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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9건
2014. 8. 18. 10:14

JCS 1막의 줄거리와 노래를 소개하는 JCS #2. Story & Songs [Part I]을 쓴 게 2011년 9월, 벌써 3년이 지났더군요. 늦었지만 안하는 것보다 났다고 생각하기에 2막에 대해 이어서 쓰겠습니다. 록 뮤지컬 JCS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은 JCS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1막에 대해 적은 이전 글을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2막의 중심은 예수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시작해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1막에서 보여준 여러 갈등(예수-유다, 예수-제자, 예수-마리아, 예수-종교지도자, 예수-백성)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며 충돌 혹은 발전하거나 봉합됩니다.  


#13.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복음서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JCS의 설정은 자유롭습니다. 예를 들어 73년판 영화에서 최후의 만찬은 야외에서 대낮에 일어납니다.


이 장면 제자들의 합창으로 시작하는데 그 가사가 참 재미있습니다. "언제나 사도가 되길 원했지. 열심히 하면 될 거라 생각했어. 은퇴하면 복음서를 쓸거야. 죽고 나면 우리 이야기를 하게 말이야." 이어서 예수가 빵과 포도주를 주며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살과 피다, 이것을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갑자기 바뀝니다. 예수는 "내가 미쳤구나. 너희 멍청한 얼굴을 보니 내가 죽고 나면 십분만에 내 이름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야"라고 말하며, 베드로는 나를 세번 부인하고 이중 한 명은 나를 팔 거라 말합니다.


이어지는 유다와 예수의 논쟁이 압권입니다. 내가 왜 당신을 팔려고 했는지 아느냐라는 유다의 말에 예수는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어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가라고 말하지요. 유다는 삐져서 계속 빈정되고, 예수는 화를 냅니다. 결국 유다는 예수를 이해할 수 없다며 떠납니다. (이때 Superstar의 멜로디가 잠깐 사용됩니다.)



2012년 공연 장면입니다. 이런 분위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14. 겟세마네/그저 말하고 싶어요 (Gethsemane/I Only Want to Say)


JCS에서 가장 유명한 곡중 하나입니다. 제자들이 자는 모습을 보고 기도하러 외진 곳으로 간 예수는 아버지에게 내가 왜 죽어야하는지 알려달라며 항의를 합니다. 그는 처음에 시작할 때는 마음에 감동이 있었지만 이제는 너무 힘들다고 고백합니다. 어느 누구에게서 이 정도를 기대할 수 있냐 따집니다. '내가 어떻게 죽는지 똑똑히 지켜보라며'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체념한듯 독이 든 잔을 마시겠다고 하지요. 당신이 모든 카드를 가지고 있으니 내 마음 바뀌기 전에 데려가라구요.

예수역에게 가장 중요한 곡이다 보니 이 역을 맡은 배우 모두 최선을 다해 부릅니다. 73년판 영화를 100번은 넘게 보고 음반도 많이 들었기에 테드 닐리가 부른 겟세마네가 제게는 가장 귀에 익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96년 앨범의 스티브 발사모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더군요. 최근에 나온 2012년 아레나 투어의 벤 포레스터도 멋진 연기와 노래를 보여줬습니다.   



73년도 영상에서 테드 닐리가 부른 겟세마네입니다.


#15. 체포 (The Arrest)


겟세마네에서의 기도가 끝나면 유다가 다가와 입맞춤으로 누가 예수인지 병사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예수는 제사장에게 끌려갑니다. 이때 백성들이 야유하기 시작합니다. "왜 그랬냐? 가장 큰 실수가 뭐라 생각하냐?"라면서요. 예수를 보고 제사장은 묻습니다.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 말에 예수는 "너가 그렇게 말하였다"라 답하고, 제사장은 증거가 충분하다며 예수를 빌라도에 데려갑니다.


#16. 베드로의 부인 (Peter's Denial)


예수가 말한데로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 부인합니다. 그 모습을 본 막달라 마리아는 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비난하지요. 베드로가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자, 마리아는 이게 바로 예수가 말한 거라며 어떻게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미리 알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짤지만 좋아하는 곡입니다. 복음서의 기록과는 다르지만, JCS의 설정에서는 마리아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마리아의 생각을 바뀌기 시작합니다.


#17. 빌라도와 예수 (Pilate And Christ)


빌라도와 예수의 짧은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끌려오는 예수를 보고 빌라도는 "이 불쌍한 인간 뭐냐?"라며 별 신경 안쓰다가 예수라는 말을 듣고 관심을 보입니다. 너가 유대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가 그건 너의 말이라 대답하자, 빌라도는 곤경에 처한건 바로 예수라 지적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기에 헤롯왕에게 보냅니다.


#18. 헤롯 왕의 노래 (King Herod's Song)


JCS에서 가장 코믹한 노래입니다. 그래서 한번만 등장하는 헤롯임에도 사람들 기억에 많이 남는 노래입니다. 한국 초연에는 곽규석씨가 헤롯역할을 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를 단지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는 일반인의 시각을 보여줍니다 헤롯은 예수에게 너의 소문을 많이 들었으니 내게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지요.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봐. 아니면 물 위를 걸어보던가, 그러면 너를 그냥 보내줄께라면서요. 계속 요청해도 아무 반응이 없자 헤롯은 예수가 사깃꾼이라며 데리고 가라고 소리칩니다.


나중에 '크리스찬의 JCS 사용법'이라는 글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이 장면 마지막 가사는 중간에 변경됩니다. 초창기 앨범을 들어보면 마지막에 헤롯은 예수에게 '내 인생에서 사라져 줘 (Get out of my life)'라고 말하지만, 언제부턴가 '여기에서 사라져. 너 그것보다는 더 잘해야할꺼야'로 가사가 바뀝니다. 개인적으로 초기 가사가 더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19.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요, 제발 (Could We Start Again, Please)


헤롯왕의 궁전에서 빌라도에게로 다시 끌려가는 예수를 보며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시작할 수 없냐'며 간청합니다. 당신 말하는게 뭔지 알겠다. 근데 너무 지나쳤다. 너무 무서워지기 전에 다시 시작할 수 없겠냐는 그들의 염원을 노래합니다.


짧은 노래이지만 멜로디가 아름다워 좋아하는 곡입니다. 베드로와 마리아라고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너무 아프기에 이렇게라도 간청하는 거지요. 이 곡은 너무 밋밋하게 부르면 안 어울립니다. 그래서 이본느 엘리만의 간절한 모습이 담긴 73년판을 좋아합니다.


#20. 유다의 죽음 (Judas' Death)


갇혀있는 예수를 보고 마음이 찔린 유다는 제사장을 찾아와 받은 돈을 돌려줄테니 예수를 풀어달라고 애원합니다. 제사장들은 이제 와서 뭔 소리냐며 유다를 돌려보내지요. 유다는 괴로워하며 마리아가 불렀던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의 일부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를 어떻게 사랑해야하는지 모르겠다면서요.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해 이 일을 하게 했다고, 당신이 나를 살인하는 것이라며 원망하며 목을 매어 자살합니다. (이런 해석을 한 이들이 여럿 되지만 성경의 증거와는 다릅니다.)


