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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람 바라보기'에 해당되는 글 40건
2009. 5. 20. 13:46
날자보다는 요일에 더 신경을 쓰고 살 때가 있다. 요즘이 딱 그렇다. 어제도 월요일을 맞아 일주일의 계획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날자를 봤다. 5월 18일이다. 대학교 1학년 '...넘어 ...넘어'를 보고 그 믿겨지지 않는 역사에 울분을 토하던 때가 어느덧 이십여년이 흘렀건만, 5.18 그리고 광주의 의미는 매년 생생히 다가온다. 어쩌면 그 사건을 기억하며 자꾸만 작아지는 시선을 크게 만들고자 하는 내 무의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회적 모순은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있다는 것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파하는 자들은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거의 한달동안 관심을 끄고 있었던 한국 소식이 궁금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으며 '다음'을 열었다. 그리고 황석영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황석영, MB, 중도실용... 제목에 쓰여진 생소한 단어의 조합을 보며, 놀라기도 했지만 머리 한편에서는 '황석영 이 사람도?' 하는 나름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기사를 읽어보니 역시 그랬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구차한 변명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안 좋은 것 한가지는 존경하는 이들의 리스트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한때는 내 인생에 좋은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들이 어느날 보니 추한 모습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박성수가 그랬고, 김진홍이 그랬다. 하다 못해 조갑제도 내게는 고등학교 시절 '민은 졸이다'라는 책으로 대입을 위한 공부가 다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 사람이었다. 박홍, 김민석, 서경석, 김동길... 한때는 청년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치던 사람이다. 하물며 박찬종이나 이인제도 좋은 시선으로 본 적이 있다.

자신의 좋은 의도가 오해받고 있다는 황석영의 말은 자체로 역겹다. 자신의 발언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랐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완전 바보임이 분명하다. 소설가 황석영은 바보는 아니었던 것을 생각하면 추하게 늙었거나 늙어가며 멍청해진 것이리라. 하긴 '비명을 찾아서'라는 획기적인 작품을 썼던 복거일이나 '사람의 아들'의 이문열의 지금 모습을 본다면 황석영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지만.

세상 변해가는 것 모른체 하며 고집 부리라는 것은 아니다. 시대에 따라 유연함을 보일 수 있는, 그럼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멋있게 나이들어가는 그런 지식인이 보고 싶다. 아니다. 자신이 유치하다는 것도 모르고 어떻게든 뜨기위해 짖어대는 '변희재' 같은 인간을 보면 내가 너무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하다. 머지 않아 '지식인'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혐오단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을 지도 모르고.

참 지랄같은 세상이다.






2009. 1. 18. 03:54
#1.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변화의 속도를 이야기한다. 분야별 변화속도가 다를 때 생기는 충돌을 이야기하며 각 분야별로 변화의 속도를 매겼다. 미국을 기준으로 하고, '부'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는 가정을 잊지 않는다면 곰곰히 생각해볼만한 주제다.

100마일 - 가장 빨리 움직이는 비즈니스 세계가 100마일로 기준이다.
90마일 - 그 다음으로 바짝 붙어 움직이는 것은 의외로 시민단체이다. 시민단체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진다.
60마일 - 약간 거리를 띄고 가족이 있다. 동성결혼, 노년결혼등 가족의 형태는 한세대 전과 확연히 다르다.
30마일 - 비즈니스 세계에 비해 노동조합은 천천히 움직인다. 조합원의 비율에 따라 영향력도 줄어든다.
25마일 - 정부 관료조직과 규제 기관들은 코끼리처럼 버티고 자리를 지킨다. 복지부동이다.
10마일 - 학교. 움직이지 않는 학교를 현상 유지하기 위해 해마다 4000억원이 투입된다.
5마일 - 국제적 조직들은 더 느리다. UN을 비롯 반세기가 넘은 조직들이 변화없이 운영된다.
3마일 - 미국 정치 시스템은 30년대 대공황 시절 변화가 있은 후 변화없이 계속 유지되었다.
1마일 - 남이야 움직이든 제자리를 단단히 지키는 것은 바로 법이다. 예를 들어 은행법은 60년이 되었다.

#2.

