 때문이지 브룩스의 잘못은 아니다?
살인을 하도록 유혹하는 마샬은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으로 등장을 한다. 브룩스는 마샬의 유혹에 넘어가는 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마샬이 문제지 브룩스는 책임이 없다. 브룩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좋아서 스미스를 죽인게 아냐. 다만 내가 중독되었기 때문이야."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이런 항변을 할 때가 있다. "너희 같이 편하게 사는 놈들이 내 괴로운 상황을 알기나 해?" 동정은 할 수 있다. 어떤 경우 이해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죽일만 하니까 죽인 거라니까?
살해된 인물중에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인 자들은 다 조금씩 문제가 있다. 거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트레이시의 남편은 그 재산을 뜯어내기 위해 정부인 변호사와 같이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한다. 스미스는 범죄를 목격하고도 신고하지 않고 살인에 동참한다. 브룩스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트레이시에 의해 죽임당한 두명은 탈옥 후에 트레이시를 위협하던 존재다. 처음에 브룩스에게 죽은 커플도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창문을 열어놓고 그 짓을 한 괘씸죄(?)가 있다.

이렇듯 살해당한 자들의 흠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심정적인 동의를 요구한다. 브룩스가 완전한 악인은 아니다. 죽일만한 놈들이니 죽은 거다. 정말 그런가? 그들은 그렇다 치고, 그외의 사람들은 어떤가? 딸에게 살해당한 친구. 덩달아 죽임을 당한 딸 학교의 또 다른 피해자. 그리고 브룩스에 의해 죽어갔던 수많은 사람들.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그들 모두 죽음을 당할 정도로 문제가 있던 사람들인가? 영화는 그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같은 영화 코드는 다른 곳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한니발'에서 자신의 뇌를 먹게 되는 수사관 크렌들러를 예로 들어보자. 그도 참 얄미운 모습으로 나오긴 한다. 그에 비하면 여자를 해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손목을 자르는 한니발이 멋있어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누가 더 악인인가?

> 형사나 범인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브룩스의 대척점에 있어야할 트레이시는 전형적인 형사가 아니다. 트레이시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재산과 미모까지 갖춘 트레이시가 형사 생활을 계속하는 이유가 뭘까? 책임감?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소망? 아니다. 그저 자신이 원해서다. 자신이 잡고 싶은 사람을 잡고 싶은 욕구. 트레이시와 마지막 통화를 나누며 브룩스는 서로 동질감을 느낀다. 형사나 살인범이나 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영화는 은연중 이야기를 한다.

> 그래도 브룩스는 최소한 기도라도 하잖아. 그러니 이해해줘라?
영화 중에 브룩스는 기도를 한다. "하나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옵소서. 바꿀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키는 용기를,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궁금하다. 만약 바꿀 수 없는 것이 살인중독이라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영화는 이야기하는 걸까?

2. 영화는 그냥 영화로 봐야하는 것인가?

영화는 단순히 영화로서 끝이 아니라 사회를 반영한다. 권선징악의 평면적 구도가 아니면 문제작이라 불리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이다. 선이 승리하지 않는 영화는 널려 있다. 그 변화가 세상의 흐름을 대변하는듯 해서 영화를 보며 불편했다.

현실 속에서 선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두가 그건 알고 있다. 그래도 전에는 선이 승리하는 세상을 희망했던 것 같다. 이전 세대의 창작물을 보면 그렇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선이 항상 승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필요하고 또한 중요하다. 현실인식이 없이는 더 좋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거기서 더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선과 악의 경계가 없다 말하고 있다. 개인의 선택이 옳고 그름의 자리를 대신하고 들어섰다.

세상 어디든 그렇게 변하고 있다. 최근의 대선은 어떤가? 나는 최근의 한국대선은 윤리나 사회정의가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대중적 합의라고 해석한다. 정동영이나 신당이 정의라서가 아니다. 이명박이 악이기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 해석이나, 이후 벌어질 일들은 차치하고라도, 윤리나 청렴이 선택의 기준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개인적 평안이 사회정의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정직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돈없어 치료를 못받는 사회가 되더라도 나와 내 가족 잘먹고 잘 사는게 최고다. 내 자식 특목고 보내서, 좋은 대학 보낼 수 있으면 까짓 부정 좀 저지르고, 거짓말 좀 한게 뭐가 문제냐.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나는 놈 있나.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달라지니, 죄의식이니 양심이니 하는 말도 별볼일 없어진다. 돈 많이 못버는 억울함은 있어도, 세금 떼어먹는 것에 대한 가책은 없다. 초등생 친딸을 성폭행하더라도 들키지만 않는다면 그게 본인한테는 '선'인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누가 미스터 브룩스를 악이라 말할 수 있을까? 브룩스의 아내는 마치 지금의 세상을 보는 것 같다. 브룩스는 성공한 사업가다. 엄청나게 좋은 집에서 산다. 딸을 위해 멀리 날아가 살인까지 할 정도로 딸을 끔찍하게 사랑한다. 자신의 범죄를 완전히 감출 정도로 머리도 좋다. 그거면 다 된거다. 편안한 침대에서 따뜻하게 잘 수만 있으면 밤중에 몰래 나가 무슨 짓을 하고 오든 나는 계속 잠만 잘거다. (실제로 그녀는 밤중에 몰래 들어오는 남편에게 한번도 어디 갔다 왔는지 물어보질 않는다.) 완전한 불감증이다.

미스터 브룩스를 그냥 영화로 볼 수 없었던 것은 그 속의 세상이나 현실이나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친 비약인가? 영화야 그 속성상 몇배로 증폭하긴 했으나, 가는 방향은 별반 다르지 않다. 나에게는 세상이나 영화나 모두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이냐? 세상에 옳고 그름은 없는 거다. 내 한몸 등따시고 배부르면 그게 옳은 거고 그게 정의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없는 그곳으로 부지런히 달려가는 세상이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 같아 나는 이 영화가 참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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