#21. 빌라도 앞의 재판 (Trial Before Pilate)


다시 끌려온 예수에게서 잘못을 발견할 수 없었던 빌라도는 예수를 보호하려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못밖으라고 계속 소리치지요. 빌라도는 이 자는 그저 미쳤을 뿐이라며 39대의 채찍질로 예수를 보내려합니다. 십자가에 못밖으라는 외침 속에 39대의 채찍질이 시작됩니다. 1부터 39까지 숫자가 늘어날수록 빌라도의 숨소리는 거칠어집니다. 앨범으로 들을 때는 잘 모르지만, 영상에서는 처음 한두대에서 마리아가 소리를 지르며 기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채찍을 맞고 쓰러져 있는 예수를 일으키며 빌라도는 너는 어디에서 왔냐. 너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내가 너를 구할 수 있는데 왜 아무 말이 없냐며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빌라도에게 이 모든게 너의 손을 벗어난 것이라 답합니다. 결국 빌라도는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며 손을 씼고 예수를 십자가 형에 내어 줍니다.


이곡에서의 빌라도는 이전 (#17. 빌라도와 예수)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갑자기 예수를 변호하고 나오지요. 약간 뜬금없습니다. 빌라도의 변화를 위해 1막에서 빌라도의 꿈을 배치합니다만, 그래도 캐릭터의 연속성이 조금 부족한게 개인적으로 불만입니다.


#22. 슈퍼스타 (Superstar)


십자가에 달리려는 예수 앞에 이제는 죽은 유다가 나타나 ‘난 당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라며 노래를 합니다. 왜 그렇게 이상한 땅에 그 시기에 나타났냐. 지금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했을 때 나타났으면 더 좋았지 않겠느냐라면서요. 그리고 도데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했느냐 계속 질문합니다. 


JCS의 중심 주제라 할 수 있는 질문이지요. 도데제 예수가 왜 그랬는지 알고 싶다는 겁니다. 소란스럽고 가벼운 분위기의 곡이지만 던지는 질문은 묵직합니다.


#23. 십자가에 매달림 (The Crucifixion)


망치소리와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리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예수의 부활을 보여주지 않는 JCS에서는 마지막 장면으로, 십자가에서 고통 속에 죽어간 예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일곱마디의 말을 했습니다. 가상칠언이라고 하지요. JCS에서는 앨범에 따라 나오는 말이 다릅니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여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의탁하나이다” 이 셋은 항상 등장합니다. 어떤 앨범에는 “내 어머니는 어디 있느냐,”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등의 다른 말도 나옵니다.


#24. 요한복음 19장 41절 (John Nineteen Forty One)


JCS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쓸쓸한 곡입니다. 이 곡의 제목인 요한복음 19장 41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그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매장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습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무덤에 묻힘을 말합니다. 


73년도 영화에서 이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이 영화는 배우들이 대형버스를 타고 촬영장소에 도착하면서 시작합니다. 영화 속의 영화 같은 설정이지요. 하지만 마지막 배우들이 버스를 타고 돌아갈 때는 예수역을 맡은 테드 닐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동산 위에 십자가가 남아있지요. 


참고로 JCS에서 부활을 다루지 않았기에 초창기에는 기독교가 JCS 공연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빛나는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공연을 마치는 식으로 어느 정도의 타협점을 찾은 것 같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크리스찬의 JCS 사용법'에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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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4. 06:55
이 블로그에 제 오디오 시스템을 소개한게 벌써 2년반이 넘었네요. 전 작년이라고 생각했는데 ㅡ.ㅡ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사를 하면서 다 작은 집으로 들어갔기에 전처럼 아늑하게 음악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TV를 비롯 모든 시스템을 한군데에 집중하려다 보니 복잡해졌습니다.

프리앰프가 고장이 났는데 여기는 수리비가 워낙 많이 나오는 곳이라 핑계 낌에 ^^ 빈티지 인티앰프를 하나 구입했습니다. 빈티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마란츠가 마란츠였을 때"라고 말하는 시기에 만든 제품중 하나입니다. SR 5100이라는 모델인데 '80 ~ '82년에 생산했다고 하네요.



거실에 불끄고 음악을 들으며 바라보는 리시버의 불빛은 사진보다 더 멋집니다 ^^ CD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시절 LP가 음악 감상의 기준일 때 만들어진 거라 생각해서 그런지 LP를 들을 때 더 잘 어울립니다. 그게 빈티지의 매력이겠지요. 소리보다는 음악에 집중하게 만드니까요.

오디오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업자가 전체적으로 수리하고 판 제품을 $65에 구입했습니다. 두시간 발품을 팔긴 했지만 득템한 기분입니다 ^^ 소리에 아쉬움이 없다보니 고장난 프리앰프를 아직도 안고치고 있지요.


남는 파워앰프는 일하는 공간에 두고 북쉘프 스피커를 연결해 피시파이를 만들었습니다. 사실 음악은 이 시스템을 통해서 훨씬 많이 듣습니다. 랩탑에 저장된 파일중 선택만하면 되니까 훨씬 편하게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성격탓인지 어느정도 되었다 싶으면 더 이상 욕심이 안생깁니다. 소리는 이 정도면 충분하기에 음악을 즐기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 오디오파일은 안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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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8. 15:20
몇달전 iMac님이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한 포스팅을 올린 것을 봤다. 클래식을 몇년째 듣고 있지만 아직도 초보나 마찬가지라 모르는 곡도 많고 모르는 연주자도 많다. 이 곡도 당시에는 몰랐던 곡이다. 찾아보니 4대 바이올린 협주곡 중 하나라기에 나의 무지함에 탄식했다는. 오늘 갑자기 생각이 나서 가지고 있는 전집류에 혹시 있나 찾아봤더니 몇개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씩 듣고 있다. 


처음 들은 연주는 DG111 전집에 들어있는 데이비드 오이스트라흐가 드레스덴 스타츠카펠레와 연주한 1954년판. 이곡은 모르는 곡이라 생각했는데 앞부분이 귀에 익어서 반가웠다. 바이올린의 경우는 경적적인 것보다는 아름다운 선율을 좋아하는데 이곡이 그렇다. 좋아하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처럼. 1악장을 올리고 싶지만 워낙 길어서 가장 짧은 2악장을 올린다. 서정적이고 쓸쓸한 분위기가 가을에 맞을 것도 싶다 ^^  


더 찾아보니 브릴리언트의 러시안 레전드 박스셋에서 레오니드 코간의 연주를 찾았다. chateau님의 글에서 언급한 그 연주자. 러시아 창고에 잠자고 있던 엄청난 양의 음원이 개방화를 통해 소개가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좋은 연주들이 묻힐 수도 있었다는.  


처음 제대로 들은 곡이라 두 사람의 연주를 비교하긴 무리겠지만 오이스트라흐가 좀더 따듯한 느낌이 난다고 해야할까. 둘다 대단한 연주자라 누가 더 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미리 본 감상평이 선입견을 준 걸지도 모르겠다. 듣다보면 나만의 느낌이 생기겠지.