이 글을 읽으며 한국 사회를 생각했다. 겉에서 본 한국은 어떨까? 미국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50마일의 정부 - 한국 정부는 빨리 움직인다. 갈수록 더 빨라지는듯 하다. 문제는 기어가 전진이 아니라 후진에 놓여져있다는 거다. 미네르바 체포 같은 기본원칙에 대한 건 말할 가치조차 없고, 최소한 국민이 '살려 달라' 외쳐대던 경제라도 잘 했으면 하는데 그것조차 답이 안보인다. 50조를 투입해서 한다는 녹색뉴딜은 결국 '시멘트'다. 기껏 한다는게 '땅파자는 거냐'라는 비판이 싫었는지 얼마전에는 '그린IT'에 5400억을 쓴다고 한다. 첨단을 이야기하며 IT를 들먹이는게 일단 15년은 늦은건데, 안을 들여다 보니 더 가관이다. 신기술 개발 없이 남의 기술 가져다가 가공좀 하고, 오래된 장비 바꾸어 전기값이나 절약해보자는 거다. (장비 교체시 연줄맺기 성공한 납품업체가 가져가는 눈먼 돈이 절약되는 전기값의 백배는 될거다.) 어찌 발상이 이렇게 유치할까? 미국이 에너지에 의지해 경제를 살리려고 할 것이라는 예측은 이전부터 있었고, 예상대로 오바마는 에너지에 투자하고 있다. 그게 답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따라하는 것도 제대로 못한다. 진중권의 말처럼 군복이 녹색이라고 군대가 환경단체가 되는게 아니다.

속도 층적 불가의 대중 - 이전 글에 "최근 한국대선은 윤리나 사회정의가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대중적 합의"라는 표현을 썼다. 이명박이 악이고 상대방은 선이라서가 아니다. 윤리나 정의가 쟁점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 대중은 한나라당에도 힘을 실어줬다. 희안한 것은 부유계층의 사람들이 명박을 지지한 것이야 이해가 가지만, 상대적 박탈은 더 커질 사람들조차 명박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명박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거라고 정말 믿는 것 같았다. '대중은 지혜로운가?'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최소한 한국 대중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광우병 같은, 중요하지만 전략적으로 모든 걸 다 걸 문제는 아니라 생각되는, 문제에 있는 힘 다 빼고 결국 '문화제'로 끝내버리는 모습에 실망감은 더 켜졌다. 사람들은 스스로 진보한다 생각하는데 겉에서 보기에는 '글쎄올시다'이다.

절대값 30마일의 개신교 - 경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개신교는 30마일 정도로 빨리 달리고 있다. 어쩌면 더 빠를 수도 있다. 최신 마케팅 기법을 첨단의 엔테테인먼트에 섞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부에 대한 집착과 날로 고도화되는 경영기법은 왠만한 회사 못지 않다. 사람들에게 성공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면에서 사회에 대한 공헌도도 높다. 하지만 종교라는 면,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라는 빛과 소금의 사명에서 보면 개신교도 후진이다. 한국 개신교는 조엘 오스틴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3.

명박이 48.7%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을 때 솔직히 나는 한국사회에 환멸을 느꼈다. 먹고살기 힘들고 세상 모든 것이 경제논리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국민이 요청한 지상과제인 '경제'마저도 해결못하는 그를 아직도 지지하는 대중을 보면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인터넷을 보면야 명박이 아직도 대통령인게 신기하지만, 그가 아직도 수구리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도데체 아직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4.

인터넷 이야기가 나온 김에 블로그스피어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도 블로거지만 내가 보기에 블로그스피어는 '시속 200마일의 빠른 속도를 내지만 사회적 영향력은 전혀 없는 집단'이다. 사회에 미치는 파장도 적거니와 목소리도 제각각이다. 각자 200마일로 달려대지만, 혹은 그렇다고 착각은 하지만, 총합으로 보면 한쪽 귀퉁이에서 꼬물대는 것뿐이다. 사회적 영향력면에서는 미안하지만 정지다. (개인의 영역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자신을 투사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키보드 워리어는 '키보드' 워리어일 뿐이다. 블로그를 통한 의견개진이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인식이 부족한 과다한 의미부여는 곤란하다는 거다.

#5.

세상은 변한다. 하지만 변한다고 꼭 성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008. 6. 4. 06:27
요즘 한국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난 글이 있어서 찾아 옮겨봅니다. 검색해보니 이미 저랑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많이 있더군요 ^^;; 이면우 교수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다행히 아직까지 세가지를 모두 갖춘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앉은 적은 없었다"라구요. 그런데 드디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나 봅니다. "무식하면서 소신을 가지고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최고의 전문직에 앉아있으니까요 ㅡ.ㅡ;;

+++++++++++++++++++++++++++++++++++++++++++++++++++++++++++++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세가지 부류의 사회공적이 있다.

1. 무식한 사람이 전문직에 앉아 있는 경우
2. 무식한 사람이 소신을 갖고 있는 경우
3. 무식한 사람이 부지런한 경우


사회공적의 첫 번째 부류는 무식한 사람이 전문직에 앉아 있는 경우다. 이들의 취임사를 들어 보면 "이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고 여러모로 부족한 제가 이러한 중책을 맡게 되어 어깨가 무거움을 느낍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무사히..."라는 것이다.

이 취임사의 요점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여 보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할지 통 모르겠다. 너희들만 믿는다. 재직하는 동안에 큰 실수나 없었으면 한다." 는 뜻이 아닌가.

이를 듣고 놀라고 걱정 해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칭찬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래도 그 사람은 겸손하잖아!."

