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564)
책 그리고 글 (87)
미래 빚어가기 (79)
시간/행동 관리 (44)
조직을 말한다 (16)
마케팅 노트 (14)
짧은 생각들 (33)
사랑을 말한다 (27)
세상/사람 바라보기 (40)
그밖에... (83)
일기 혹은 독백 (85)
신앙 이야기 (24)
음악 이야기 (19)
법과 특허 이야기 (13)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양심'에 해당되는 글 2건
2009. 11. 9. 11:22
얼마전 옆주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잠시 동네가 술렁거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소위 '문제아'들로 구성된 네명의 고등학생이 외딴 곳에 위치한 집 하나를 골라 이른 새벽 찾아가 무조건 안에 있는 사람을 죽이기로 한겁니다. 11살난 딸과 편하게 자고 있던 42살 엄마는 이들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딸은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갱단의 리더라도 되는 양' 나쁜 일을 자랑스러워 하던 스티븐 스페이더라는 17세 퇴학생이 주도하고 다른 세명이 참가한 것입니다. 완전히 '묻지마 살인'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별것 아닌 일로 홧김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자기 가게 앞에 옆집 사람들이 왔다 갔다해서 성가시다고 도끼로 찍고, 강아지에 목줄을 안맨 것을 지적한다고 옆집 여자를 낫으로 찍어죽이는 도 있었습니다. 영화 보고 흉내낸다고 선배를 찔러죽이려 한 20대도 있더군요.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기까지는 여섯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여섯단계가 몇초안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몇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첫번째, 죄를 저지르겠다는 마음이 들면, 두번째, 정말 저지를까 말까 앞뒤를 재어봅니다. 세번째, 정말 죄를 짓겠다는 결심을 하고, 네번째, 범죄를 준비합니다. 다섯번째 범죄의 첫 행동을 시작하고 여섯번째, 범죄를 마침내 저지릅니다. 여자를 향해 음욕을 품고 (첫째), 강간을 저지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두번째), 저지르기로 결심을 하고 (세번째), 대상과 장소를 물색한 후 (네번째), 여자를 뒤쫓아 끌고간 후 (다섯번째), 마침내 강간을 저지르는 겁니다 (여섯번째)[각주:1] 

범죄의 구성요소를 정신과 행동으로 나누는데 세번째 단계를 마치기 전까지는 정신적인 구성요소를 만족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다섯번째 단계까지는 행동의 구성요소를 만족하지 않는 것이구요. 즉 여섯단계중 다섯단계 전에 생각을 돌이킨다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은 있을지언정 법적인 책임은 없습니다.

대부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단계에서 다음단계로 넘어갈 때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죄를 저지르겠다는 마음조차 먹지 않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실행에 옮기기까지 단계별로 제동을 거는 것이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양심이라는 브레이크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나쁜 생각이 드는 때부터 실행에 옮기기까지 쭉 내달리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이의 생명을 중히 여기는 것. 다른 이의 행복을 중히 여기는 것. 사람이라면 마땅히 간직해야할 기본적인 양심입니다. 이를 외면할 때 브레이크는 먹히지 않게 됩니다. '정의'라는 가치가 '경제'라는 논리에 지배당하고, '진리'라는 가치가 '이익'이라는 논리에 의해 외면당할 때 '양심'이라는 단어는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우리 정신의 브레이크는 해체당하고 마는 겁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분명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조두순이나 스티븐 스페이더나 자신의 목숨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자들입니다. 하지만 '양심'이라는 브레이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흐름이 지속되는 한 세상은 더 많은 조두순을, 더 많은 스티븐 스페이더를 만들어낼 겁니다. 물론 그런 세상의 흐름이 죄 지은 자에게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죄를 저지르기 전에 여섯번의 멈출 기회가 있습니다. 여섯번중 한번만이라도 브레이크가 작동되면 됩니다. 그조차 못하는 '양심'이라면 살아있다 말하기 힘들지요. 

삭막한 세상입니다. 세상의 흐름이 바뀌어, 참다운 가치가 인정받아 '양심'이 힘을 얻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정신이 깨어나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세상을 바로 잡는 일이 필요합니다. 세상도 '브레이크'가 필요합니다. 그냥 이대로 간다면 무서워서 어딜 살겠습니까.
  1. 굳이 강간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치졸하고 저열한 범죄가 강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법과 특허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은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것  (8) 2010.04.30
첫 시험 성적  (6) 2010.02.09
로스쿨 첫학기를 마쳤습니다  (24) 2009.12.24
조두순, 정신상태, 그리고 인권  (22) 2009.10.05
구글 북스 프로젝트  (4) 2009.10.05