유명한 작곡가와 알려진 연주자만 찾아서 들어도 아직 들을 곡들이 너무 많다. 보물을 계속 찾아내는 느낌. 음악을 통해 생긴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추가: 어디에서 들었나 조금 더 찾아보니 답이 나왔다. 노다메 칸타빌레 유럽편에서 나왔었다. 워낙 알려진 곡이라 다른 곳에서도 들었겠지만 인상에 남게 한건 확실히 노다메일거라는 ^^ 하긴 내가 클래식을 듣게 된 중요한 이유중 하나가 노다메 칸타빌레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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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21. 04:12



고등학교 때부터 이선희를 좋아해왔습니다. 이선희 앨범은 다 있는데 가장 좋아하는 것은 5집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산 이선희 앨범이 5집이었던게 주 원인일듯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12집을 많이 듣게 됩니다. 오늘도 12집을 들으며 학교에 오던 중 한노래가 유난히 귀에 들어오더군요.


My Life라는 노래입니다. 12집 타이틀이 My Life이니 메인곡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2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곡은 이별소곡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곡이 좋아 오랜만에 음악을 나눕니다.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이곡은 라이온킹에서 영향을 받은 곡이 분명합니다. 멜로디도 그렇고 가사 내용도 그렇죠. 심바가 쫓겨난 후 성장한 후 아직 돌아가지 못한 그때쯤 정도 같네요. 이 정도면 저작권에 영향을 받지는 않는지 사용료를 지불했는지 궁금해지더군요. 직업병의 시작인가 봅니다 ^^



밀림 속을 뛰노는 아기 사자의 천진스런 맑은 눈빛은 
세상과 욕심 앞에 자유로웠던 시절 어릴적 내 모습 닮아있죠
살아남는 법들과 적을 배우며 그들이 강인해질 때
난 쉽게 포기하며 또 쉽게 기대며 더욱 나약해져 갔을 뿐
But this is my life, this is my soul
거친 세상 속에서도 당당하게 맞서 나가야죠
But this is my life, this is my soul
꿈꿔왔던 모든 것은 이뤄진다는 걸 믿어야죠

산기슭에 눈덮힌 겨울나무의 쓸쓸하게 야윈 모습은
나 홀로 세상 끝에 버려진 듯 했던 어제의 내 모습 닮아있죠
기다리는 지혜와 희망 속에서 그들이 봄을 맞을 때
난 아직 세상 끝에 그대로 남아서 그저 눈물만 흘렸을 뿐
But this is my life, this is my soul
거친 세상 속에서도 당당하게 맞서 나가야죠
But this is my life, this is my soul
꿈꿔왔던 모든 것은 이뤄진다는 걸 믿어야죠

내 앞의 산은 여기 펼쳐져 있죠
그 누구도 지난 흔적 하나 없는 눈길처럼
But this is my life, this is my soul
거친 세상 속에서도 당당하게 맞서 나가야죠
But this is my life, this is my soul
꿈꿔왔던 모든 것은 이뤄진다는 걸 믿어야죠

 


2011. 9. 16. 13:45
JCS는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광복절에 해당하는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바로 직전부터 시작하지요. 지방에서 시작한 예수 운동은 이스라엘 전체에 알려져 있는 상태였고 그에 대한 기대는 잔뜩 커져있었습니다. 혁명가는 그를 통해 로마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를 바라고, 병자들은 병을 고치기 바라고, 어떤 이들은 그를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라 믿고 따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층은 세부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식민지배하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와 그의 군사들. 이스라엘의 왕인 헤롯. 그리고 제사장을 포함한 종교세력. 식민지라고는 하지만 워낙에 이스라엘 민족이 별나다 보니 총독도 종교세력의 눈치를 살짝 보는 상황이었지요. 

JCS가 뮤지컬이다 보니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군데군데 배경을 알고 보면 더 이해가 잘되는 부분이 있지요. 

JCS는 2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곡에 이어 유다의 불만이 1막을 열고 마지막은 유다가 배반을 결심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1막의 중심은 유다라 할 수 있지요. 2막의 시작은 최후의 만찬입니다. 마지막은 예수의 가상칠언과 무덤을 상징하는 음악입니다. 2막의 중심은 예수입니다. 

앨범에 따라 23개에서 29개의 트랙이 있습니다. 오리지널 앨범은 23개의 곡이 담겨있는데 이후 하나가 추가되었습니다. 트랙의 갯수는 달라도 같은 곡들을 합쳤다 나누었다 하는 것이기에 곡 소개는 오리지널+1로 하겠습니다. 곡의 내용과 감상포인트를 적어봅니다.

1막

#1. 서곡 (Overture)

서곡은 낮게 깔리는 배경음 위의 기타 솔로로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이내 격정적인 소리로 바뀌죠. 멜로디는 극의 후반부에 나오는 '빌라도의 재판'과 같습니다. 전체에 흐르는 갈등을 이 곡에 담았다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기타를 좋아하기에 이 곡도 기타를 위주로 듣게 되더군요.

#2. 그들 마음 속의 천국 (Heaven on Their Minds)

제자들과 군중들이 예수의 곁에서 환호를 할 때 멀리 떨어진 유다는 자신의 불만을 노래합니다. 처음에는 소박하게 시작한 운동이 사람들이 예수를 신의 아들로 메시야로 여기며 변질되어 간다는 불만이지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이렇게 노이즈를 만든다면 이를 이용해 로마가 자기 민족을 박해할 수 있다는 민족의식이 주요인입니다. 천국에 대한 지나친 생각이 (Too much heaven on their minds) 문제를 그르친다고 경고하지만 아무도 유다의 경고를 듣지는 않습니다.

첫 노래이고 솔로 곡이기에 유다에게 가장 중요한 노래입니다. 유다의 특성이 어떤지 알 수 있는 곡이지요. 근심이 가득한 유다도 있고 분노가 가득한 유다도 있습니다. 정답은 없지만 종종 무심하게 노래만 하는 유다도 있습니다. 감정이 중요한 노래이기에 감정이 없는 유다는 낙제감이지요.

#3. 무슨 일이죠; 이해할 수 없어 (What's the Buzz; Strange Thing Mystifying)

제자들은 예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냐고 물어봅니다. 왜 내일 일을 걱정하냐? 오늘에 집중하라고 말하지만 제자들은 계속 언제 예루살렘에 올라가냐고 물어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가 왕이 될거라 믿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를 씻기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만족한 예수는 오직 마리아만 필요한 걸 준다고 말할 때, 유다가 나섭니다. 창녀 출신인 마리아와 어울리는 건 예수의 적에게 좋은 미끼라구요. 예수는 누구 하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화를 내며 떠납니다.

이 곡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세가지 유형의 무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를 따르며 그를 통해 누릴 영화를 기대하는 제자들. 뭔가 잘못되어 간다며 불만을 가진 유다. 그리고 오로지 예수 개인의 평안함만을 바라는 마리아입니다. 제자들, 유다, 그리고 마리아마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동상이몽을 꾸는 그들의 마음이 이 곡 하나에 표현이 됩니다. 예수의 성격도 드러나지요. 어떤 예수는 처음부터 화를 냅니다. 어떤 예수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드러나구요. 더불어 제자들의 하모니도 중요합니다. 이들이 잘 할수록 예수, 마리아, 예수가 살아나니까요.

