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564)
책 그리고 글 (87)
미래 빚어가기 (79)
시간/행동 관리 (44)
조직을 말한다 (16)
마케팅 노트 (14)
짧은 생각들 (33)
사랑을 말한다 (27)
세상/사람 바라보기 (40)
그밖에... (83)
일기 혹은 독백 (85)
신앙 이야기 (24)
음악 이야기 (19)
법과 특허 이야기 (13)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은혜'에 해당되는 글 3건
2014. 8. 31. 13:22

페이스북에서 진행되는 감사 릴레이를 받아 적은 글입니다.


=========


세상이 참 말이 아닙니다. 300명 넘게 죽임을 당했지만 이유도 정확히 모릅니다. 이유 좀 알자는 애원이 빨갱이짓으로 몰립니다. 시리아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사냥을 당하고, 팔레스타인의 많은 이들이 폭격에 목숨 아니면 삶의 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진행되는 감사릴레이에 불편해하는 시선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아직도 몸부림치는 유가족들이 있는데 좋은 가족 주셔서 감사하다는 고백이 자랑처럼 보이지 않겠느냐, 이유야 어떻든 덕이 되지 않는다라는. 일정 부분 동의가 됩니다. 


그럼에도 감사는 크리스찬의 정체성입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는 감사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범사란 모든 일을 말합니다. 선택 사항이 아니지요.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이라 했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살다 보면 즐거운 일도 있고, 화나는 일도 있습니다. 전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습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더 없으니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라는 말을 들었던 순간이 기억 납니다. 그때 제가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고생만 하시다 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감사는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는 없다 생각합니다.


한글 번역에선 명확하지 않지만, 영어는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로 번역합니다. Give thanks to all circumstances가 아니구요. 모든 일이 감사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 마음이 뻐근한 기억이 있고 가슴에 돌을 얹어놓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일들에 대해 저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더 큰 가치와 목적을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을 통하여 저를 성장하게 하는, 예수님을 조금 더 닮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 아픈 일, 힘든 일 생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고난을 거치게 하시고, 그 과정 속에 우리를 성장시키신다는 겁니다. 은혜지요. 그래서 저는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감사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제목들을 적어봅니다. 


첫째, 한국은 제가 태어나고 애정하는 곳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회가 발전해야하는데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고 있어 마음이 아픕니다. 도데체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 좋은 세상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음이 감사합니다.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저와 제 가족만 챙기며 살수 있지만, 아파하는 이들과 같이 아파하는 애통함을 가짐이 감사합니다. 단식으로 유가족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건강도 감사합니다. 


둘째, 돈과 거리를 두며 살았습니다. 가난한 시절을 거쳤고, 직장생활을 한 이후로도 넉넉하게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뭐 잘못한 건 없습니다. 다만 남들에게 생기지 않는 일로 손해를 보고, 남들에게 생기는 이득은 피해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이 탓하지 않고, 제 책임이라 생각하고 더 열심히 살려는 마음 주심에 감사합니다. 주기적인 어려움 속에 교만하지 않게 된 것도 감사하고, 가난을 겪었기에 가난을 이해할 수 있음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넉넉하지 않아도 다른 이를 돕고 섬기는 마음을 가진 아내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라면 제 코가 석자라 주위 사람을 몰라라 했을텐데 아내 덕분에 다른 이를 섬기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셋째, 여러 불의한 목회자를 거쳤음에도 교회 떠나지 않은 건 기적입니다. 바람 핀 목사, 교회돈 횡령한 목사 등 여럿 거쳤습니다. 개신교인이라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한국 교회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붙잡아 신앙 지키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썩어가는 개신교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교회를 맘에 품고 기도하게 하심이 감사합니다. 고비마다 좋은 스승을 만나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감사 릴레이를 전해준 이 은상 목사님 감사합니다. 원래 3일 계속 하는게 규칙이라 하네요. 그런데 오늘 적은 것에서 교만한 저의 모습을 봅니다. 상황에 따르지 않고 진리를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하지만, 그래도 나는 훌륭해 하는 건 교만입니다. 내일도 그런 모습이 보이면 감사 제목은 혼자만 보고 나누지는 않겠습니다. 

