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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해당되는 글 20건
2009. 6. 30. 15:00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8점
옥성호 지음/부흥과개혁사

한국 기독교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크나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는 '대교회 지향주의'다. 교인수가 힘이 되고 예배당의 크기가 능력을 뜻하는 한국의 기독교가 부패하는 것은 어찌보면 '순리'이다. 그렇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가 자본주의 발전에 공헌했다고 한다. 이제 자본의 논리가 기독교를 썩게 하고 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통해 '진리에 대한 자존심'을 버리고 세상 학문에 의존하는 기독교를 비판한 저자는 이번에는 마케팅에 대해 이야기한다. 교회가 마케팅의 원리에 의존하는 이유는 결국 한가지다. 더 많은 사람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교회는 구매자(교인)의 욕구를 잘 파악해야한다. 그리고 복음을 구매 욕구에 맞추어 적절히 상품화해야한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약점은 감추고 강점은 부각해야한다. 남는 것은 현대인의 구미에 잘 맞는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메시지 뿐이다. 이것이 마케팅 교회의 모습이다.

MBA를 취득하고 세일즈와 마케팅 부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저자는 마케팅의 정의로 책을 시작한다.  이어서 현대사회의 두가지 특징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에 '옳은 것'이 아닌 '원하는 것'을 하라 (포스트모더니즘)"와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무엇이든 하라 (프래그머티즘)"이 교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런 시대적 배경하에 부흥을 절대시하는 주장과 종교 다원주의가 교회안에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이야기한다.

교회가 사람 모으는 것을 우선시할 때 복음은 상품화된다. 저자는 현대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고 많은 교회의 벤치마킹이 되는 두 교회에서 그 모습을 찾는다. 교회를 찾는 이와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윌로우 크릭,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채우려는 새들백 모두 복음이 변질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숫자가 우상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따라 오는 교회간의 경쟁과 교회 성장을 위한 컨설팅을 비판한다. 복음을 들고 세상과 경쟁해야할 교회가 서로 경쟁하기에 바쁘게 된 것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복음의 진정한 회복을 요구한다. 마케팅 교회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거룩한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복음은 (약점은 감추고 강점만 강조함으로) 설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선포되는 것이다. 교회의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지식은 필요하나, 복음을 세상지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지식을 복음에 비추어 살펴야하는 것이다. 가감되지 않은 '거친 십자가'의 복음을 그대로 전파하는 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다.

변질된 교회의 모습을 개탄하며 절대적 믿음으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옥성호 형제의 외침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몇가지 아쉬움과 우려가 있다.

첫째,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영혼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 그렇다면 전달하는 사람이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설교자가 전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듣는 이가 가져야할 자세지만, 중언부언과 우왕자왕으로 듣는 이들을 모두 졸게 만드는 설교자가 주장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절대주권에 대한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자칫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상의 노력은 모두 세상에 영합하는 행동처럼 비쳐질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하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다.

둘째, 사람을 모으려는 노력은 두가지로 구분되어질 수 있다.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어떻게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과 교회의 신도수를 늘리기위해 반짝 세일을 하는 것은 출발점이 다르다. 윌로우 크릭이나 새들백이 (저자가 말한대로) 복음을 변질할 위험은 있으나, 세상에 큰 해를 주는 것은 매출 신장을 위해 마케팅을 사용하는 (특히 한국의) 교회들이다. 이들 교회에 더 큰 비판이 가해져야하지 않을까?

C.S 루이스는 사람을 나눌 때 두가지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한가지는 원안의 사람과 원밖의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으로는 끊임없는 분열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다른 한가지는 진리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과 진리에서 멀어지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윌로우 크릭과 새들백은 진리를 향해 움직이는 교회이다. 시행착오를 범할 수는 있으나 진리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는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교회는 스스로 잘못을 고쳐나갈 것이다. 문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저버리는 목회자와 교회들이다.

셋째, '정의'와 '사랑'에 대한 강조이다. 친근한 아버지의 이미지만 강조되고 죄를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은 사라진 교회는 분명 문제이다. '거룩한 하나님'을 모르고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을 모른다면 또한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 '정의'를 강조하다 '사랑'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순수성을 지키려는 열정은 복음을 삶의 여러 부분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변질'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만들 우려가 있다. 하지만 복음은 크다. 하나의 시각으로 제한할 수는 없다. 미술에도 적용할 수 있고, 영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 결혼한 적 없는 예수님이지만 결혼하는 사람, 이혼으로 상심한 사람 모두 복음에서 자신들에 대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가감없는 복음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자칫 다른 이들에 대한 불필요한 정죄에 빠져서는 안된다. 방향성이 같다면 본질이 아닌 사소한 차이는 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에 영합하는 얄팍한 메시지에 대한 옥성호 형제의 비판은 정당하다. 복음의 능력은 숫자에 있지 않다. 예수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않았다. 옆에 두고 길러낸 제자가 고작 열두명 (가룟 유다 포함),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까지 기다린 사람이 120명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멀쩡한 부인 놔두고 정부와 함께 교회에 가서 바람피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한국 교회는 하루에도 열두번씩 스스로에게 되물어야한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과연 성경적인가?"




2009. 6. 21. 14:04
묵상하는 삶 - 8점
켄 가이어 지음/두란노

'묵상'이라는 용어를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서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묵상'은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함'이라 정의되어 있다. 비슷한 말로 '명상'이 있다. '명상'도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함'이라 정의가 되어 있으니 별 차이가 없는 듯 하다. 하지만 묵상은 명상과는 다르다. 명상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속을 비어 고요하게 만드는게 목적이라면, 묵상은 곰곰히 생각하여 뜻을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명상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라면, 묵상은 절대자를 향하는 것이다. 명상은 버리기 위함이고 묵상은 찾기 위함이다.

세상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있고, 세상 모든 일에 그분의 계획하심이 있다는 것이 믿음이다. 분주한 생활에 스쳐지나는 일상이지만, 잠깐 멈추어서서 곰곰히 생각하면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묵상이다. '묵상하는 삶'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주변에서 하시는 일에 주목하고 수용하며 반응하는 삶'이다.

켄 가이어는 나와 이웃, 모든 인간, 그리고 모든 생명이 성스러움을 담고 있기에, 그 성스러움을 놓지지 말아야함을 이야기한다. '그런 (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찾아올 때 알아볼 수 있도록, 그런 순간들을 존중할 수 있도록' 걸음을 늦추고 '내가 그런 순간들을 만지고 그런 순간들이 나를 만지게 하지 않고는 그냥 보낼 수 없기에' 반응하기로 결심하기를 권면한다. 