#3.5. 그래 결정했어 (Then We are Decided)

어떤 앨범에는 이 곡 다음에 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예수 때문에 걱정하는 가야바에게 부하 안나스는 예수는 광신자들의 리더일 뿐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가야바는 로마 때문에 걱정된다고 해결책이 필요하다며 공의회에 겁을 줘 힘을 합쳐 예수를 대적하게 하자고 모의를 꾸밉니다. 

#4. 다 잘 될거예요 (Everything's Alright)

마리아가 예수의 머리와 발에 향유를 뿌리며 다 잘 될꺼니까 오늘은 푹 쉬라고 합니다. 그걸 보던 유다가 딴지를 걸지요.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발에 낭비를 하냐.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게 더 중요하지 않느냐하는 거죠. 이에 예수는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항상 있으니 너희가 도와주면 되지 않겠냐. 내가 갈 때 너희가 많이 슬플테니까라구요.

예수, 마리아, 유다의 두번째 대화입니다. 여전히 다 잊어버리고 쉬기만을 바라는 마리아와 이를 못마땅해하는 유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답답함이 반복됩니다. 개인적으로 What's the Buzz와 비슷한 갈등을 가지고 있기에 굳이 나눌 필요가 있나 생각하는 곡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중요한 노래지요. 얼마나 예수에 대한 사랑을 담아 감미롭게 노래하느냐가 관건입니다. "내가 갈 때 너희는 후회할거야 (You will be lost. You will be sorry when I'm gone)"하는 부분도 예수역 맡은 배우의 연기력이 잘 들어나는 부분입니다. 

#5. 예수는 죽어야해 (This Jesus Must Die)

공회원들이 모여 예수와 따르는 무리들 때문에 고민을 합니다. 물리적 행사도 없고 특별한 슬로건도 없는데 온 무리가 따르며 주목하는 예수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거죠. 이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나타나 이대로면 한 사람 때문에 민족 전체가 위험하다고 근본적으로 제거해야한다고 겁을 주지요. 그리고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가야바, 안나스, 그리고 다른 공회원들이 주고 받는 대사들이 재미있습니다. 가야바(베이스)의 굵은 목소리와 안나스(테너)의 간교한 목소리의 조합이 중요하지요. 특히 가야바는 중요한 악역입니다. 2000년 영화의 가야바처럼 멋진 저음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가야바도 있습니다.

#6. 호산나 (Hosanna)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합니다. 군중들은 환호하며 예수를 무등에 태웁니다. 옆에 있는 가야바는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라하지만 예수는 그래봐야 소용없다. 이들이 조용하면 돌들이 소리칠거다 말하지요. 군중들은 환호하며 예수에게 자신들과 같이 싸울 수 있는지 자신들을 위해 죽을 수 있는지를 물어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군중들의 시각을 보여주는 곡입니다. 당시 시대 상황을 보면 전에도 여러명이 메시야일거라는 기대를 안고 예루살렘 중앙 무대에 등장했다가 사기꾼으로 판명돼 십자가에 매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의 등장은 모든 이들을 흥분시켰고 백성들은 호산나(나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나귀를 타고 오는 예수를 맞이하였습니다. 73년 영화에 나오는 '우리를 위해 죽을 수 있나요'라는 외침에 얼굴이 굳는 예수의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의 관계를 잘 드러냅니다.

#7. 열혈당원시몬 / 불쌍한 예루살렘 (Simon Zealots; Poor Jerusalem)

열두제자중 한명인 시몬은 성경에서 열혈당원이라 소개됩니다. 혁명가이죠. 그가 오만명이상의 군중이 예수의 편이니 약간의 자극만 주면 로마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할 수 있다고 예수에게 앞에 나서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예수가 영원히 권력과 영광을 가질 것이라 외칩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시몬도 모인 군중도 로마인도 이스라엘 백성도 열두제자도 진정한 권력과 영광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말하죠. 그리고 멸망하게될 불쌍한 예루살렘에 대한 슬픔을 표현합니다. 

열혈당원 시몬 부분은 이 뮤지컬에서 가장 신나는 부분입니다. 약간 경박하기까지 한 시몬의 열기를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하지요. 그에 반해 예수의 답변은 갑자기 조용해집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안타까움과 슬픔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8. 빌라도의 꿈 (Pilate's Dream)

이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명하게 될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 빌라도가 등장해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합니다. 많은 군중이 한명을 놓고 칭송하다가 그를 욕하고 그를 죽이라고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지요. 결국 모든 이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게 되는 모습을 봅니다.

JCS에서 가장 표현하기 힘든 인물이 빌라도일겁니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이면서도 예수를 살리고자 노력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정치역학에 따른 해석이 있지만, JCS에서는 빌라도가 예수에게 느꼈을지 모를 인간적 연민에 초점을 맞춥니다. 다소 이해하기 힘든 빌라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미리 그가 꿈을 꾼것으로 가정하고 복잡한 그의 심경을 보여주는 장면이기에 배역 맡은 이의 연기력이 중요합니다. 

#9. 성전 (The Temple)

당시 성전은 장사하는 이로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환전도 하고 제사를 위한 가축도 팝니다. 과장 약간 보태어 무기도 팔고 매춘도 합니다. 이를 본 예수는 채찍을 들어 장사꾼들을 좇아냅니다. 분노한 그에게 장사꾼들은 물러나지만 이를 바라보는 제사장들은 예수를 죽일 결심을 굳히지요. 유다는 정말 일이 잘못되어 가는구나 생각하구요. 이 일이 있은 후 혼자 걸어가는 예수는 지난 삼년이 삼십년 같다며 탄식을 합니다. 하지만 또 수많은 병자들이 그에게 고쳐달라 몰려들지요. 그들 속에 갇힌 예수는 나는 혼자인데 너희들은 너무 많다며 나를 떠나달라 외칩니다.

당시 성전에는 제사장이 확인해준 결점 없는 가축과 흠 없는 지폐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시작은 율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욕심과 이권이 개입되면 금새 타락하게 되지요. 이때 장사꾼들의 뒤에는 종교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며 성전을 청소한 예수의 분노는 '거룩한 교회에서 시끄럽게 드럼이 뭐냐'는 꼰대식 성화가 아니라 부패한 종교권력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신경질적이거나 폭력적인 것이 아닌 거룩한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합니다. 그 분노는 바로 지쳐버린 예수로 연결되지요. 병자들에 대한 안타까움 속에서도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병자 나아가 세상 부조리에 대한 탄식까지 느껴지는 곡입니다.

#10. 다 잘될 거예요 (Everything's Alright Reprise)

지쳐 돌아온 예수의 잠자리를 챙겨주며 마리아는 다시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자라는 말을 합니다. 짧은 곡이고 이전에 나온 곡의 반복입니다.