사회공적의 두 번째 부류는 무식한 사람이 소신을 갖는 경우다.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 소신을 갖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만일 소신이라도 없었으면 모르는 것은 주위에 물어 보고, 본인이 몸소 배우기도 하고, 본인이 몸소 배우기도 하고, 상대방과 대화라도 잘될텐데, 일을하는 과정에서 모르는 일만 생기면 곧 소신론을 들고 나선다. `소신'이라는 말의 뜻은 "누가 무어라 해도 나는 이렇게 하겠다. 나는 비장하다"일 것이다.

무식한 소신파는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점을 깨닫는 경우에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소신을 자주 바꾸는 사람을 보았는가? 실수도 보완대상이 아니다. "소신껏 추진하다 보니 다소 부작용이 있었다."라고 하면 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위험한 사람을 우리들은 좋게 평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래도 그 사람 소신은 있잖아!."

세 번째 부류는 무식한 사람이 부지런한 경우다. 중요한 자리에 사람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최상의 선택은 전문식견이 있는 사람에게 중책을 맡기는 길일 것이다. 이것이 어려울 때에는 무식하면서 게으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맡기는 것이 차선의 방책이다. 게으르다보니 하는 일도 적어서, 저지르는 실수도 자연 줄어들것이 아닌가?

가장 최악의 선택이 무식하면서 부지런한 사람에게 중책을 맡기는 경우다. 무식한 사람이 부지런하면 어떤 현상이 야기되는가? 건드릴 것 안 건드릴 것, 갈 곳 안 갈 곳, 끌어들일 것 안 끌어들일 것 모두 쉬지 않고 찾아다니면서 사고를 저지를 것이다.

아마 여러분들의 친척 중에도 일가 대소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일을 도와주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 중에 친척간의 오해, 불화, 갈등을 야기시키는 경우를 본적이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사람이 일가친척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공공기관, 사회단체에서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면 국가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얼마나 클 것인가?

이러한 사람들을 감시하고, 골라내고, 도태시켜야 할 사회가 그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관행이 있다.
"그래도 그 사람은 부지런하잖아!."

그렇다면 무식하면서 야망이 있고, 소신이 있고, 부지런한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맡겨야 할 것인가? 전문지식이 필요없는 일자리도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지식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모든 여건이 무르익었는데 소신이 부족해서 해결 안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힘들고 오래 걸리는 일만 지정해서 맡기면 될 것이다. 자원봉사, 사회봉사, 해외파견, 아니면 교통이 복잡한 거리에서 하루 종일 밀려드는  차량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일도 있지 않은가?.

- 신사고 이론 20 中 에서-



2008. 5. 1. 15:00
중학생, 초등학생 남자아이 열한명이
학교 운동장에서
3학년 여자아이들 여덟명을 성폭행했다죠?

...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인생쯤 쉽게 파괴해도 괜찮다는.

...

원칙보다는 힘이 지배하는.

...

그런 세상을 우리 아이들은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나 봅니다.

...

지금 이 세상 어디로 가는거죠?

...

이 흐름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요?





2008. 2. 22. 15:55
전두환 대통령(이 명칭을 붙여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이 오랜만에 공식석상에 얼굴을 보인다고 한다. (기사 참조)

근데 행사명칭이 독특하다. '평화적 정권이양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란다. 기사에 붙어 있는 측근의 말이 가관이다. “헌정사에 처음으로 생긴 이 전통이 전 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만큼 이를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전두환을 지지하는 연희산악회에서 만들어준 자리다.

이럴때는 도데체 뭐라 말을 해야하나? 평화적 정권 이양이라고?
구테타 동지에게 정권을 물려준 것이 평화적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대통령 선거를 쟁취해낸 87년도의 6월항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들은 벌써 잊어버렸는가?

지나가던 개가 웃기는 커녕 미쳐서 짖어댈 헛소리가 신문에 버젓이 아무런 평도 없이 실렸다.

중앙일보의 신용호 기자라고 하는데, 요즘 기자는 도데체 어떻게 뽑는지 참 궁금하다.




2008. 2. 22. 15:21
<뉴스후>의 방송이후 교회에 대한 세상의 질타가 다시 매서워졌습니다. 하지만 세번에 걸쳐 방영된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이 방송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표현대로, 재탕삼탕입니다.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목회자들도 알고 있고, 기독교에 몸담은 시간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도 알고 있고, 또 이제는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이 내린 결론 - 한국 개신교는 자정능력이 없다 - 에 대해 반박할 수 없음이 참 서글픈 일입니다.