'신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성애, 차별, 역차별  (3) 2014.10.14
[간단평]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  (0) 2014.09.24
청년에게 권하는 5권의 신앙서적  (3) 2014.08.21
하나님의 뜻  (1) 2014.06.13
정답?  (0) 2014.03.27


2013. 8. 6. 05:13

7월 27일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

=========================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단체가 동성애 금지법을 발의한다는 기사를 봤다.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두가지다. "너나 잘 하세요"와 "쓸데 없는 짓 하고 있다"이다. 

여기까지 보면 대부분 내가 동성애를 찬성한다 짐작할 것 같아, 동성애를 '죄'라고 믿는다는 것을 미리 밝히고 시작하련다.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 말하는 부분은 사실 많지 않다. 열군데 미만으로 알고 있다.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 말하지는 않는다고 해석하는 성경학자들은 각 구절별로 적절한 설명을 붙여놓았다. 예를 들어 소돔의 죄는 동성애보다는 사회적 불의다라는가, 남색하는 자는 남자를 대상으로 매춘하는 행위를 말한다라는 식이다. 더불어 성경은 신앙에 대한 당시의 해석이기 때문에 모든 구절은 지금의 시각으로 재조명되어야한다는 걸 강조한다. 

하지만 성경이 만들어지는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고 믿는 나로서는 그 해석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성경은 전체로 하나의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 편지나 수필의 모음집이 아니라는 거다. 그렇기에 각 구절별로 다른 해석은 가능할지 몰라도 성경 전체적으로 보아 하나님이 동성애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 다른 해석은 없다고 믿는다. 그건 내 신앙이며 지식인 코스프레를 위해 의견을 바꿀 의향은 없다. 

(글의 주제는 다음 이야기이지만, 동성애에 관한 해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기꺼이 답하겠다.)

그런 내가 봐도, 동성애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태도는 한마디로 너무 치사하다. 레위기는 동성애를 가증한 일의 하나로 말한다. 그외에 우상숭배, 간음, 혹은 수간도 가증한 일에 들어간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는 것도 가증한 일이라 말한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동성애만 가지고 이 난리인가? 그건 동성애자가 사회적 소수이기 때문이다. 만만하기 때문이다. 

간음은 어떤가? 강남에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간음에 대한 설교를 안한다고 한다. 부부 같아 보이지만 부부가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다는 거다. 다수의 목사들이 간음을 하고 그걸 서로 알면서도 쉬쉬하는 집단에서 어떻게 간음이 죄라고 세상에 외칠 수 있겠나. 그런데 동성애는 눈에 띈다. 적어도 여기에는 자신있다 생각하는 거다. 하나님이 가증한 일이라 칭한 것을 수없이 범하면서도 자신은 돌아볼 생각 없이 소수자에 대한 혐오에 편승해온 거다. 

만약 내 친구가 부인 이외의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진다면 말하겠다. 간음은 죄라고. 거짓말을 한다면 말하겠다. 그건 나쁜 거라고. 이와 동일하게 동성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겠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혐오할 생각은 없다. 다 부족한 인간이니까. 내가 떳떳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요즘 교과서가 동성애를 옹호한다고 비판하는 만화를 찾아봤다. 거기서 나는 혐오이외의 다른 감정을 볼 수 없었다. 그게 지금 한국 기독교가 하는 거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 

나는 동성애를 차별하는 어떤 행위에도 반대한다. 사회적 시스템이란 그런 거다. 차별 금지법이니 동성애 결혼에 대한 허용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차별받지 않게 하겠다는 거다. 세상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만드는 것은 교회의 역할이다. 그걸 제대로 해햐한다. 그런데 차별함으로 그 일을 이룰 수는 없다. 

더불어 한국 교회는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혐오할 자격도 없다. 최소한의 자정능력이라도 갖추고 세상에 외쳤으면 좋겠다. 제발 너님들이나 잘 하시길.

'신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답?  (0) 2014.03.27
2013년을 돌아보며  (2) 2014.01.15
오퍼 레터 받은 날의 고백  (6) 2013.08.06
Troubled Situation: Second Thought (a.k.a. Christian Version)  (0) 2012.03.10
오늘의 큐티 - 2011년 9월 20일  (2) 2011.09.20


2008. 7. 16. 07:44
#1.