#11. 어떻게 사랑할지 모르겠어요 (I Don't Know How to Love Him)

마리아는 예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며 힘들어 합니다. 항상 남자를 만나면 관계를 주도했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준 적이 없는데 예수는 다르다는 거지요. 그 감정을 사랑이라 생각하지만 그 이상의 경외감 두려움도 존재합니다. 그냥 도망쳐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그를 사랑하지만 도데체 어떻게 사랑해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JCS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이 이 곡일 겁니다. 사라 브라이트만도 불렀지요. 노래를 부르는 마리아의 마음은 정말 복잡합니다. 마리아의 마음 속에 아직 예수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JCS에서의 마리아의 마음은 신앙은 아닌거지요. 그럼에도 두려움도 있고 경외감도 있고. 그렇기에 단순한 사랑 노래로 부르면 원래 의도가 안나타납니다.  

#12. 평생 저주받을 / 핏값 (Damned For All Time; Blood Money)

지금까지의 팽팽한 균형이 깨집니다.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기로 결심하기로 가야바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은 민족을 위험에서 구하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강변하지요. 나의 행동이 평생 저주받을 것이 아니라고 인정해달라고 울부짖습니다. 가야바는 예수가 혼자 있을 때만 알려달라며 은화 삽십냥을 제시합니다. 피값은 싫다며 돌아서는 유다에게 안나스는 피값이 아니라 정당한 수고비며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일을 생각하라 합니다. 그 말에 넘어간 유다는 목요일밤 겟세마네에서 혼자 있을 예수를 체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잘했다 유다'라는 코러스와 함께 1막이 막이 내립니다.

배반하는 유다의 마음 그럼에도 이 일로 인해 자신이 비난받을까 두려워하는 비겁한 모습이 같이 담겨있습니다. 유다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곡이지요. 피 값은 싫다고 하는 유다를 살살 말로 설득하는 가야바 안나스의 간교함도 잘 살아있어야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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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포스팅 하나에 전체를 다루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양이 늘어납니다. 학기가 시작해서 시간도 부족하구요. 그래서 일단 1막만 다룹니다. 후반부 2막도 열심히 써서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


 


2011. 8. 26. 15:43
전 제가 덕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혹시 "너 덕후 맞거든"이라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제 평상시 삶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 그래도 스스로 '살짝덕후'질을 한다고 인정하는게 한두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 수퍼스타' 영어 발음으로 '지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라는 뮤지컬입니다. 앞으로 몇번에 걸쳐 이 뮤지컬에 대한 포스팅을 하려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르는 "I don't know how to love him"입니다. 이 뮤지컬을 모르는 사람도 이 노래의 멜로디는 한두번 들어봤을 겁니다. 워낙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리워졌으니까요. 이 배우는 역대 마리아중 최고라 여겨지는 이본느 일리만입니다.

Jesus Christ Superstar(JCS)는 뮤지컬계의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작곡하고 팀 라이스가 작사를 했습니다. 앤드류 로이디 웨버는 여러개의 명작을 만들어냈지요. 캣츠, 오페라의 유령, 그리고 에비타 등이 유명하지요. 그중 여러 작품의 작사를 팀 라이스가 했습니다. 만났다 헤어졌다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뮤지컬 역사에 기록될 명콤비라 할 수 있지요.

웨버와 라이스는 1965년에 첫 작품 "The Likes of Us"라는 뮤지컬을 만들었지만 상영은 못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만든게 "요셉과 드림코트"라는 작품입니다[각주:1]. 이 뮤지컬은 크게 히트치지는 못했지만 두사람의 이름을 알리는데는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에 힘입어 만든 세번째 작품이 바로 JCS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JCS를 뮤지컬이나 영화로 처음 접했겠지만, 이 작품은 1969년에 영국에서 뮤지컬 컨셉의 록오페라 앨범으로 먼저 소개되었습니다. 미국에는 1970년도에 발매되었구요. 왼쪽 앨범이 초기발매된 커버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재발매된 앨범을 가지고 있는데 오른쪽의 하얀색입니다.  



70년판 JCS의 예수역은 딥퍼플의 보컬이었던 이언 길리언입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70년판이 JCS의 결정판이라 하지만 그건 단지 오리지널판에 대한 동경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여러 음반에 대한 비교는 나중에 따로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이 음반은 큰 성공을 거두었죠. 1971년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시작되기전 수많은 단체들이 이 작품을 올리려다 저작권 문제로 금지당했다고 하더군요. 이후 최근까지 JCS는 전세계에서 끊임없기 공연되었습니다. 1973년 2000년 두번에 걸쳐 영화화되었고 수십종의 음반이 발매되었죠.

한국에 들어온 건 80년대 초반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중학생때 고등학생이던 막내누나가 단체관람으로 공연을 보고 왔고, 당시 유다역을 맡았던 김도향씨가 티비에 나와서 수퍼스타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직접 본건 84년 고1때였습니다. 추운 겨울날 혼자서 봤지요. 당시 저희 집 상황이 뮤지컬을 보러갈 형편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표를 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직장들어간 누나를 졸랐을 겁니다 ㅡ.ㅡ

아이러니한건 해외에선 JCS의 초연때 예수의 부활이 없는 것과 신의 아들이 아닌 인간적 예수를 담았다는 이유로 기독교인들이 반대를 했는데 당시 국내에서는 다수의 기독 연예인들이 이 뮤지컬에 출연했다는 겁니다 [각주:2]^^ 제가 본 공연의 배역은 예수-이종용, 유다-추송웅, 마리아-윤복희, 헤롯-곽규석, 빌라도-유인촌이었습니다. (네. 그 유인촌 맞습니다.) 유인촌은 빌라도 역을 꽤 오래 맡았습니다. 그때 공연은 아니겠지만 찾아보니 이런 사진도 있네요. 참 ... 이땐 좋아했었는데 말이죠. 사람은 오래 지켜봐야 하나봅니다 ㅡ.ㅡ


아직도 '유다의 죽음'을 부르며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추송웅씨의 모습이 어렴픗이 기억이 납니다. 정말 추송웅씨는 대단했습니다. 다른 분들의 노래와 연기도 좋았구요. 사진을 찾고 싶지만 검색하니 안나오네요. 혹시 가지고 계신 분 공유좀 부탁합니다. 

아쉽게도 무대에서 JCS를 본건 이 공연이 유일합니다. 노력이 부족했다고 해야겠지요. 뉴욕 옆동네인 보스톤(네시간 거리)에서 12년을 살았는데 한번은 무대에서 볼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버킷리스트까진 아니지만 브로드웨이에서 JCS를 보는게 작은 소망중 하나입니다.



대신 영화를 많이 봤습니다. 테드 닐리가 예수역을 맡은 73년도판은 최소 100번은 본 듯합니다. 수입이 되지 않아 고등학교 시절 청계천에 가서 불법 비디오를 구했습니다.[각주:3] 이 비디오는 하도 봐서 지금은 재생이 안되고 DVD로 다시 구입을 했지요. 2000년판도 20번 정도 본 것 같네요. 첫번째 사진이 1973년 버전입니다. 두번째는 2000년 버전. 분위기가 많이 다르죠? 그리고 여러 버전의 레코드를 아주 ^^ 많이 들었습니다. JCS 팬들이 모두 그렇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속에서 뮤지컬 전체를 재연해 낼 수 있을 정도로요. 