성경은 묵상의 대상을 씨로, 묵상하는 이를 토지로 비유한다 (마 13장). 씨는 말씀이요 지혜이다. 말씀은 성경에 담겨있고, 지혜는 '일상의 순간'속에서 우리를 부른다. 씨는 어디에나 뿌려진다. 눈을 들어, 그리고 마음을 열어 바라보면 말씀과 지혜는 널려있다. 받는 토양이 중요하다. 좋은 토양을 결정하는 것은 민감함과 겸손함이다. '위쪽 말고는 더 바라볼데가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철저히 떨어져,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구걸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그런 것이다.

민감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은 씨앗이 성령을 통하여 생명을 얻고, 사랑을 통하여 자라난다. 자기전 꼭 하나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오늘 사랑하며 살았나?'라는 질문이다.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했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오늘 사랑하며 살았나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직장 상사에게는, 동료에게는, 그리고 나에게조차 족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것으로 족하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것으로 족해야한다."

묵상하는 사람이 되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말씀을 묵상할 수 있고, 영화를 묵상할 수 있고, 사람을 묵상할 수 있고, 연극을 묵상할 수 있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순간을 묵상할 수 있는 '민감함'을 가질 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영원히 바뀔 수 있다. '묵상하는 삶의 열매는 변화된 삶이라야 한다.' 내가 아니라 그분의 리듬에 맞추어 살 때 우리 삶의 낭비는 없어지고, 진정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얻을 수 있다. 내가 변할 때 다른 이들에게 울림을 만들 수 있다. '나의 삶이 온세계가 동작을 멈추고 들을만큼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때'에 변화는 전염된다.

켄 가이어의 '묵상하는 삶'은 기독교인을 위해 쓰여진 책이다. 그럼에도 모든 이에게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이유는 우리 삶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바쁘기 때문에 듣지 못한다. '하루라는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양을 쑤셔 놓도록 삶이 압박을 가해 올 때, 우리는 활자 크기를 줄이고 문단을 합하고 공간을 없애고 여백을 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삶이 여백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깨알같은 글자라면 읽기가 힘들다. 읽다가 지치면 어쩌면 우리는 읽으려는 노력조차 깨끗이 중단하고 말지도 모른다.

잠깐 멈추어 서서 내가 들어야할 음성이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하는 삶. 그런 삶이 필요할 때다.


2009. 6. 7. 14:20
오늘은 아버지 학교가 시작하는 날입니다. 기독교 출판사인 두란노에서 시작해 한국 뿐 아니라 여러나라에서  이 학교가 열립니다. 이번에는 제가 사는 동네는 아니고, 코네티컷 주의 하트포드라는 도시입니다. 두시간 반 운전하고 다섯시간 강의및 나눔을 가지고, 또 두시간 반을 운전해 돌아옵니다. 그렇게 네번을 해야하는... 저로서는 꽤나 큰 시간을 들이는 것이지만, 첫째날을 지나고 나니 잘 시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영향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가 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아버지가 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합니다. 따로 배운 것이 없기에 어쩌다가 아버지가 되면, 은연중에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하게 되지요. 그렇기에 아버지는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역할로 다음의 네가지를 들더군요. 기독교적인 가치관에 입각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종교를 떠나 생각해 볼만하기에 강의 내용을 제 말로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 결속하기
축구팀의 감독처럼, 온가족을 하나로 묶는 그런 기능을 아버지가 해야합니다. 아버지가 온 가족을 하나로 합쳐지도록 할 때 자녀들은 소속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가치있게 여기고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소속감, 가치감, 그리고 자신감은 건전한 자아상을 위해 필요한 기본 요소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선 아버지는 아내와 한 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부가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때, 자녀들은 안정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온 가족이 결속하기 위해서는 가족 모두 공유할 수 있는 가치 체계를 가져야 합니다.

둘째, 사랑하기
자녀들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아버지는 (또한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자녀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자녀가 언제나 아버지를 찾아올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시간을 함께 나누고, 삶을 나누며 사랑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스티븐 코비의 표현대로 자녀의 감정은행에 풍부한 잔고를 남겨 두어야 합니다.

셋째, 인도하기
아버지는 인도자입니다. 자녀가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기 원한다면, 아버지가 먼저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아버지가 가지 않은 길을 자녀들이 가길 바라는 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너도 최선을 다해 살아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파송하기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부모는 잠시 그 아이들을 맡아 양육하는 것 뿐입니다. 언젠가 세상으로 보내야 합니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일꾼을 키운다 생각하면 자녀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겁니다. 언젠가 자녀가 크면, 마음 한가득 격려를 담아 그 아이를 세상으로 보내야 합니다. 가서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라고 파송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가족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가족 개개인이 어떤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지, 중요한 열쇠를 아버지가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라고 하지요. 내가 아버지임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깨닫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2009. 6. 5. 03:32
윌리엄 윌버포스는 1787년 10월 28일 일기장에 다음의 글을 남겼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앞에 두가지 큰 과제를 주셨다. 그것은 노예 매매의 폐지와 관습의 개혁이다." 몸집도 작고, 못 생겼으며, 당시에 혐오받던 '복음주의'자였던 윌버포스는 50년간을 노예제 폐지를 위해 헌신했고, 결국 그로 인해 영국은 가장 먼저 노예제를 폐지한 나라가 되었다.

노예제는 당시 영국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이었다. 이를 없앤다는 것은 사회전반을 뒤흔드는 것이다. 노예제를 통해 가장 이득을 본 계층은 상류층이다. 상인, 귀족, 군인 (해군제독 넬슨을 포함), 그리고 이를 비호하는 왕족까지. 하지만 이들 기득권의 (두번의 테러를 포함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윌버포스는 멈추지 않았다.

만약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누군가 윌버포스와 같은 변화를 일으키려 한다면 어떤 취급을 받을까? 노예제 폐지 정도로 큰 건 없겠지만, 예를 들어 종부세 강화나 사교육 폐지, 변칙 상속의 엄단 같은 개혁을 한다면. 백이면 백 그는 좌빨로 몰릴 것이다. 사회 기득권이 그렇게 몰아갈 것이 분명하다.

그랬을까? 윌버포스가 좌빨이어서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헌신했을까? 단연코 아니다. 사상이나 주의가 아니다. 그가 노예제 폐진에 앞장선 것은 그것이 '옳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좌도 우도 아니다. 그는 '정의의 편'이었다.

