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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해당되는 글 2건
2011. 9. 20. 15:04
고난주간에 보여준 예수님의 행동은 죽기를 작정한 자의 모습이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섰다. 무슨 이유든 예수님의 생명을 지키고자 애를 쓴 빌라도의 노력에 예수님은 전혀 호응을 안한다. 이미 자신이 십자가에 달릴 것을 알기에 그 섭리를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친다.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 빌라도의 요구는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선택의 기회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지막 순간에 죄에서 돌이킬 수 있었다. 그들은 바라바를 선택할 수 있었다. 예수의 죄없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중 한명은 자신을 부인하고 한명은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 이야기했다. 베드로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유다는 이미 제사장들에게 예수의 위치를 알려주기로 내통한 상태다. 예수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때 유다는 돌이킬 수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그는 건너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가 마지막 순간에 돌이켰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예비하신 섭리는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이루셨겠지.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고 유다는 그 역사에 악역으로 참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악한 역으로 참가할지 선한 역으로 참가할 지의 선택을 개인의 몫이다.

모두에게 마지막 기회는 주어진다. 죄를 짓기까지 여섯단계가 있다고 한다. 마지막 여섯번째를 거치기 전에 돌이킨다면 죄가 되지 않는다. 잘못이라 느낄 때 돌이키면 된다. 그렇기에 잘못을 느끼는 분별력과 늦기전에 돌이킬 수 있는 용기를 간직하게 해달라 항상 기도해야 한다.

또 하나 생각할 인물은 바라바다. 바라바는 강도라고도 하고 혁명가라고도 한다. 어느쪽이든 분명한 건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그를 (물리적으로) 대신해 예수가 대신 죽임을 당했다. 어렸을 때 봤던 안소니 퀸의 바라바 영화가 기억난다. 죽게 될 상황을 여러번 거치면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자신을 대신해 죽은 예수라는 것을 결국 인정하게 되고 미워하던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맞게 된다.  

바라바는 예수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되는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우리를 대신해 죽은 것은 자그만치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의 목숨값은 엄청 비싼 것이다. 소중하고 고귀한 삶을 살아가야할 이유가 거기서 나온다. 사는게 힘들다고, 혹은 사는게 너무 비참하다고 포기하면 안되는 거다. 왜냐면 그 생명 하나 하나를 위해 엄청나게 큰 값을 하나님이 이미 치루었기 때문이다. 





2008. 7. 16. 07:44
#1.

고든 맥도날드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은 내게 삶에 대한 진지함을 가르쳐 주었다. 회사일로 미국으로 옮길 때 처음 택한 집이 그가 담임하던 그레이스 채플과 20분 거리였다. 부족한 영어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 참석하기로 한 것은 내겐 당연한 것이였다.

당시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클린턴이 곤경에 처해있었다. 어느 주일날. 설교를 일찌감치 끝낸 맥도날드는 교인들 앞에서 준비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클린턴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힘들어하며, 평소에 친분이 있던 맥도날드에게 카운셀링을 부탁했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영적으로 회복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맥도날드는 이를 위해 일주일에 한번씩 클린턴을 방문해서 도와주고자했고, 모든 비용은 자신이 낼 터이니, 일주일에 하루 그 일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도록 교인들이 허락해달라 부탁하는 것이였다.

#2.

1987년 그레이스 채플을 담임하며, 기독학생회(IVF) 총재를 하고 있던 (소위 잘나가던) 고든 맥도날드는 간음의 죄를 범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빌 하이벨스, 찰스 스윈돌등 고든을 아끼던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그와 그의 가족을 도왔다. 1년의 기간이 지난후 그의 회복을 확인한 동료들은 회복식을 베풀어 주었다. 죄의 자백에서 회개, 그리고 회복까지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레이스 채플 교인들은 고든을 찾아가 그를 다시 교회로 불러 들였다.

#3.

고든이 클린턴을 돕겠다고 이해를 구하던 그날, 나는 그의 간음사건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예배당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칩거중에 있던 고든을 찾아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라 용기를 주던 당사자가 그 자리에 앉아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한번 겪었던 죄로 인해 힘들어 하는 클린턴을 돕겠다는 고든. 목회자에게 휴일로 주어지는 하루를 클린턴을 위해 쓰겠다며 양해를 구하는 고든에게 교인들은 기립박수로 지지를 보냈다.

아쉽게도 그가 돕고자 했던 클린턴은 완전히 죄에서 돌아선 것 같지는 않다. 요즘도 스캔들을 벌이는 것을 보면. 하지만 고든 스스로는 아름다운 회복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창 나이에 은퇴를 했다. 그리고 뉴햄프셔의 한적한 농원을 사들여 가족과 지내며 책도 쓰고, 기독교 잡지사에서 일하며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4.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였다. 예수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좇아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그였다. 하지만 예수가 잡혀가던 날 베드로는 세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다. 마지막으로 (저주하며) 부인했을 때 베드로는 뜰안에서 심문을 받다가 고개를 돌린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와 후회의 눈물을 흘리던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모든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예수가 부활 이후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베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번을 걸친 만남에도 베드로는 침묵했다. 베드로의 부인은 비밀이 아니였던 것 같다. 다른 이들도 베드로의 부인을 알았다. 그건 베드로에겐 정치적 죽음이였다. 희망이 없어진 베드로는 다시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그 베드로에게 예수는 다시 다가갔다. 처음 베드로가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던 그때처럼, 고기도 못잡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베드로에게 예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게했다. 예수임을 깨닫고 뭍으로 나온 베드로를 예수는 떡과 생선을 구워 맞이했다.

배신한 제자를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한 예수 옆에 앉은 베드로. 아무 말 없이 어색하게 먹기만 하는 그 마음. 아마 목이 매여 몇번이나 물을 들이켰을지도 모른다. 침묵을 깨고 예수가 묻는다. 세번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번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자신을 배반한 수제자가 회복될 수 있도록 예수가 손을 붙잡아 주었다.

#5.

'회복'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나는 두사람이 생각이 난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질 인생의 나락에 처했었던 두 사람. 그 사람을 살린 것은 바로 '은혜'다.

죄를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마음. 그리고 그 절망하는 마음을 붇잡아 회복시켜주는 은혜. 그것이 바로 기독교다. 회개와 은혜가 없다면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없으니 은혜를 보기도 힘든듯 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혹은 혀에 발린 사과만으로 넘어가려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리고는 은혜로 용서받았다고 한다. 완전 싸구려 은혜 아닌가.

기독교는 회복을 줄 수 있는 종교다. 은혜가 있는 곳이다. 더 많은 이들이 그 은혜를 맛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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