왜 이렇게 이 뮤지컬을 좋아하냐구요? 글쎄요. 노래도 좋고 연기도 좋고 메시지도 좋고 다 좋습니다. 크리스찬들은 물을 겁니다. 이 뮤지컬이 성서적인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뮤지컬이 크리스찬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럼요.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포스팅도 하도록 하지요. 

마지막으로 역대 최고의 예수라 이야기되는 스티브 발사모의 겟세마네입니다. 아쉽게도 공연 실황이 아니라 분위기는 약간 떨어집니다. 예수의 옷이 너무 깨끗하죠. 하지만 노래는 역시 최고 ^^



 
  1. JCS가 한국에 알려진 초창기에는 웨버와 라이스가 만든 첫 뮤지컬이 JCS이고 두번째로 만든게 요셉과 드림코트로 알려졌습니다만 최근에 알아보니 요셉과 드림코트를 먼저 만들었더군요. [본문으로]
  2. 검색하면서 발견했는데 당시 예수역을 맡았던 이종용 목사의 글에서 공연전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던 당시 풍습대신 얼마전 소천하신 하용조 목사가 예배를 드렸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한국에서는 이 뮤지컬을 굉장히 기독교적이라 생각했습니다. [본문으로]
  3. 당시 청계천에 영화를 구하러 가던 주 목적은 다른 장르 때문이었지요. 전 그 장르는 선호하지 않아서 하나도 사지 않았다는 것을 소심하게 밝힙니다 ^^ [본문으로]


2011. 5. 6. 21:57
"나는 가수다"를 처음 봤을 때 떠오른 단어는 '진검승부'다. 그 세계의 상위 1% 아니 0.1%에도 들어 갈 수 있는 실력자들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청중들 앞에서 실력을 겨루고 순위가 바로 매겨진다. 한차례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자신의 이름을 건 제대로 된 승부다. 어설픈 퍼포먼스는 허점을 만들 뿐이고, 추락으로 이어지는 매순간 긴장해야 하는 피가 마르는 대결이다.   

사람들이 "나는 가수다"에 주목하는 심리엔 예전 목숨 걸고 싸우는 검투사를 지켜보던 로마인들의 마음이 없지는 않을 거다. 자존심이 목숨을 대치했을 뿐. 어떤 이에게는 목숨만큼 소중한 '이름'을 걸고 치루는 승부이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자리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떨림과 긴장 속에 살짝 기쁨이 느껴진다.

방송 내내 반복되는 "떨린다" 혹은 "잠을 못잤다"라는 말이 과장처럼 들린다. 하지만 어쩌면 보여지는 것보다 그들은 더 긴장할지도 모른다. 속이 바짝 바짝 마르겠지. 어떤이는 이를 보고 측은하다 한다. 그래도 가수로 성취를 이룬 그들이 왜 구경거리에 나오느냐는 거다. 맞는 말일지도. 하지만 다른 가수의 비판은 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자리에 설 수 없는, 스스로 경쟁이 안되는 것을 아는 이들의 변명처럼 들리는 거다. 

이소라의 "잘 하는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은 '나는 가수다'를 한마디로 정리해준다. 최선을 다 해본 사람은 땀이 주는 만족감을 안다. 인정 받았기에 어쩌면 안주하고 있었을 그들이 경쟁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는 차라리 축복이다. 출연한 가수들도 그 때문에 행복해 하지 않을까. 물론 따라오는 대중적 인기와 경제적 수익도 즐거움을 주겠지만 ^^

출연한 가수들이 다른 이의 공연을 보면서 보이는 반응을 지켜보는 것은 또 하나의 재미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서로 인정하며 즐기며 비추어 스스로를 돌아보는듯한 모습은 나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저렇게 치열하게 살아본게 얼마나 되었는지. 좀더 긴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즐겨 봤던 것이 '위대한 탄생'이다. 나가수가 성공한 이들이 '이름'을 걸고 하는 승부라면 위탄은 그 '이름'을 얻고자 하는 이들의 승부다. 고수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고의 자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정신없이 휘두르는 또 하나의 '진검승부'여야 하는 자리다. 매주 멘토들의 가르침에 따라 성장해가는 멘티들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생방송을 시작하면서 그 매력을 잃어버렸다. 시합에 나간 선수들은 아직 최선을 다해 승부를 하는데 심판들이 영 아니다. "너는 얼굴도 잘 생겼고 집안도 좋잖아. 그데 쟤를 봐. 어디 가서 내세울게 있겠어. 그러니 너가 양보 좀 해." "너 이사범 제자라며. 걘 뭐가 잘났다고 맨날 비판을 하는 거야. 김사범 봐. 말마다 힘이 되잖아. 사람이 좀 그래야지." 선수들은 진검으로 승부를 하는데 심판은 노래 말고 다른 것으로 평가를 한다. 실력은 둘째다. 드라마를 원하지 노래 잘하는 가수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은 찌질하게 살더라도 외인구단 세명만큼은 성공했으면 하는 대리만족을 원하는 것 같다. 

어디를 가든 완벽하게 정당한 평가는 없다. 사람의 모든 것을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그렇다면 다른 무엇보다 실력이 제대로 인정받는 것을 보고 싶다. 노래로 평가하겠다는 프로그램들 아닌가. 잘 하는 사람들은 서로 자극하며 더 발전하는, 배워야할 사람들은 앞선 이를 보며 성장해가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 비록 방송이지만 '잘 하는 사람들이 더 잘 하는" 것을 보고 싶은 거다. 실력있는 사람들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 한계를 극복할 때, 그때야 발전이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결론은 ... '나는 가수다'는 고맙고 '위대한 탄생'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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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30. 02:54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 꼭 들르게 되는 사이트 중 하나가 고!클래식 아닐까 합니다. 줄여서 고클이라고들 부르죠. 요즘 고클의 오디오파일 게시판에 실용/비실용 논란이 한참입니다. 전세계 어디든 오디오 사용자들 사이에 항상 있어왔던 논쟁이라 또 그러나 싶었지만 이번에는 꽤 오래 가네요. 제가 아는 분야의 논쟁이라면, 숟가락 하나 올려놓고 싶은 충동이 드는 성격인지라 ^^ 저도 그 게시판에 글 하나 올리면서 기록 목적으로 이 블로그에 복사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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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5일 가입한 이후에도 몇번 이 게시판에서 실용/비실용 논쟁을 봤습니다. 오디오 하시는 분들은 전세계 어디든 같은 논쟁을 하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이번에는 좀 오래가네요. 논쟁이 과격해지다보니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도 나오고 상대방 주장과는 상관없는 논지로 반박하는 것도 보입니다. 오디오보다는 음악에 더 중점을 두고, 또 이른바 하이엔드 제품을 많이 접해보지도 않았지만 경험과는 상관없이 사실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논쟁에 글 하나 더해봅니다. 