한동대가 생길 때부터 지켜본 사람으로 이번 사태를 지켜보는 마음이 참 씁쓸하다. 그리고 걱정된다. 한국 기독교는 신앙의 후배들에게 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어찌 젊은 청년이 저리도 좁디 좁은 사고를 할 수 있는가 말이다.기독교에서 '자살'은 분명히 죄로 여긴다. 잘못된 선택이고 잘못된 행동이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죄가 다른 죄보다 더 큰 것은 아니다. 모든 죄는 다 같은 죄다. 이것을 알고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한다.[각주:1]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은 '정의'와 '사랑'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을 닮기 원하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거룩'은 '선'이고 '정의'다. 우리가 옳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백명의 사람이 있는데,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과 한명의 기득권자가 99명의 기회를 착취하며 사는 것. 어느것이 선이겠는가?

정의만 있다면 세상은 삭막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도 요구하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99명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한 사람이 자기 능력을 이용해 남들을 착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의'이다. 더 나아가 그 능력을 사용해 부족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도와준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이런 하나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놓고 '한동대 안에 분향소를 설치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하실까? 아니면 선한 뜻을 가지고 좋은 나라를 만드려 애썼던 그의 마음을 생각하며 안타까워 하실까? 교회에 헌금 잘하던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무턱대고 좋아하실까? 아니면 장로라는 이가 눈앞의 이익만 보고, 1%의 기득권자를 위해서만 정치하는 것을 한탄하실까?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우도 아니고 좌도 아니다. 좌가 (상대적으로) 선한 사회라면 좌로 여겨질 것이고, 우가 (상대적으로) 선하다면 우라 불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하게 사는 것이고, 선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주의가 아니다. 이 원칙은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선한 것을 지향하는 모두에게 적용된다.

윌버포스는 25세때 목회자로의 전향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로 하여금 정치에 남게 한 사람은 존 뉴튼이었다. 뉴튼은 노예상인으로 일하며 수많은 노예들의 행복을 앗아갔던 사람이다. 그가 예수를 믿고 돌이켜 목회자가 되었다. 뉴튼은 윌버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주님이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당신을 세우셨다고 믿고 있으며 또 그렇게 되길 기대한다".

선배가 올바른 의식을 후배에게 심어주었을 때 노예제 폐지라는 선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 지금 한국 기독교의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한국의 미래를 이끌 인재를 만들겠다며 설립한 한동대는 어떤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고 있는가? 불의한 목회자들이야 정죄받아야 마땅한 일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역사의식의 부재다. 옳고 그름이 기준이 아니라, 기독교 패거리의 이익만을 기준으로 생각하니 사회에 긍정적 영향력을 못끼치는 거다. 이명박의 장로직 박탈을 요구한 신학자들의 요구는 고무될만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 너무 부족하다.

묻고 싶다. "예수가 지금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1.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에 대한 더 깊은 생각을 위해 서울비님의 이글 (http://seoulrain.net/1343)을 읽어보기 바란다. [본문으로]


2009. 5. 27. 01:22
미국의 지방, 그것도 한국인들 대상으로 일주일에 한번 나오는 신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인터뷰라는 것을 해봤습니다. <내가 읽은 책 세상>이라는 주제로 책과 그에 관련된 생각을 나누는 형식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여러번 소개가 된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이 대상이었습니다.

원문은 여기 있습니다. 기록 목적으로 원문을 이곳으로 옮겨왔고 중간 중간 관련글의 링크를 달았습니다. 작품활동도 하시고 번역도 하시는 윤현주라는 분이 제 어지러운 말들을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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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세 번이나 읽으셨다고요?

80년대 후반인 대학 다닐 때 한 번, 졸업하고 직장 다니면서 90년대 초반에 한 번, 작년에 다시 읽었습니다.
 
작년에 읽은 건 정말 한참만에 읽으신 건데 그럴만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제 스스로에 대해 갈수록 부족함을 느끼던 참이었어요. 회사일로도 많이 바쁘긴 했지만, 질서가 안 잡혀있는 것 같았어요. 몇 년 전에는 신앙을 잠시 버린 적도 있었고요.계속 신앙인으로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너무 질문없이, 의문없이 믿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점검의 시간을 한 일 년 가졌어요. 그 과정에서 이 책을 읽었어요. 그러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도 되고, 신앙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게 되었어요.

15년이나 지나 다시 읽으면서 감회도 크고, 새롭게 얻은 것도 많았겠네요.

저는 저자이신 이 목사님을 참 좋아해요. 렉싱턴에 있는 교회의 담임 목사를 하실 때 이 분이 좋아 그 교회를 다니기도 했고요. 이분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영적으로 저에게 도움이 많이 되셨던 분이고, 교회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뵙기도 했고요.

여러  책을 쓰셨지만 이 책이 가장 기본인 것 같아요. 대학시절에 이 책은 통과의례 같은 거였어요. 기독교 학생회에서는 필독서의 하나였으니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하면서 여러가지로 힘들 때 이 책을 한 번 더 읽었는데, 내 스스로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대학시절을 허송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작년에 다시 읽으면서 부끄럽더군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 책은 내면세계에 관한 거잖아요. 정신없이 바쁜 이런 세상에 살면서 자기 성찰을 꾸준히 해나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면세계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게 들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죠. 세상살이가 워낙 바쁘다보니 자칫하면 자기 안을 쳐다보지 않게 되죠. 값싼 진리들이 판을 치기도 하고요. 저는 내면세계를 성품이라고 봐요. 밑바탕이 되는 성품. 이 책은 그런 걸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죠. 저에게 큰 영향을 준 또 한 권의 책은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이예요. 두 책에서 다 강조하는 게 겉모습보다 안의 성품이거든요. 외적인 것들, 즉 지식이라든가 기술적인 부분, 얄팍한 테크닉에 기초한 인간관계, 이런 것들보다 내 자신의 밑바탕에 신경을 써야겠구나, 그게 더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내면 세계를 잘 살피고 보살피기 위해 다섯 가지 영역을 들어 이야기하더군요.

내면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동기, 시간 사용, 지적 성장, 영적 성장, 그리고 쉼(휴식)이 중요하다고 말하죠. <동기>편에서는 ‘쫓기는 삶’과 ‘부름받은 삶’이라는 두 유형을 보여주면서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죠. <시간 사용>은 시간 사용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미리 계획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시간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하고요. 공격적인 공부를 통해 계속 <지적으로 성장>해야 하며, 침묵과 고독, 일기쓰기, 묵상 등을 통해 삶의 중심을 잡으면서 <영적 성장>을 해야 한다고 말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 쉬는 것, 즉 <휴식>을 통해 혼란스러워진 내면세계에 다시 질서를 가져와야 한다고 말하죠.