고든 맥도날드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은 내게 삶에 대한 진지함을 가르쳐 주었다. 회사일로 미국으로 옮길 때 처음 택한 집이 그가 담임하던 그레이스 채플과 20분 거리였다. 부족한 영어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 참석하기로 한 것은 내겐 당연한 것이였다.

당시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클린턴이 곤경에 처해있었다. 어느 주일날. 설교를 일찌감치 끝낸 맥도날드는 교인들 앞에서 준비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클린턴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힘들어하며, 평소에 친분이 있던 맥도날드에게 카운셀링을 부탁했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영적으로 회복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맥도날드는 이를 위해 일주일에 한번씩 클린턴을 방문해서 도와주고자했고, 모든 비용은 자신이 낼 터이니, 일주일에 하루 그 일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도록 교인들이 허락해달라 부탁하는 것이였다.

#2.

1987년 그레이스 채플을 담임하며, 기독학생회(IVF) 총재를 하고 있던 (소위 잘나가던) 고든 맥도날드는 간음의 죄를 범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빌 하이벨스, 찰스 스윈돌등 고든을 아끼던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그와 그의 가족을 도왔다. 1년의 기간이 지난후 그의 회복을 확인한 동료들은 회복식을 베풀어 주었다. 죄의 자백에서 회개, 그리고 회복까지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레이스 채플 교인들은 고든을 찾아가 그를 다시 교회로 불러 들였다.

#3.

고든이 클린턴을 돕겠다고 이해를 구하던 그날, 나는 그의 간음사건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예배당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칩거중에 있던 고든을 찾아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라 용기를 주던 당사자가 그 자리에 앉아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한번 겪었던 죄로 인해 힘들어 하는 클린턴을 돕겠다는 고든. 목회자에게 휴일로 주어지는 하루를 클린턴을 위해 쓰겠다며 양해를 구하는 고든에게 교인들은 기립박수로 지지를 보냈다.

아쉽게도 그가 돕고자 했던 클린턴은 완전히 죄에서 돌아선 것 같지는 않다. 요즘도 스캔들을 벌이는 것을 보면. 하지만 고든 스스로는 아름다운 회복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창 나이에 은퇴를 했다. 그리고 뉴햄프셔의 한적한 농원을 사들여 가족과 지내며 책도 쓰고, 기독교 잡지사에서 일하며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4.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였다. 예수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좇아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그였다. 하지만 예수가 잡혀가던 날 베드로는 세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다. 마지막으로 (저주하며) 부인했을 때 베드로는 뜰안에서 심문을 받다가 고개를 돌린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와 후회의 눈물을 흘리던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모든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예수가 부활 이후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베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번을 걸친 만남에도 베드로는 침묵했다. 베드로의 부인은 비밀이 아니였던 것 같다. 다른 이들도 베드로의 부인을 알았다. 그건 베드로에겐 정치적 죽음이였다. 희망이 없어진 베드로는 다시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그 베드로에게 예수는 다시 다가갔다. 처음 베드로가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던 그때처럼, 고기도 못잡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베드로에게 예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게했다. 예수임을 깨닫고 뭍으로 나온 베드로를 예수는 떡과 생선을 구워 맞이했다.

배신한 제자를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한 예수 옆에 앉은 베드로. 아무 말 없이 어색하게 먹기만 하는 그 마음. 아마 목이 매여 몇번이나 물을 들이켰을지도 모른다. 침묵을 깨고 예수가 묻는다. 세번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번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자신을 배반한 수제자가 회복될 수 있도록 예수가 손을 붙잡아 주었다.

#5.

'회복'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나는 두사람이 생각이 난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질 인생의 나락에 처했었던 두 사람. 그 사람을 살린 것은 바로 '은혜'다.

죄를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마음. 그리고 그 절망하는 마음을 붇잡아 회복시켜주는 은혜. 그것이 바로 기독교다. 회개와 은혜가 없다면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없으니 은혜를 보기도 힘든듯 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혹은 혀에 발린 사과만으로 넘어가려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리고는 은혜로 용서받았다고 한다. 완전 싸구려 은혜 아닌가.

기독교는 회복을 줄 수 있는 종교다. 은혜가 있는 곳이다. 더 많은 이들이 그 은혜를 맛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한다.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