오디오 객관주의/주관주의 
실용오디오 사이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실용주의/비실용주의라 불리우는 이 논쟁을 영어권에서는 객관주의/주관주의라 부릅니다. 두가지 다 논쟁의 초점을 명확히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비실용주의'라는 용어가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주장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느낌을 주기에 저는 객관주의/주관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걸 선호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갈 거는 객관주의나 주관주의 진영 안에서도 상당한 의견차가 있다는 겁니다. 객관주의가 극단으로 가면 '오디오의 특성은 제품과 상관없이 모두 같다'가 되고 주관주의의 극단으로 가면 '어느 제품이든 모두 현저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가 됩니다. 이런 양진영의 극단적 주장을 놓고 논쟁을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건 마치 극보수의 기독교인이 이슬람 원론주의자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 극단적 주장을 제하고 나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는 보통 하나의 가설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 가설은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가진 비슷한 스펙의 오디오 제품간의 차는 사람의 귀로 구별할 수 없다'입니다. 짚고 넘어갈 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비슷한 스펙'간을 비교하는 것과 '사람의 귀로 구별할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객관주의자가 '모든 오디오가 같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스펙이 다른 제품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스펙이 다르면 제품간의 차이는 있거든요.  
 
블라인드 테스트를 왜 하는가?
스테레오파일 같은 잡지를 보면 가끔 제품의 주파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 나옵니다. 최근에는 지터 문제를 놓고 다른 주파수 특성을 보여주면서 어떤 제품이 특성치가 좋은지 보여주더군요. 그렇게 계측기를 가지고 비교를 하면 제품간의 다른 특성은 쉽게 '증명'이 됩니다. 그렇기에 '제품간의 차이가 없다'라는 가설을 놓고 이야기하면 토론이 진행이 안됩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증명 혹은 반증하려는 가설은 '제품간의 소리차이를 사람의 귀로 구별할 수 있나'하는 겁니다. 블라인드 테스트 자체는 중립입니다. 과학이라는게 그렇거든요. 가설을 하나 세우면 실험을 통해 증명하거나 혹은 반증해야합니다. 반증가능성이 없으면 과학이 아니지요.
 
실험 모델링을 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어떤 것이 독립변수인지 어떤것이 비독립변수인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독립변수의 수를 최소한으로, 이상적으로는 하나로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가 서너개 되어버리면 결과를 도저히 분석해낼 수 없습니다. 
 
블라인드 테스트는 독립변수의 수를 하나로 줄이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테스트하고자 하는 시스템 이외의 모든 것을 같게 합니다. 케이블을 테스트한다면 이외 모든 것은 같은 제품을 씁니다. 소리의 크기도 같이하고 스피커의 위치도 동일하게 유지합니다. 제품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어떤 제품을 사용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소리만으로 판단하게 하는 겁니다. 일부 글에 눈으로 보지 않고는 (unless through sighted test) 소리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건 정당한 테스트가 아니지요. 보지않고 구별할 수 없는 것을 보고서 구별한다는 것은 소리 이외의 다른 변수가 이미 개입된 것이니까요.  

블라인드 테스트의 종류 
오디오 업계에서 사용하는 블테는 두가지입니다. 그냥 블라인드 테스트라 하면 실험자는 모든 상황을 알지만 답변하는 사람은 모르는 경우입니다. 실험자가 알면 혹시나 생길 외부요인마저 없애고자 사용하는 방법이 더블 블라인드 테스트(DBL)입니다. 자동 스위치를 통해 모든 사람이 어떤 시스템을 듣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테스트를 진행하는 겁니다. 
 
제품간 차이를 구별하기 위한 실험의 경우 답변은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AB방식과 '모르겠다'를 추가한 ABX방식이 있습니다. 선호도를 평가하는 경우는 테스트하는 제품만큼 답을 하게 될테구요. 

블라인드 테스트는 가치가 있는가? 
사실 이런 질문 과학이나 의학쪽 종사하는 분에게 하면 무식하다 욕먹습니다 ^^ 블라인드 테스트는 실험의 한가지 방법일 뿐이고 잘만 설계된다면 방법론에 합당한 실험입니다. 블라인드 테스트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건 실험을 통한 증명이라는 전제를 모두 부정하는 거지요. 그 주장은 종교가 되어버리는 거구요. 
 
오디오 업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폄하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밥줄이 달려있으니까요 ^^ 하지만 오디오 업체들이 블테를 사용안하느냐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캐나다의 National Research Council (NRC) 에서 스피커 업체들과 같이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습니다. 하만사의 블라인트 테스트 결과도 찾아볼 수 있구요. Good Sound지의 Doug Schneider와 같이 블테가 좋은 오디오를 평가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하는 평론가도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블라인드 테스트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모든 블테가 효과적으로 설계가 된 것은 아닙니다. 답변자들에게 전혀 생소한 제품들을 사용한다든지, 시스템의 배치가 너무 엉망이라 테스트하고자 하는 제품들의 특성치가 다른 요인으로 인해 무시될 정도로 떨어진다든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답변자들이 듣는 훈련이 안되어 있는 이른바 '막귀'인 경우 실험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오디오 잡지들이 주로 공격하는 블테가 이런 실험들이지요. 반대로 제품간 차이가 없음에도 다른 요인으로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Radio & Television에서 1982년도에 한 프리앰프의 블테에서 고급제품에 한해 채널간 0.06dB의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두가지 제품을 쉽게 비교할 수 있었지요. 물론 두번째 실험부터는 이 차이를 없앴지만요.  
 
하지만 모든 블테가 다 엉망으로 설계된 것은 아닙니다. 찾아보면 잘 설계된 테스트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가보면 다양한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블라인드 테스트는 무엇을 증명/반증하는가? 
위에서도 말했지만 블테를 통해 증명/반증하고자 하는 가설은 '제품간 차이를 사람의 귀로 구별할 수 있는가?'입니다. 소리의 특성치는 계기 측정만으로 가능합니다. 블테의 결과를 놓고 보면 99% 이상 제품간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로 나옵니다. 스피커의 경우만 예외입니다. 케이블의 경우는 차이를 밝혔다는 테스트를 보지 못했구요. 50미터(50ft 인지 기억은 확실치 않습니다) 이상의 스피커 케이블은 대부분 쉽게 구별해냈다는 결과를 봤습니다. 블테라고 모두 구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
 