다섯 가지 영역 중에 특별히 더 자신의 마음에 와 닿는 게 있다면 뭔가요?

예전에는 시간 사용에 관한 글들을 중점적으로 보았는데 갈수록 지적 성장, 영적 성장에 관한 글들이 마음에 와 닿아요. 특히 이분이 계속 말하고 있는 무질서하게 사는 삶의 증상에 관한 걸 보면서 제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아내 말에 의하면 제가 스스로 좀 무질서하다고 느끼는 때가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책상을 치우는 일이더래요. 그런데 어느날 보니 저의 집 아이도 똑같이 그러더래요. 그걸 보면서 어떻게 둘이 그렇게 같으냐고 말하더군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 책을 꼭 읽히고 싶어요. 큰아이가 지금 14살인데 내년 정도면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책을 읽는 건 마치 거울을 보면서 지금 내 모습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큰 바윗덩어리를 제거하고 나면 작은 돌들이 나오고, 다 치웠다 싶었는데 또 더 작은 덩어리들이 나오더라. 내 생각에는 이 땅에서 생명이 붙어있는 한 이 정리 작업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내면세계의 질서를 잡는 일을 정원 관리에 비유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얼마전에 제가 읽었던 한 스님의 책에서 본 구절인 ‘수행에는 시작은 있어도 그 끝은 없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라. 묵은 수렁에서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라’ 라는 구절과 참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면 세계를 잘 돌보면서 성장해 나간다는 게 이런 걸 의미하는구나 싶었어요.

기독교인은 살아가면서 목표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사는 거고, 예수님과 같은 성품을 갖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정말 끝이 없는 일이죠. 사람은 예수님처럼 될 수가 없거든요. 목표는 있지만 이룰 수 없는 목표라는 걸 알고 있는 거죠. 그럼에도 그게 옳은 길이니까 그 길을 가는 거구요.

영적 성장을 위한 일기쓰기에 관한 글도 아주 설득력 있었어요. 특히 이런 구절 말이예요. “일기쓰기를 통해서 나 자신이 결코 적나라하게 대면하지 못하는 속사람을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두려움과 갈등은 뚜렷한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채 내 속에 그냥 있을 수 없었고, 그것들은 표면에 노출되고 이름이 붙여졌다.”

일기쓰기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내가 성장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머물러 있나, 아니면 성장하고 있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생각이 더 깊어지게 하지요. 기억을 잘 간직할 수 있게 하기도 하고요.

기도에 관한 글도 좋더군요. 기도는 자기를 내어놓는 일이며, 일차적으로 날마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했어요.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한테 내가 필요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기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말은 내가 해도 결국은 듣는 거라고요. 기도가 깊어질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게 뭔지를 듣는 거죠. 기도를 대화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대화가 깊어질수록 더 많이 듣게 되는 거와 같아요.

맥도날드 목사님에 관련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이 책을 출판한 이후 이 분은 굉장한 실패를 경험하시게 되었어요. 간음의 죄를 범한 거예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어요. 빌 하이벨스, 찰스 스윈돌 등 이 분을 아끼던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이 분과 그 가족들을 도왔어요. 1년의 기간이 지난 후 회복을 확인한 동료들이 회복식을 베풀어 주었어요. 죄의 자백에서 회개, 그리고 회복까지 3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레이스 채플 교인들은 이 분을 찾아가 다시 교회로 불러 들였고요. 죄를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마음, 그리고 그 절망하는 마음을 붙잡아 회복시켜주는 은혜, 그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생각해요. 더 많은 이들이 은혜를 맛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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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29. 15:22

순전한 기독교 (양장본) - 10점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홍성사

기독교 나아가 예수를 믿는다 하는 모든 종교가 비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밖에서는 기독교를 넌센스라 규정하고, 알고싶은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안에서는 신앙을 강조하며 기독교에 대한 질문을 믿음없음으로 여기며 이성을 죽이고 있다. 안팍으로 기독교는 비이성화되어가고 있다. 한세대 전에나 통했을 거짓말과 몰이해를 아직도 창조'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신념을 가지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각주:1] 갈수록 종교(특히 기독교)와 이성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기독교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워지는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가 주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보통 사람에게는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는 중세문학의 권위자이며 또한 뛰어난 기독교 변증론자다. 이 책은 루이스가 2차대전 기간중 라디오를 통해 들려주었던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정리한 책이다.

루이스는 기독교의 핵심을 소개한다는 의미에서 '순전한(Mere) 기독교(Christianity)'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제목처럼 이 책은 기독교와 천주교를 통털어 교파와 상관없이 예수를 믿는 종교라면 모두 동의할 수 밖에 없을 최소한의 기독교를 소개하고 있다. 핵심에 동의한다면 교파간의 차이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깔려있다. 일부 골수주의자들에게는 이런 통합적 접근이 사탄의 장난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내게는 그 사람들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루이스가 말한 기독교의 정수를 들여다보면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적, 아니 지극히 상식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책은 인간의 내면에 대한 고찰과 신에 대한 변증으로 시작한다. 인간의 마음을 곰곰히 들여다보면 선에 대한 동경심이 있고, 이는 신의 존재로서만이 설명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라는 것이다.

절대선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기독교의 여러부분들이 설명되어진다. 신에 대한 믿음과 행동의 덕목이 설명되어진다. '무엇'보다는 '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인간의 본성과 절대선에서 왜 현재의 기독교의 형태가 나오는지로 생각의 흐름이 이어진다. 기독교적 믿음이 무엇인지, 종교는 왜 도덕의 결과물이 아닌지, 성에 대한 바른 접근 방법은 무엇인지 등등. 지극히 상식적이라 할 수 있는 개념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풀어내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기독교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적 개념들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삼위일체'나 '이신득의'와 같은 개념들. 루이스는 그 개념들을 비종교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있으나, 아마도 비기독교인에게는 아직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작가도 이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우면 건너 뛰라고 조언하고 있다.

누군가 기독교를 '불타는 이성 (Logic on Fire)'라고 표현했던 것이 기억난다. 기독교가 굳이 상식을 벗어난 종교일 필요는 없다. 상식을 초월할 수는 있지만.[각주:2]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겉모양만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들에게 비판의 대상을 조금은 연구하고 비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래도 그들중 기독교를 이해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서슴없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기독교인들이다. 교회에는 다니지만,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 심각하게 접근해본 적이 없는, 강단에서 전해지는 설교가 기독교 이해의 전부인 신도들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를 아름다운 종교라 생각한다. 정의와 사랑이라는 신의 속성에서 시작해 십자가를 통한 구속으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핵심은 누구 말대로 참으로 우아하다.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는 왜 기독교가 아름다운 종교인지를 알게 해주는 책이다.