#1. 교회 개혁이 어려운 점

한국의 개신교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원칙에 의해 다스려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그래도 종교인데, 그 힘이 영성이나 지도력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때는 그런 시절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시절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은 교회 규모에 비해 존경을 많이 받던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는 모든 목회자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의 힘은 곧 신도수이고 재력입니다. 외형적인 힘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경제인들의 모임인 전경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두개의 단체로 한기총KNCC가 있습니다. 한기총은 보수진영을 대표하고 KNCC는 진보진영을 대표하지요. (진보라고 하지만 사학법 재개정에 찬성하는등 이전의 KNCC는 더 이상 아닙니다. 10억을 기부하기로 약속한 사람을 회장으로 당선시킨 한기총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단체들 밑에 교단이 있고, 교단밑에 교회들이 있습니다. 조직상으로는 이렇게 상하구조로 되어 있는듯 하나, 상위조직이 하위조직에게 뭐라 할 힘이 전혀 없는 것이 한국 교회입니다. 단지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모여있는 것 뿐입니다. 힘있는 교단에서, 그리고 힘있는 교회에서 하겠다는 일을 막을 힘이 전혀 없습니다.

만에 하나 교회 개혁에 뜻이 있는 목회자가 조직의 대표가 된다해도 실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하물며 모인 이들의 근본 성향이 성공주의요 신도수 제일주의인데 이 단체들에게서 개혁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난망한 일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며 비판 받고 있는 목회자들은 대부분 대형교회의 힘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주목 받는 것은 그만한 규모가 있기 때문이지, 이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깨끗해서가 아닙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대부분은 그들을 목표로 뛰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그들의 꿈이요 희망입니다. 오죽하면 '금이빨 사역'이나 '라식 사역' 같은게 나오겠습니까?

<뉴스후> 2월 16일 방송에 옥한흠 목사님의 말씀이 소개되었습니다. "교회의 자정능력이 없다. 아니면 잃어가고 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 분은 그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존경할만한 목회자들이 아직 많습니다. 이동원, 홍정길, 하용조, 김동호, 그리고 이재철, 강민준, 전병욱 등으로 이어지는, 뛰어난 영성을 가지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목사님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들이 한국교회를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자신들의 영역에서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 기독교의 부패에 동참하지 않기 위해 애쓸 뿐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오시면 모를까. 한국교회의 썩어져가는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는 없습니다. 시스템적으로 소수의 인원이 개혁을 이끌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그런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질리도 만무합니다. 기득권 세력이 그렇게 놔두지를 않을겁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사람들이 개혁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그 주장에 힘을 실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 잘못된 목회자를 비판합시다

한국의 크리스찬들에게 고합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잘못된 목회자들을 비판합시다. 우리들이 침묵하는 것은 교회의 부패에 대해 암묵적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소수의 문제다"라는 핑계로 책임을 회피하지 맙시다. 순복음, 소망, 금란 이 교회들만 합쳐도 백만 가까이 됩니다. 한국교회 교인이 천만이라 했을 때, 10%가 잘못된 목회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혹은 암묵적으로 시인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소수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까?

목회자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는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며 제사장이기에 사람이 논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누구에게서 나왔는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을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이라 이야기하며 자신을 차별화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신학적으로도, 상식으로도 맞지 않은 일입니다.

개신교의 근본은 종교개혁의 다섯가지 교리중 하나가 만인제사장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제시를 이곳에서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링크를 추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를 구별하여 세웠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다른 계층이 아닙니다. 다만 역할의 차이입니다. 목회자는 질서를 위해 세워진 교회의 리더입니다. 잘못된 리더가 비판 받듯이 잘못된 목회자가 비판받는 것은 상식입니다.

두번째, 나도 부족한데 누구를 비판하느냐 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 특히 많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어찌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라하느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 많이 사용되지요. 하지만 비판/바로잡음은 비난/정죄와는 다릅니다. 죄지은 자에 대한 예수님의 처리방안(마 18장)을 기억해야합니다. 바울은 "여러분들이 심판해야 할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죄를 짓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고전 5:12)"라 말하며 악한 자를 용납하는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죄 지은 자가 있으면 바로잡으라(갈 6:1) 했습니다. 그것이 성도로서 짐을 나누는 것(갈 6:2)이라 했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의인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잘못된 것은 누가 뭐래도 잘못된 것이고, 진리는 누가 외치든 진리입니다. 성경은 지적할 때의 자세에 대해 경계를 요구하였지, 다른 사람의 죄를 눈감아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은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바로잡으라 성경은 요구합니다.

너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비난하느냐? 불의한 목회자들은 그렇게 외칠겁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그대들은 하나님의 명으로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냐고. 그대들이 간음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도 같이 계셔서 축복해 주시더냐고 말입니다.

셋째, 인간적인 관계가 바른 지적을 막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안의 인간관계는 왠만한 친지보다 친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잘못이 있어도 좋은게 좋은거다 하고 넘어갑니다. "장점을 봐야지 단점만 강조해서 쓰나"라며 덮어두고 넘어가기를 서로 권합니다. 하지만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마 10:34)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잘못된 것에 대한 단호한 자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비판할 때, 누가 옳은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따진다면 불필요한 갈등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이건 상식입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은 진정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를 위한 것이지 서로를 비난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정당한 비판마저 영적전쟁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은 무엇이든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탄의 계략이라고 하는 분들... 솔직히 이분들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말이 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사시라고 할 수 밖에요.