하지만 그 결과를 놓고 '제품간 차이가 전혀 없다'라고 확대해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TV를 사러 전자 매장을 가면 보통 여러제품을 놓고 비교하게 됩니다. 이렇게 눈 앞에 놓고 비교하면 구별이 쉽습니다. 어떤 제품이밝고, 어떤 제품이 더 녹색을 띠고 있고, 어떤 제품이 더 선명한지 쉽게 보입니다. 그래서 맘에 드는 것을 집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다른 집에 놀러가서 비교했던 다른 TV를 봅니다. 이때 두 제품간의 차이를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산 제품이 친구의 TV보다 밝은지 선명한지 알 수 있을까요? 백이면 백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것은 아니지만, 비교하는 대상을 동시에 들을 수 없는 오디오 블라인드 테스트의 특성상,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듣는 제품을 오래 들을 수록 이전에 들었던 것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기억상의 근거가 서서히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차이가 있더라도 구별할 수 없는 경우도 생깁니다. 따라서 블테 결과만을 놓고 제품간 차이가 없다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블라인드 테스트는 의미가 없는가? 
여기 게시판에 보면 사람의 귀는 오묘해서 블테만 가지고는 진정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라는 주장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렇기에 블테가 의미 없다는 것은 억지입니다. 그 주장은 소리 이외의 다른 요인이 반영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앞에서 제시한 하만사의 테스트를 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옵니다. 동일한 사람들이 동일한 조건에서 스피커 선호도 테스트를 했습니다. 블라인드 테스트와 보면서 하는 테스트를 둘다 했습니다. 실험자 모두 하만사에서 근무하는 이른바 듣기에 '훈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두 테스트의 결과는 현저하게 다릅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게 있습니다. 스피커의 위치를 바꾸어놓고 청취실험을 합니다. 이때 블라인드 테스트의 결과는 스피커 위치에 따라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보면서 하는 테스트는 스피커 위치와 상관없이 비슷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결국 어떤 제품인지 알면서 하는 테스트에서는 소리가 아닌 '스피커 자체에 대한 선호도'를 보여준다는 겁니다. 선입견이 그만큼 크게 작용하는 거지요. 또한 스피커 위치가 제품간 차이보다 소리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은? 
마지막으로 제 입장을 밝힌다면 저는 객관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험의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니까요. 일정 시간 넘게 듣고 있으면 구별할 수 없는 소리의 차이를 위해 몇백, 몇천씩 더 투자할 용의는 없거든요. 그보다는 더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공간이나 배치에 더 신경을 쓸 겁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시스템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 믿으니까요.
 
그럼에도 오디오가 꼭 소리가 다는 아니라는 것에 동감합니다. 좋은 오디오 시스템이 디자인도 괜찮고 내구성도 좋습니다. 들여다놓으면 폼도 납니다. 재력만 된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 없습니다. 이에 관해, 제가 음악을 다시 듣게되는데 가장 큰 공을 한, 현카피님의 을 소개합니다. 저는 인용한 문장처럼 제품간 차이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글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현카피님도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구별할 수 있을만큼 차이가 없다'는 것이 실험의 결과입니다.
 
만약 어떤 이가 "실제 맛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내가 청자잔으로 술을 마시는 건 내게 아주 우아하고 고급스런 느낌을 준다" 한다면 그건 심미주의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는 일이고, 누가 뭐라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청자잔이 실제로 화학적으로 작용하여 맛을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값비싼 청자잔을 무리해서라도 구입한다"고 한다면 이때는 누군가 "청자잔이 실제 당신이 마시는 술을 화학적으로(차이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바꾸어놓은 것은 아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상대의 심미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선택은 개인의 몫입니다. 그래도 많은 경우 제품간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지요. "과학적 사실은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독자성과는 별개의 문제"이니까요. 
그렇지 않고 믿는대로 종교적 주장을 되풀이 한다면 논쟁의 끝은 안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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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16. 00:15
어제는 오랜만에 아내와 같이 음악을 들었습니다. 분주하게 살다 보면 음악 하나 듣지 못하고 살 때가 많지요. 저야 음악을 좋아해서 항상 휴대용 기기를 들고 다니고, 잠을 줄이더라도 저만의 시간을 마련하는 편이지만, 아내는 아이들과 제 뒤치닥거리에 지쳐 그냥 잠들기 일 수입니다. 

열시가 넘어 정리를 마친 아내를 최근에 정리한 리빙룸으로 끌었습니다. 고장났던 앰프도 고치고 부러진 턴테이블의 카트리지도 갈았습니다. 가구들도 정리해 다시 울림이 좋은 공간이 되었지요. 

발라드가 듣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바로 떠오른 음반이 있었습니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음반 표지안에 들어가 한참을 못찼다가 얼마전 다시 발견해 반가웠던 음반입니다. 

유재하는 가수 활동을 하면서 이 음반 하나만 발표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한 그해 11월 교통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지요. 

"다시 돌아온 그대위해 내 모든 것 드릴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이 노래를 들으며 옛기억들을 떠올렸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 스무살이 갓 넘었었습니다. 아내는 고3이었구요. 아내가 그러더군요. 그때는 좋아했던 얼굴형, 머리 스타일, 성씨가 있었다면서 저와 겹치는 건 머리 스타일 하나뿐이라구요. 거기에 맞는 사람을 주위에서 찾으면서 즐거운 웃음을 나누었습니다.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작은 소망들도 나누었습니다. 더 자주 이런 시간을 가져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구요. 

제임스 딘이 영원한 젊음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유재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유재하를 들으면 젊고 어렸던 날들이 기억납니다. 매달 과외비를 타면 들르던, 이 음반도 거기서 샀을 것이 분명한, 동네 여고앞 음반가게도 생각납니다. 고민도 많았던 때고 꿈도 많았던 그런 시절. 꼭 좋지만은 않았던 그런 시절. "지난 옛 일 모두 기쁨이라 하면서도 아픈 기억 찾아 헤미이는" 건 "다시 못 올 지난 날"이기 때문이겠지요. 그 추억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요. 

오랜만에 그를 들으며 제 젊은 날도 기억해보고 또 앨범 한장만 남기고 사라져 간 그도 그리워해봅니다. 

유재하 ... 너무 빨리 사라져 버린 ... 참 아까운 사람입니다.

 



추신: 그나저나 "사랑하기 때문에"가 남기는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힘차게 흘러나오는 정화의 노래(건전가요)는 정말 깨더군요. 유재하로 더렵혀진 마음을 너무나 깨끗하게 씻어주었습니다 ㅡ.ㅡ 돌아보니 음반마다 저런 노래 하나씩 끼워넣어야 했던 그런 시대도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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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10. 14:44

The ear problem of Beethoven started before he composed 2nd symphony. He was famous as a pianist and composer. But he was not at the top. He was only 26. From that time, until he died at 57, he continued to struggle with the problem. As known, he was completely deaf when he composed his 9th symphony. When the symphony was premiered, “he had to be turned around to see the tumultuous applause of the audience; hearing nothing, he wept.”


Whenever I listen his 9th symphony, I wonder how it sounded to him. He couldn’t hear. It was not from outside. It must be inside of his mind. Vibration of violins. Thundering of timpani. Echoing of horns. What about all the voices? What was the sound he heard?


Recently I watched a performance of 9th symphony by Bernstein and combined orchestra from 6 countries to celebrate the fall of the Berlin Wall. Bernstein was 71. But still he was great. So much energy. He showed the music with his body. He “literally” jumped with joy several times. He died 10 months after this performance. I believe this concert is very close to what Beethoven heard in his mind.


With this beautiful song, I always think two old men. The one who was difficult to hear and the one who was difficult to breathe. But the body problem couldn’t pull away them from their music, their passion.


When you have something that you really love to do, it makes you happy. Nothing can stop you. What you hear in your mind decides what you do with your body.


It is clear that Beethoven and Bernstein, both heard the sound. I envy them. They are really lucky 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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