==========================================

절대선에 대해 썼던 글이나 지옥과 천국에 대한 해석 등 루이스의 책을 보기 전에 나름대로 생각해둔 것들이 있었다. '순전한 기독교'를 읽으며 내가 내렸던 결론들이 루이스와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엽적인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인 종교일지도 모른다.

 
  1. 모든 창조과학 혹은 창조과학하는 사람들을 몰아서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 많은 분들은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접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조과학 콘서트'라는 그래도 상당히 팔렸을 책에서 빅뱅을 단지 하나의 설에 불과할 뿐이라고 일축해버리는 것을 보고 그 폐쇄적 아집에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하늘 한쪽에 구멍이 뚤려있고 그 밖으로 나가면 바로 삼층천이며 천국이 있다던 어느 강연은 오히려 코미디보다 더 재미있었다. [본문으로]
  2.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포스팅을 준비중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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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28. 16:22
왕멍의 '나는 학생이다'를 읽고 있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학생'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관리, 작가, 농부의 생활을 했지만 그중 어느것도 자신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며, 돌이켜 보건데 그는 항상 학생으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학생'이라 단정짓는 그의 단호함이 부러웠다.

내가 무엇인가하는 고민 뒤에 이 책을 읽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를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아직 살아온 날 못지 않게 남은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에 대한 정의에는 지금까지 삶에 대한 고백도 있겠지만, 이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의지의 부분도 있다. 지금까지의 길을 정리하는 것임과 함께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겠다는 결단이다.

나는 엔지니어인가 질문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오랫동안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살았다. 엔지니어 특히 프로그래머가 좋았고, 평생 그 길을 가고자 미국에 건너왔다. 하지만 계기가 있어 엔지니어보다는 매니저의 삶을 선택했다. 엔지니어링 마인드는 항상 가지고 살겠으나 엔지니어라 부르기에는 실제 기술에서 너무 떨어져있다. 나는 엔지니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매니저인가? 그렇게 부르기에는 아직 매니저로 보낸 시간이 전체 인생에 비해 짧다. 그리고 지금 계획하는 일이 성공한다면 또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남은 생애 무엇을 할지 모르기에 매니저라 부르기도 힘들다.

나는 작가인가? 글과 사진을 좋아하고 언젠가 글과 사진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소망이 있으나, 작가라 부르기에는 시간과 경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적지 않은 관심을 쏟기는 하나, 주업에 비하면 우선 순위는 한참이나 밑이다. 나는 작가는 아니다.

40년 남짓한 인생중, 18년을 학교 생활을 했고, 미국에 와서도 MBA다 뭐다 하면서 3년 넘게 학교를 다녔으니 '학생'이라 나를 규정할 수 있을 법 하다. 평생 공부하며 살겠다는 것이 내 주장이기도 하니 '나 학생이다' 선언할 수 있겠으나... 뽀대가 안난다. 따라하는 것은 왠지 캥긴다 ㅡ.ㅡ

그러다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회에 발을 들인 이후 30년 가까이 내가 크리스찬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년간 진리를 확인하고 싶어 신을 부정하고자 노력한 적도 있었고, 지금도 성경의 모든 것을 이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내 생각 근본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이 떠났던 적이 없다. 한국 기독교의 썩어 있는 모습울분을 쏟는 이유도 '내가 크리스찬'이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선이 있다고 믿으며 또한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인정한다. 또한 세상에는 내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함을 경험하여 알고 있다. 세상은 신을 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과학적 가설의 조합보다 절대선을 통한 설명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절대선이 존재할 때, 귀결점은 인격신이라는 논리에 찬성한다. 인격신이 존재한다면, 그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 인류에 평화와 소망을 주길 원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인격신에 가장 근접한 모습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라는 결론을 내렸다. (충분한 비교가 없었기에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라고 단정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가 가장 쉽고 확실한 길임을 믿는다.)

나는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구원관을 믿는다. 예수의 오심과 죽으심, 부활하심이 거대한 시나리오에 맞추어진 꼭 필요한, 그러면서도 참으로 감사한 사건임을 믿는다. 그 예수의 가르침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것임을 믿으며, 더불어 그에게는 단지 '좋은 선생'을 넘어선 신적 초월성이 있음도 믿는다. 그를 따라가며 '거룩'해지는 것이 내 삶의 목표이며 그게 내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임을 믿는다.

그렇다. 나는 크리스찬이었고, 크리스찬이며, 앞으로도 크리스찬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게 나의 정체성이다. 그가 열심히 살라 하였기에 나는 내 직업에 충실할 것이고, 그가 거룩하라 하였기에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가 사랑하라 하였기에 내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것이며, 그가 남을 도와주라 하였기에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애쓸 것이다. 그가 희생을 보여주었기에 나도 희생을 치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도록 그를 닮아갈 것이다. 지금까지 부족했기에 앞으로 더 열심을 낼 것이며, 또한 도움을 청할 것이다.

나는 크리스찬으로서의 내가 좋다. 그리고 그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다.






2008. 7. 16. 07:44
#1.

고든 맥도날드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은 내게 삶에 대한 진지함을 가르쳐 주었다. 회사일로 미국으로 옮길 때 처음 택한 집이 그가 담임하던 그레이스 채플과 20분 거리였다. 부족한 영어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 참석하기로 한 것은 내겐 당연한 것이였다.

당시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클린턴이 곤경에 처해있었다. 어느 주일날. 설교를 일찌감치 끝낸 맥도날드는 교인들 앞에서 준비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클린턴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힘들어하며, 평소에 친분이 있던 맥도날드에게 카운셀링을 부탁했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영적으로 회복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맥도날드는 이를 위해 일주일에 한번씩 클린턴을 방문해서 도와주고자했고, 모든 비용은 자신이 낼 터이니, 일주일에 하루 그 일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도록 교인들이 허락해달라 부탁하는 것이였다.

#2.

1987년 그레이스 채플을 담임하며, 기독학생회(IVF) 총재를 하고 있던 (소위 잘나가던) 고든 맥도날드는 간음의 죄를 범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빌 하이벨스, 찰스 스윈돌등 고든을 아끼던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그와 그의 가족을 도왔다. 1년의 기간이 지난후 그의 회복을 확인한 동료들은 회복식을 베풀어 주었다. 죄의 자백에서 회개, 그리고 회복까지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레이스 채플 교인들은 고든을 찾아가 그를 다시 교회로 불러 들였다.