#3.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교회의 불의에 대해 세상은 자기 몫을 다 했습니다. 이제는 크리스찬들이 목소리를 내어야합니다. 다음과 같은 실질적 행동 방안을 제안합니다.

첫째, 각자 처한 곳에서 불의를 없애나가기 시작합시다. 문제가 있는 교회라면 그 문제를 해결하자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기 바랍니다. 재정이 투명하지 않다면 교회 돈이 어디에 쓰여지나 보자고 요구해야 합니다. 공동의회에도 참가하고, 제직회에서도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뒤에서 투덜거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고칠 수 없다면 떠나시기 바랍니다. 믿고 따를 지도자는 적지 않습니다. 높은뜻 숭의교회를 가시던지, 전주 안디옥 교회를 가시던지 주위에 있는 좋은 목회자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문제 있는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은 암묵적으로 그 행위를 인정하는 겁니다. "한번 정한 교회는 평생 섬겨야된다"라는 목회자의 이익을 위해 잘못 사용되는 가르침에 속지 마십시요. 불의한 목회자는 도태되어야 하고, 좋은 목회자는 흥해야 합니다. 잘못된 지도자를 섬기며 시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목소리를 모아야 합니다. 교회의 개혁을 주도하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교회개혁실천연대같은 적극적인 목소리도 있고, 한미준(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과 같이 신학생 대상으로 내실을 준비하는 단체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시기 바랍니다. 회원가입도 하고, 재정적 후원도 하고, 모임이 있다면 참가하시기 바랍니다. 주위에 마음 맞는 사람들이 있다면 서로 독려도 하고, 가능한 모든 언로를 통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교회개혁을 바라는 팀블로그같은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갑시다.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갈 때 변화는 일어날 것입니다. 또한 당당해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당당해야 정의를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기독교에 참된 변화가 일어나길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4. 복음을 싸구려로 만들지 맙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힘이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이 담겨 있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실천적 가르침이 있습니다. '일부'이지만 힘 있는 자들의 잘못된 행동이 그 가르침을 땅에 굴러다니게 만들고 있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그들을 비판합시다. 아니 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세상에 외치기 시작합시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 금이빨이나 만들어주고, 간음한 목사에게 벤틀리나 안겨주는 그런 싸구려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해줄 책임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2008. 1. 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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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브룩스. 이 영화는 케빈 코스트너와 데미 무어. 전성기에서 꽤 벗어나 있지만, 아직도 관객 동원력을 어느 정도 갖춘 두 배우를 내세운 2007년 여름을 겨냥한 블록버스터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살인중독자인 '브룩스', 그를 잡기 위해 애를 조금 쓰는 '트레이시'. 브룩스의 살인장면을 목격하고 살인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스미스', 그리고 '마샬'이라 불리우는 브룩스의 다른 인격, 그렇게 네 사람이 영화를 이끌고 있다.

'이중인격'은 오래전부터 창작의 중요한 소재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고전이고, 이외에도 수많은 이중인격자가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미스터 브룩스는 이중인격자를 다룬 영화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난 느낌은 참 불편했다.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권선징악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밑에는 영화에 반영되는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이 깔려있다.

*** 이 밑으로 영화에 대한 자세한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지만, 나중에 볼 의향이 있는 분이라면 영화를 보고 다시 오시기를 권합니다 ^^;;

영화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올해의 인물로 뽑힌 사업가 브룩스에게 몇년간 억누르고 있었던 살인충동(마샬로 형상화되는)이 찾아온다. 그 욕구를 억누르지 못한 브룩스는 한 커플을 찾아가 그들을 살해한다. 이를 수사하기위해 형사 트레이시가 투입되고, 그녀의 탐문수사 대상의 하나가 스미스다. 스미스는 커플의 정사를 훔쳐보다 브룩스를 목격하였지만, 이를 신고하지 않고 오히려 브룩스의 살인에 자신을 동참시켜주길 요구한다. 한편 브룩스는 자신의 딸이 학교에서 친구를 살인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살인중독이 딸에게 넘어간 것이다. 브룩스는 딸의 학교에 찾아가 다른 사람을 살인함으로 딸에 대한 경찰의 의심을 돌려버린다. 브룩스는 스미스와 함께 살인의 대상을 찾다가, 트레이시를 성가시게 하는 전남편과 그와 바람난 여자 변호사를 선택하고 살해한다. 그 살인을 끝으로 스미스 손에 생을 마감하겠다고 하던 브룩스는 오히려 스미스를 죽여 묻어버림으로 살인의 혐의를 스미스에게 씌우고 자신은 안전하게 숨어버린다.

1. 범'죄'가 아니라 중독?

