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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5. 21. 00:52
중학교를 멀리 다녔던 적이 있다. 집은 건대옆의 자양동이면서 망우동에 있는 중화중학교를 다녔다. 버스를 타면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82년이었을거다. 어느날 학교를 마친 후, 나는 그 길을 걷기로 했다. 오래된 일이라 왜 그랬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버스비가 없어서였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정말 가난했던 시절이라 그랬을 법 하기도 하다. 아침 저녁으로 버스를 타고 지나던 길이라 친숙했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목을 죄던 호크를 느슨하게 하고 그 길을 걸었다. 네시간 조금 안되게 걸렸다.

요즘과 달리 그때는 작은 가게들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자주 발걸음을 멈추고, 버스 창으로 보며 한번 들르고 싶었던 가게들을 구경했다. 문방구 창에 진열되어 있는 플라모델을 보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시계도 구경하고, 레코드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만져보고. 인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구간도 있었다. 사람 다닐 길을 점거한 물건들 때문에 차길을 훔치듯 이용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 옆으로 휙휙 지나가던 차들. 우리 애가 그런다면 기겁을 해서 손을 잡아채겠지만, 돌아보니 그 모습마저 정겹다.

세시간쯤 되니 힘이 부친다. 그때쯤 어린이 대공원 후문이었다. 지금은 입장이 무료이지만 당시에는 유료였다. 아마 입장권 살 돈이 있었다면 그날의 걷기는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대공원을 삥 돌아 건대로 들어섰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호수(일감호였나?) 주위를 느릿 느릿 걷다보니 어느덧 그림자가 길어졌다. 건대 후문을 나서변 바로 집이었다.

전화가 많지 않았던 때다. 연락도 없이 평소보다 몇시간 늦게 도착한 아들 탓에 어머니의 속은 바짝 타 있었다. 때리시지는 않았지만 잔소리깨나 들었었다.

이년전인가? 같은 길을 걸었다. 일요일 오후였다. 시간상 전구간을 걷지는 않았지만, 학교에서 출발해서 한시간 정도 같은 길을 따라갔다. 사진을 즐기던 때라 뷰파인더에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런데, 길은 그대로지만, 모습은 느낌은 달라졌다. 아직도 자잔한 가게들은 남아 있지만 기억에 있는 수선스러움은 없다. 많이 깔끔해졌다고 할까?

세월이 지났으니 그 길도 달라진게 당연하다. 나도 달라졌으니까. 하지만, 82년의 어느날 오랜 시간 걸으면서 떠올렸던 생각들은 지금도 내 몸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나를 키우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에 봤던 모습이 아니라고, 그때의 그 느낌이 생기지 않는다고 서운해할 이유는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바빠서일게다. 어떤 이유든 속도를 늦출 수 있는 핑계가 있다면 그대로 고맙다. 빠르게 움직이던 움직임을 멈추고, 느리게 돌리면 평소에 보지 못하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즐거움은 남다르다. 속도를 늦추어야만 볼 수 있는 것들.

생각해보니 사진을 소홀히 하던 때부터 걷기를 멈추었다. 점심 시간 틈을 내어 사진기 하나 들고 하던 공원묘지 산책도 요즘은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이렇게 분주한가. 오늘 날씨가 예술이다. 햇살은 따듯하지만, 땀 흘릴 정도는 아니다. 오후에는 오랜만에 사진기를 들고 나서봐야겠다. 오늘은 좀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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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Inuit님의 이벤트 '걷고 또 걷기'를 위해 쓰려고 했던 글입니다. 게으름에 분주함에 그만 납기를 놓쳤네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