#3.

고든이 클린턴을 돕겠다고 이해를 구하던 그날, 나는 그의 간음사건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예배당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칩거중에 있던 고든을 찾아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라 용기를 주던 당사자가 그 자리에 앉아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한번 겪었던 죄로 인해 힘들어 하는 클린턴을 돕겠다는 고든. 목회자에게 휴일로 주어지는 하루를 클린턴을 위해 쓰겠다며 양해를 구하는 고든에게 교인들은 기립박수로 지지를 보냈다.

아쉽게도 그가 돕고자 했던 클린턴은 완전히 죄에서 돌아선 것 같지는 않다. 요즘도 스캔들을 벌이는 것을 보면. 하지만 고든 스스로는 아름다운 회복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창 나이에 은퇴를 했다. 그리고 뉴햄프셔의 한적한 농원을 사들여 가족과 지내며 책도 쓰고, 기독교 잡지사에서 일하며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4.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였다. 예수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좇아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그였다. 하지만 예수가 잡혀가던 날 베드로는 세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다. 마지막으로 (저주하며) 부인했을 때 베드로는 뜰안에서 심문을 받다가 고개를 돌린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와 후회의 눈물을 흘리던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모든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예수가 부활 이후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베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번을 걸친 만남에도 베드로는 침묵했다. 베드로의 부인은 비밀이 아니였던 것 같다. 다른 이들도 베드로의 부인을 알았다. 그건 베드로에겐 정치적 죽음이였다. 희망이 없어진 베드로는 다시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그 베드로에게 예수는 다시 다가갔다. 처음 베드로가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던 그때처럼, 고기도 못잡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베드로에게 예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게했다. 예수임을 깨닫고 뭍으로 나온 베드로를 예수는 떡과 생선을 구워 맞이했다.

배신한 제자를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한 예수 옆에 앉은 베드로. 아무 말 없이 어색하게 먹기만 하는 그 마음. 아마 목이 매여 몇번이나 물을 들이켰을지도 모른다. 침묵을 깨고 예수가 묻는다. 세번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번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자신을 배반한 수제자가 회복될 수 있도록 예수가 손을 붙잡아 주었다.

#5.

'회복'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나는 두사람이 생각이 난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질 인생의 나락에 처했었던 두 사람. 그 사람을 살린 것은 바로 '은혜'다.

죄를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마음. 그리고 그 절망하는 마음을 붇잡아 회복시켜주는 은혜. 그것이 바로 기독교다. 회개와 은혜가 없다면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없으니 은혜를 보기도 힘든듯 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혹은 혀에 발린 사과만으로 넘어가려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리고는 은혜로 용서받았다고 한다. 완전 싸구려 은혜 아닌가.

기독교는 회복을 줄 수 있는 종교다. 은혜가 있는 곳이다. 더 많은 이들이 그 은혜를 맛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한다.




2008. 2. 22. 15:21
<뉴스후>의 방송이후 교회에 대한 세상의 질타가 다시 매서워졌습니다. 하지만 세번에 걸쳐 방영된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이 방송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표현대로, 재탕삼탕입니다.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목회자들도 알고 있고, 기독교에 몸담은 시간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도 알고 있고, 또 이제는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이 내린 결론 - 한국 개신교는 자정능력이 없다 - 에 대해 반박할 수 없음이 참 서글픈 일입니다.

#1. 교회 개혁이 어려운 점

한국의 개신교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원칙에 의해 다스려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그래도 종교인데, 그 힘이 영성이나 지도력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때는 그런 시절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시절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은 교회 규모에 비해 존경을 많이 받던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는 모든 목회자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의 힘은 곧 신도수이고 재력입니다. 외형적인 힘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경제인들의 모임인 전경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두개의 단체로 한기총KNCC가 있습니다. 한기총은 보수진영을 대표하고 KNCC는 진보진영을 대표하지요. (진보라고 하지만 사학법 재개정에 찬성하는등 이전의 KNCC는 더 이상 아닙니다. 10억을 기부하기로 약속한 사람을 회장으로 당선시킨 한기총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단체들 밑에 교단이 있고, 교단밑에 교회들이 있습니다. 조직상으로는 이렇게 상하구조로 되어 있는듯 하나, 상위조직이 하위조직에게 뭐라 할 힘이 전혀 없는 것이 한국 교회입니다. 단지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모여있는 것 뿐입니다. 힘있는 교단에서, 그리고 힘있는 교회에서 하겠다는 일을 막을 힘이 전혀 없습니다.

만에 하나 교회 개혁에 뜻이 있는 목회자가 조직의 대표가 된다해도 실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하물며 모인 이들의 근본 성향이 성공주의요 신도수 제일주의인데 이 단체들에게서 개혁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난망한 일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며 비판 받고 있는 목회자들은 대부분 대형교회의 힘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주목 받는 것은 그만한 규모가 있기 때문이지, 이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깨끗해서가 아닙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대부분은 그들을 목표로 뛰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그들의 꿈이요 희망입니다. 오죽하면 '금이빨 사역'이나 '라식 사역' 같은게 나오겠습니까?

<뉴스후> 2월 16일 방송에 옥한흠 목사님의 말씀이 소개되었습니다. "교회의 자정능력이 없다. 아니면 잃어가고 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 분은 그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존경할만한 목회자들이 아직 많습니다. 이동원, 홍정길, 하용조, 김동호, 그리고 이재철, 강민준, 전병욱 등으로 이어지는, 뛰어난 영성을 가지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목사님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들이 한국교회를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자신들의 영역에서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 기독교의 부패에 동참하지 않기 위해 애쓸 뿐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오시면 모를까. 한국교회의 썩어져가는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는 없습니다. 시스템적으로 소수의 인원이 개혁을 이끌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그런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질리도 만무합니다. 기득권 세력이 그렇게 놔두지를 않을겁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사람들이 개혁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그 주장에 힘을 실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 잘못된 목회자를 비판합시다

한국의 크리스찬들에게 고합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잘못된 목회자들을 비판합시다. 우리들이 침묵하는 것은 교회의 부패에 대해 암묵적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소수의 문제다"라는 핑계로 책임을 회피하지 맙시다. 순복음, 소망, 금란 이 교회들만 합쳐도 백만 가까이 됩니다. 한국교회 교인이 천만이라 했을 때, 10%가 잘못된 목회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혹은 암묵적으로 시인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소수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까?