절대적인 가치를 배제하고 모든 것을 개인적인 선호로 돌리는 것이 현대 사회의 흐름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을 올리려고 한다.) 그래서인가? 영화속 브룩스의 연쇄살인은 악이 아닌 것 같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중독, 혹은 아직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나쁜 취미의 하나라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를 위해 영화 속에는 많은 장치들이 등장한다.

> 브룩스 자신도 괴로워 한다?
영화 초반에 브룩스는 마샬에게 살인을 하지 않겠다고 저항한다. 하지만 곧 유혹에 넘어간다. 딸이 살인욕구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 한다. 그리고 딸을 위해 살인을 한다. 스미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결국 스미스에게 자신의 죄를 뒤집어 씌운다. 딸에게 죽임을 당하는 꿈을 보여주면서 브룩스의 고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그가 괴로워 하니 이해해 달라는 것인가?

> 살인을 하는 것은 마샬의 유혹 때문이지 브룩스의 잘못은 아니다?
살인을 하도록 유혹하는 마샬은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으로 등장을 한다. 브룩스는 마샬의 유혹에 넘어가는 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마샬이 문제지 브룩스는 책임이 없다. 브룩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좋아서 스미스를 죽인게 아냐. 다만 내가 중독되었기 때문이야."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이런 항변을 할 때가 있다. "너희 같이 편하게 사는 놈들이 내 괴로운 상황을 알기나 해?" 동정은 할 수 있다. 어떤 경우 이해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죽일만 하니까 죽인 거라니까?
살해된 인물중에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인 자들은 다 조금씩 문제가 있다. 거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트레이시의 남편은 그 재산을 뜯어내기 위해 정부인 변호사와 같이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한다. 스미스는 범죄를 목격하고도 신고하지 않고 살인에 동참한다. 브룩스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트레이시에 의해 죽임당한 두명은 탈옥 후에 트레이시를 위협하던 존재다. 처음에 브룩스에게 죽은 커플도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창문을 열어놓고 그 짓을 한 괘씸죄(?)가 있다.

이렇듯 살해당한 자들의 흠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심정적인 동의를 요구한다. 브룩스가 완전한 악인은 아니다. 죽일만한 놈들이니 죽은 거다. 정말 그런가? 그들은 그렇다 치고, 그외의 사람들은 어떤가? 딸에게 살해당한 친구. 덩달아 죽임을 당한 딸 학교의 또 다른 피해자. 그리고 브룩스에 의해 죽어갔던 수많은 사람들.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그들 모두 죽음을 당할 정도로 문제가 있던 사람들인가? 영화는 그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같은 영화 코드는 다른 곳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한니발'에서 자신의 뇌를 먹게 되는 수사관 크렌들러를 예로 들어보자. 그도 참 얄미운 모습으로 나오긴 한다. 그에 비하면 여자를 해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손목을 자르는 한니발이 멋있어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누가 더 악인인가?

> 형사나 범인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브룩스의 대척점에 있어야할 트레이시는 전형적인 형사가 아니다. 트레이시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재산과 미모까지 갖춘 트레이시가 형사 생활을 계속하는 이유가 뭘까? 책임감?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소망? 아니다. 그저 자신이 원해서다. 자신이 잡고 싶은 사람을 잡고 싶은 욕구. 트레이시와 마지막 통화를 나누며 브룩스는 서로 동질감을 느낀다. 형사나 살인범이나 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영화는 은연중 이야기를 한다.

> 그래도 브룩스는 최소한 기도라도 하잖아. 그러니 이해해줘라?
영화 중에 브룩스는 기도를 한다. "하나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옵소서. 바꿀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키는 용기를,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궁금하다. 만약 바꿀 수 없는 것이 살인중독이라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영화는 이야기하는 걸까?

2. 영화는 그냥 영화로 봐야하는 것인가?

영화는 단순히 영화로서 끝이 아니라 사회를 반영한다. 권선징악의 평면적 구도가 아니면 문제작이라 불리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이다. 선이 승리하지 않는 영화는 널려 있다. 그 변화가 세상의 흐름을 대변하는듯 해서 영화를 보며 불편했다.

현실 속에서 선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두가 그건 알고 있다. 그래도 전에는 선이 승리하는 세상을 희망했던 것 같다. 이전 세대의 창작물을 보면 그렇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선이 항상 승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필요하고 또한 중요하다. 현실인식이 없이는 더 좋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거기서 더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선과 악의 경계가 없다 말하고 있다. 개인의 선택이 옳고 그름의 자리를 대신하고 들어섰다.