목회자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는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며 제사장이기에 사람이 논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누구에게서 나왔는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을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이라 이야기하며 자신을 차별화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신학적으로도, 상식으로도 맞지 않은 일입니다.

개신교의 근본은 종교개혁의 다섯가지 교리중 하나가 만인제사장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제시를 이곳에서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링크를 추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를 구별하여 세웠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다른 계층이 아닙니다. 다만 역할의 차이입니다. 목회자는 질서를 위해 세워진 교회의 리더입니다. 잘못된 리더가 비판 받듯이 잘못된 목회자가 비판받는 것은 상식입니다.

두번째, 나도 부족한데 누구를 비판하느냐 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 특히 많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어찌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라하느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 많이 사용되지요. 하지만 비판/바로잡음은 비난/정죄와는 다릅니다. 죄지은 자에 대한 예수님의 처리방안(마 18장)을 기억해야합니다. 바울은 "여러분들이 심판해야 할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죄를 짓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고전 5:12)"라 말하며 악한 자를 용납하는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죄 지은 자가 있으면 바로잡으라(갈 6:1) 했습니다. 그것이 성도로서 짐을 나누는 것(갈 6:2)이라 했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의인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잘못된 것은 누가 뭐래도 잘못된 것이고, 진리는 누가 외치든 진리입니다. 성경은 지적할 때의 자세에 대해 경계를 요구하였지, 다른 사람의 죄를 눈감아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은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바로잡으라 성경은 요구합니다.

너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비난하느냐? 불의한 목회자들은 그렇게 외칠겁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그대들은 하나님의 명으로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냐고. 그대들이 간음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도 같이 계셔서 축복해 주시더냐고 말입니다.

셋째, 인간적인 관계가 바른 지적을 막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안의 인간관계는 왠만한 친지보다 친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잘못이 있어도 좋은게 좋은거다 하고 넘어갑니다. "장점을 봐야지 단점만 강조해서 쓰나"라며 덮어두고 넘어가기를 서로 권합니다. 하지만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마 10:34)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잘못된 것에 대한 단호한 자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비판할 때, 누가 옳은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따진다면 불필요한 갈등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이건 상식입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은 진정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를 위한 것이지 서로를 비난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정당한 비판마저 영적전쟁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은 무엇이든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탄의 계략이라고 하는 분들... 솔직히 이분들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말이 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사시라고 할 수 밖에요.

#3.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교회의 불의에 대해 세상은 자기 몫을 다 했습니다. 이제는 크리스찬들이 목소리를 내어야합니다. 다음과 같은 실질적 행동 방안을 제안합니다.

첫째, 각자 처한 곳에서 불의를 없애나가기 시작합시다. 문제가 있는 교회라면 그 문제를 해결하자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기 바랍니다. 재정이 투명하지 않다면 교회 돈이 어디에 쓰여지나 보자고 요구해야 합니다. 공동의회에도 참가하고, 제직회에서도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뒤에서 투덜거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고칠 수 없다면 떠나시기 바랍니다. 믿고 따를 지도자는 적지 않습니다. 높은뜻 숭의교회를 가시던지, 전주 안디옥 교회를 가시던지 주위에 있는 좋은 목회자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문제 있는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은 암묵적으로 그 행위를 인정하는 겁니다. "한번 정한 교회는 평생 섬겨야된다"라는 목회자의 이익을 위해 잘못 사용되는 가르침에 속지 마십시요. 불의한 목회자는 도태되어야 하고, 좋은 목회자는 흥해야 합니다. 잘못된 지도자를 섬기며 시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목소리를 모아야 합니다. 교회의 개혁을 주도하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교회개혁실천연대같은 적극적인 목소리도 있고, 한미준(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과 같이 신학생 대상으로 내실을 준비하는 단체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시기 바랍니다. 회원가입도 하고, 재정적 후원도 하고, 모임이 있다면 참가하시기 바랍니다. 주위에 마음 맞는 사람들이 있다면 서로 독려도 하고, 가능한 모든 언로를 통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교회개혁을 바라는 팀블로그같은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갑시다.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갈 때 변화는 일어날 것입니다. 또한 당당해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당당해야 정의를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기독교에 참된 변화가 일어나길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4. 복음을 싸구려로 만들지 맙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힘이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이 담겨 있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실천적 가르침이 있습니다. '일부'이지만 힘 있는 자들의 잘못된 행동이 그 가르침을 땅에 굴러다니게 만들고 있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그들을 비판합시다. 아니 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세상에 외치기 시작합시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 금이빨이나 만들어주고, 간음한 목사에게 벤틀리나 안겨주는 그런 싸구려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해줄 책임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2008. 2. 4. 16:17
#1.

최근 일년동안, 아니 훨씬 이전부터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는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그 얼마전부터 우리 가족은 나와 아버지를 빼놓고는 모두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환경의 영향도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놀러다니다 "심심해서" 가족들이 다니던 교회에 들어섰던 그날 오후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이후 기독교는, 그리고 교회는 내 삶에서 빼놓기 힘든 것이였다. 목사가 되고 싶었던 중고생 시절, 독재와 사회 모순에 대한 대안으로 기독교 밖에 없다 믿었던 대학시절을 보냈다.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고, 부모님을 보내드리고, 미국에 오는 인생의 굴곡에 맞추어 신앙의 업다운도 경험했다. 그리고 지난해 그동안 회피하고 있었던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정말 믿을만한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답을 찾기 쉽지 않은 질문들을.

#2.

질문과 고민으로 점철된 2007년 말에 이 책을 만났다. "내려놓음" 2006년과 2007년에 걸쳐 5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이 책을 쓴 이용규선교사는 원래 역사학도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하버드에서 중동사로 박사를 받았다. 박사를 받고나서 신학이나 선교학 공부도 하지 않은 저자는 몽골로 날아간다. 몽골국제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이레교회의 담임으로, 부인은 몽골영양개선연구소의 소장으로 그 지역을 섬기고 있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저자가 경험했던 "은혜"를 기록하고 있는 일종의 간증서적이다.

간혹 어떤 간증서적은 개인의 경험과 보편적 진리를 혼동해서, 자신이 겪은 일이 전부인양 주장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간증서적을 즐겨읽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일관된 추천 때문이였다. 그렇게 좋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을 제시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런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오랜 교회 생활로 머리만 커지고 줏어들은 것은 많았기에,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이미 한번씩은 들어봤던 원리와 비슷한 경험들이였다. 하지만 고민 하나는 나에게 확실하게 던져주었다. 그것은 '과연 믿는다는게 도데체 뭔가?'라는 질문이다.

#3.

책을 통해 나타나는 이용규선교사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을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지도교수가 바뀌면서 준비하던 논문을 재구성해야 했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기에 기도하면서 결정했던 기간내에 졸업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믿고 맡기며 한달반을 준비한 결과 예상보다 너무나 쉽게 정리가 되었다. 새로운 교수도 그 결과에 너무 흡족해했고 원하는 시기에 졸업할 수 있었다. 제2외국어로 선택한 독일어가 너무 힘들어 논문심사에 떨어질 위험이였지만 다행히 번역할 본문으로 로마서가 나와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혹은 차가 없는 사람들을 태우고 교회에 가고 싶어서 미니밴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문제가 많아 팔 수도 없던 차를 누가 뒤에서 받았다. 차는 완전히 부서졌는데, 다행히 보험회사에서 산 가격보다도 더 많이 보상을 해주어 아주 쉽게 중고 미니밴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이런식을 우연들이 가득 차 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비판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선택적 관찰'이다. 잘 되도 신의 뜻, 잘못 되도 신의 뜻. 이렇게 해석을 하고 나면 세상에 신의 뜻이 아닌게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도 같은 비판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학을 가기전 그는 공부하던 중국사를 계속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중국사로 지원한 학교는 다 떨어지고, 중동사로 지원한 하버드에 붙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생각한다. 원하고 기도하던 것을 받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지금의 선교를 감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였다는 거다. 반면, 아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영양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선교에 쓰이게 되었다.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도 그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였다.

하지만 그저 벌어진 일만 놓고 본다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뜻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신의 인도하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이른바 믿음이 성장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신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 이렇듯 이성적으로 접근했을 때 신에 대한 믿음이 자라날 틈은 별로 없다.

#4.

사실 기독교에는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아이러니들이 상당히 많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은 중요한 전쟁을 준비하며 제사장인 사무엘을 기다린다. 하지만 사무엘은 약속한 기한인 일주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백성들의 사기는 떨어져 도망가기 시작한다. 이에 사울은 스스로 제사를 지내고, 그 이후에야 도착한 사무엘은 오히려 사울을 책망한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사실 사울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말이 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상황에 따라 유연한 선택을 한 사울은 좋은 리더다. 게다가 먼저 약속을 어긴것은 사무엘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한다.

이 책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다. 어떤 문제를 놓고 시한이 다 되도록 기도해도 응답이 없더라는 말에, 저자는 이렇게 질문을 한다. "해결시한이 다 지나고 나서도 믿고 기다려 본적이 있느냐"라고. 집안 문제로 인해 백만원이 급히 필요하다고 치자. 내일 아침에 필요한데 밤 열두시가 다 되었는데, 돈 나올 구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다 믿어진다면 믿고 기다리는게 신앙이라는 것이다.

살아 생전 오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조지 뮬러의 일화는 많이 알려져 있다. 평생 고아원을 운영하던 뮬러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았다. 어느날도 당장 다음날 아침 아이들 먹일 식량이 없었다. 마침 같은 지역의 정치인이 기부금을 냈는데, 그 금액이 아이들을 먹이고 남을만큼 충분했다. 하지만 이 정치인이 부도덕한 인물이였는지 뮬러는 그 돈을 거부했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 기대했을 때 다음날 아침 근처 제과점에서 원래 시간보다 조금 더 요리된, 하지만 먹기에는 충분한 빵을 보내왔다. 딱 아이들을 먹일만큼의 양이였다고 한다.

학비야 장학금을 받는다 쳐도 매달 2000불 정도가 생활비로 필요했다. 근처에 넉넉한 사람이 없기에 어디 도움 받을데도 없었는데도 이용규선교사는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한다. 한번도 여유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부족한 적도 없었단다. 누구는 그럴 것이다. "그만큼 열심히 그리고 검소하게 살았을꺼야." 당연히 그는 검소하게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5.

지난 일년간 나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접근했다. 누군가 신앙은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반응"이라고 했다. 난 그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신앙은 머리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내 삶에서 "선택적 관찰"의 한가지 예를 경험했다. 이전 일을 내려놓고 다음 일이 결정되기까지 세달의 기간동안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사업부의 최고 책임자에게도 여러번 불평을 했다. 그래도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날 내가 참 교만했다는 생각을 했다. 절대자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나를 깨달았고, 그 문제를 내 손에서 내려놓았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절대적인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당신이 계시다면 당신이 책임져주세요"하고 하나님에게 맡겼다. 그리고 일주일도 채 안되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몇가지의 옵션이 주어졌고, 그 중에는 평소에 원했던 일보다 더 좋은 일도 있었다. 내가 최종목표로 삼는 일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일이다. 추가로 이전에 하고 싶었던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아직도 남아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조건이 좋아진 것이다.

우연이라 해석할 수 있다. 시기가 무르익었기에, 충분히 기다렸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맘 깊은 곳에 침잠해 들어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 물어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라는 답을 듣는다. 그런 대답을 듣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믿고 싶으니까, 믿는 것일 수도. 하지만 그런 "우연"들이 계속된다면.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현상들이 "믿음의 눈"으로 해석된다면, 그게 바로 믿는다는 것이 아닐까? 내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참 많다. 그리고 나도 그런 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6.

아직도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세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을 배제하고도 세상은 해석되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는 없다. 절대자를 배제하고는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못찾겠다. 신이 있을 때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다.

그렇기에 나는 신을 믿고 싶어하고, 절대자를 그리워한다. 놀랍게도 내가 그를 따르려고 할 때 이성적으로 100%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너무나 좋은 "우연"들이 생기고,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가치있게 해석이 된다. 그를 의지할 때 행복하고, 그를 생각할 때 나의 결점들이 보인다. 그의 사랑을 느끼며,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 말씀에 순종하려 노력할수록 나는 내가 조금씩 더 "훌륭"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직도 난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을 소망한다. 하지만 분석만 한다고 이해되어지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인정한다. 내가 그 길을 걸어갈 때, 비록 하루 하루 이해할 수 없어도 돌이켜 보면 그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이였음을 믿게되는 것. 그것이 믿음임을 이 책 "내려놓음"이 가르쳐 주었다.

왜 그렇게 만드셨는지. 왜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없게 해놨는지 솔직히 불만이다. 그리고 죽고나면 따질 것이다. 그럼에도 절대자가 그것을 원한다면, 내가 어찌하겠는가. 결국 직접 걸어봐야 이해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걸어가 보면 그길은 더이상 착각, 망상, 혹은 자기 세뇌가 아니다. 그 길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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