세상 어디든 그렇게 변하고 있다. 최근의 대선은 어떤가? 나는 최근의 한국대선은 윤리나 사회정의가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대중적 합의라고 해석한다. 정동영이나 신당이 정의라서가 아니다. 이명박이 악이기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 해석이나, 이후 벌어질 일들은 차치하고라도, 윤리나 청렴이 선택의 기준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개인적 평안이 사회정의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정직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돈없어 치료를 못받는 사회가 되더라도 나와 내 가족 잘먹고 잘 사는게 최고다. 내 자식 특목고 보내서, 좋은 대학 보낼 수 있으면 까짓 부정 좀 저지르고, 거짓말 좀 한게 뭐가 문제냐.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나는 놈 있나.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달라지니, 죄의식이니 양심이니 하는 말도 별볼일 없어진다. 돈 많이 못버는 억울함은 있어도, 세금 떼어먹는 것에 대한 가책은 없다. 초등생 친딸을 성폭행하더라도 들키지만 않는다면 그게 본인한테는 '선'인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누가 미스터 브룩스를 악이라 말할 수 있을까? 브룩스의 아내는 마치 지금의 세상을 보는 것 같다. 브룩스는 성공한 사업가다. 엄청나게 좋은 집에서 산다. 딸을 위해 멀리 날아가 살인까지 할 정도로 딸을 끔찍하게 사랑한다. 자신의 범죄를 완전히 감출 정도로 머리도 좋다. 그거면 다 된거다. 편안한 침대에서 따뜻하게 잘 수만 있으면 밤중에 몰래 나가 무슨 짓을 하고 오든 나는 계속 잠만 잘거다. (실제로 그녀는 밤중에 몰래 들어오는 남편에게 한번도 어디 갔다 왔는지 물어보질 않는다.) 완전한 불감증이다.

미스터 브룩스를 그냥 영화로 볼 수 없었던 것은 그 속의 세상이나 현실이나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친 비약인가? 영화야 그 속성상 몇배로 증폭하긴 했으나, 가는 방향은 별반 다르지 않다. 나에게는 세상이나 영화나 모두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이냐? 세상에 옳고 그름은 없는 거다. 내 한몸 등따시고 배부르면 그게 옳은 거고 그게 정의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없는 그곳으로 부지런히 달려가는 세상이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 같아 나는 이 영화가 참 불편하다.




2007. 11. 19.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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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에서 "아직도 국산물감 깔보는 풍조 개탄스럽다"라는 제목으로 알파색채의 전영탁 회장을 소개하는 글을 보았다. 학생들에게 좋은 물감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45년을 미술재료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미술재료의 선구자'라는 평을 들으며 <미술재료학>, <알고 쓰는 미술재료>등의 책도 썼다. 알파색채는 수채화 부분에서는 세계최고로 인정받고, 유화부분에서도 최고에 근접하고 있다고 한다.

기사중 쟁쟁한 기업중의 하나인 펠리컨문구에서 전시회에 못들어오게 했다는 내용을 보고 전영탁회장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어느 정도이기에 펠리컨에서 경계를 할까?

혹시 기사가 과장된 것은 아닐까? 한가지는 잘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욕을 먹는 것이 아닐까? 왠지 삐딱한 생각이 들어 ^^ 검색을 해보았다.

의외로 관련된 기사가 별로 없었다. 회사 규모도 그렇게 크지 않고. 2006년 현재 직원 50명에 매출액 56억 규모이다. 45년 동안 일구어낸 결과라고 하기에는 초라하단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평가는 모든 것을 숫자로만 판단하는 단순한 사고이다.

부인인 남궁요숙씨가 회사의 대표 역할을 한다. 회사 홈페이지에 보니 남궁요숙씨의 라디오인터뷰가 올라와 있길래 들어봤다. 회사를 시작한 동기가 재미있다. 학생들에게 좋은 물감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한 이전에, 학생들이 일본 물감을 인정하고 비싼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을 한 분들을 친척으로 가지고 있는 남궁요숙씨의 집안 배경이 나름 작용을 했나 보다. 부인의 말로 전영탁 회장은 천상 학자란다. 영업은 부인이 하고 남편은 연구만 했었다고. 그랬기에 지금의 성과를 이룰 수 있었겠지.

아들인 전창림교수는 화학과 교수이다. 미술을 하고 싶었던 아들을 만류해 화학을 공부하게 했다고 한다. 미술재료에 대해 더 깊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기사에는 언급이 안되어 있었지만, 부자간의 갈등이 없지는 않았을 거다. 지금은 아버지의 뜻을 잘 이해를 했는지 화학과 미술을 접목하는 일을 하고 있다. 얼마전에 '미술관에 간 화학자'를 썼다. 관심 분야가 아니기에 읽어볼 일이야 없겠지만, 재미있는 주제다.

얼마전부터 '몽우'라는 화가에게 물감지원을 해준다고 한다. '몽우' 화가는 천재화가란 소리를 들으며, 얼마전 TV 옥션하우스에 소개된 적도 있고, 그림이 호당 일억원에 팔린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 분야에서는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물감지원보다 알파색채의 회장님이신 전영탁 회장님과 남궁 요숙 사장님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이 더욱 기쁩니다. 그분들은 살아있는 전설로 가히 문화재급 거물이자 이 시대 최고의 미술평론가이십니다." 남관화백이나 김흥수화백(이 사람은 미술 문외한인 나도 이름을 들어봤다)에게 물감을 지원했었다는 기사도 보았다.

물감 혹은 미술재료면에서 한국의 수준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전영탁 회장과 남궁요숙 대표. 이런 분들을 보면 확실히 세상에는 배우고 본 받을 사람이 많다. "돈 벌 생각을 했으면 가난한 화가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부인의 말대로, 세상의 일반적 가치보다 소중한 것을 선택해 일생을 투자한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 이제 학문적 기반까지 갖춘 아들인 전창림 교수를 통해 그들의 꿈이 어떻게 꽃을 피울지 궁금하다. 세계의 화가들이 알파색채의 물감을 최고로 인정하는 그 때를 흐믓한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 ^^









2007. 11. 10. 05:18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먼지가 너무 나면 그건 문제다.

특별히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끊임없이 밝혀지는 이명박에 관한 기사를 보면 해도 너무 한다 싶다. 오늘 신문에는 자식들을 다니지도 않는 회사에 등록해놓고 월급을 타가게 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누가 봐도 명백한 불법. 나경원 대변인이 어떤 논리로 해명해도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공격받는 편에서 들고 나오는 말이 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 8:7)"

간음한 여인을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끌고 왔다. 법에 따르면 이런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할 거냐는 일종의 시험이였다. 여기서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시고,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자리를 떠났다.

털어보면 누구나 흠이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도 용서했는데 너희들은 얼마나 깨끗하길래 나를 비난하냐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는 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요 8:11)"는 말은 죄를 지은 자가 하는 말이 아니다. 그건 신의 영역이다. 죄 있는 자가 자신을 정죄하는 이들에게 목청 드높이며 "너희들은 깨끗해"하며 당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를 해달라는 것도 죄를 지은 이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피해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피해 입힌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 받는다면 그것은 은혜이지 자기가 잘해서 한 것이 전혀 아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하셨다. 죄는 죄다.
 
세상이 힘의 논리에 휘둘리고, 한국의 기독교가 돈과 권력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이런 사람을 장로로 앉히고, 절에 가서 법명을 받아온 부인을 권사로 앉힌 소망교회는 교인들 교육 다시 시켜야 할 것 같다. 아니면 간음한 목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함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 장로들이 있는 교회이기에 이명박 정도는 문제없이 용납할 수 있는 것인가?

세상에 먼저 돌을 던질 깨끗한 사람은 없을지 모른다. 허나 죄지은 자는 자신이 돌을 맞을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이에 대한 후회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양심'이라 부른다.


2007. 10. 24. 23:36
올블로그에 진성호씨 발언에 대한 글이 잔뜩 올라가 있어서 포탈은 어떤가 가봤다. 네이버는 평소에도 잘 안가고 다음을 주로 이용하기에 다음에 갔다. 블로그스피어에서 이 정도로 시끄러우면 많이 본 기사에 관련기사 하나 정도는 올라가야 하는데, 깨끗하다.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하다.

블로거 뉴스에 가봤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게 오늘의 트랙백이슈 - 파병연장에 대한 글이 보인다. 그리고 옆에는 오늘의 태그. 오늘의 태그가 '아프간'이란다. 샘물교회에서 책을 출판하긴 했지만 그게 '아프간'을 다시 오늘의 태그로 만들만한 사건일까? 이것도 이상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샘물교회와 기독교로 향하게 하고 싶은 것 아닐까?

그나마 실시간 블로거뉴스에는 변희재씨 발언에 대한 글이 1위에 올라가 있었다. "세상을 보는 밝은 눈"님 블로그의 이글이였다. 추천수가 73이였나 그래서 나도 추천을 하나 더 보태주었다.

그런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다. 1분도 안돼 그 글이 실시간인기 블로거 뉴스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는 추천수 39인 '아프간의 밀알'에 대한 글이 가장 인기있는 글이 되어버렸다 ㅡ.ㅡ;; 네티즌이 다시 샘물교회 욕하느라 진성호의 발언을 잊어버리기를 바라나 보다.

혹시나 해서 블로거뉴스 베스트에 첫번째로 있는 파병연장에 대한 글을 보니 추천수가 15였다. 실시간 인기글과 블로거 뉴스 베스트와는 시간차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 해도 추천수 15의 글이 top에 오른다면 70이 넘었던 세상을 보는 밝은 눈님의 글은 당연히 베스트에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그럴지 의문이다.

아쉽게도 스크린샷을 잡아놓지를 못했다. 증거샷을 남겼어야하는데 ...

말로만 듣던 포탈, 그리고 이를 포함한 언론들의 줄서기를 직접 확인해보니... 정말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걱정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다. 이러다가 정말 블로그 스피어가 유일하게 믿을만한 정보의 통로가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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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Nasty님이 올린 관련 글이 하나 있긴 있습니다. 가서 추천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글이 어떻게 되나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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