2008. 1. 22. 01:16
이 글은 전에 올린 "미스터 브룩스 -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와 연결되어 있는 글입니다. 원래 하나의 글로 쓰다가 성격이 약간 다른 것 같아 분리했습니다. 이전 글을 읽고 이 글을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신문 기사를 읽다보면 가끔 "어떻게 사람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일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마저도 더 이상 놀라움이 아니다. 그래도 화가 나서 저지른 우발적 행동, 혹은 생활고로 인한 자살등 설명한 건덕지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지속적으로 나쁜 일을 저지르면서 양심의 가책을 못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본 기사중 가장 지독한 것은 친딸, 친동생을 몇년간 성폭행한 사건이다. 음란물을 보던 오빠가 초등생이었던 동생을 협박해서 성폭행했다. 근데 더 황당한 것은 그걸 안 아빠가 거기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아빠와 아들이 번갈아 딸/동생을 성폭행했다고 한다.

이런 기사를 보면 인간에 대한 회의를 지나 궁금하기까지 하다. 도데체 어떤 사람이 이런 악한 일을 지속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걸까?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게 있는데,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인간성도 없는 걸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럴 수 있는 걸까? 이런 기사를 볼 때면 나는 성악설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만 있는 건 아니다. 나 또한 내 안에 나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내안에 순간적으로 나쁜 마음이 드는 것을 나는 안다. 예를 들어보자. 순진했던 어린 시절을 ^^ 지나 성에 눈뜨기 시작했던 고등학교 시절, 간혹 강간을 상상했던 나를 기억한다. 모르겠다. 내가 불량 학생이였나? 그렇지도 않다. 비윤리적이였나? 아니다. 게다가 굉장히 종교적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쑥 불쑥 생기는 악한 마음 때문에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나 규칙이나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폭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작은 경우는 사회나 환경에 대한 반항이고, 커질 때는 범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안의 나쁜 생각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제대로 살아갈려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더 많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를 나쁜 마음에 제동을 거는 그 무엇때문이라 생각한다. 마틴 루터가 말했다. "머리 위에 새가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라고. 나쁜 생각이 드는 것까지 막을 수야 없지만, 그 생각이 또아리를 틀고 자라나는 것은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악한 생각이 들었을 때 제동을 걸어주는 그 무엇.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 부른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알려주는 방향타인 것이다. 양심이라 불리우는 이 브레이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험악한 곳이 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 브레이크가 존재하지 않는 곳. 그곳이 지옥이라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이 브레이크에 대해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브레이크를 해제시키려 한다. 물론 겉과 속이 다른, 깨끗하고 교양있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 멋대로 해라"가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상함이 위선으로 통하고, 경박스러움이 솔직함으로 인정받는 세상이 정말 '옳은' 세상인가? 하나 하나 마음 속의 브레이크를 해체하면서 마음 가는데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라 말하며, 결국 선과 악에 대한 것까지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 보기 힘든 영어단어가 있다. 죄(Sin)라는 단어다. 교회 안에서나 이 단어가 쓰이지 밖에서는 전부 범죄(Crime)로 바뀌었다. 요즘은 나아가 현상이나 문제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죄라는 말은 절대적인 기준을 전제로 한 말이다. 이에 반해 범죄란 인간이 만든 기준에 관한 말이다. 죄에는 절대적인 개념이고, 범죄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범죄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죄의 기준은 달라지지 않는다.

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회분위기는 절대선을 인정하지 않는 현대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다. 물질주의에 기준해 보면 우리 마음속의 양심, 규칙, 그리고 절대선에 대한 개념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혹은 동양사상에는 하늘(세상)의 도로 해석한다. 인격신은 아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양심이나 윤리성을 '신이 있는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에는 절대선(신)이 존재하고 그 절대선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양심의 근거가 인격신이여야 할 필요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논리는 이렇다. 비인격적 자연에서 어떻게 인격적인 윤리성이 나올 수 있는가. 그리고 윤리성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는 대치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보다 반대편의 주장(자연적 생성 혹은 비인격적인 하늘의 도)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며 절대선을 생각하고 양심을 만들어냈다고 믿겨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아니 모든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한몸 잘 살기 원하고, 내 식구들 편하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의 근본 성향이다. 그런데 어떻게 희생 정신 같은 것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절대적인 원칙은 존재한다. 앞에 소개한 아빠와 아들의 예를 들어보자. 이들의 행위가 옳다고 인정되는 시대/사회/집단이 있을 수 있을까? 어느 경우에든 절대적으로 그들은 나쁘다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어떻게 주어진 것일까?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다. 그 가족 안에서 벌어진 것이다. 다른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한 소녀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나쁜 행위를 인정한다면 사회를 유지하는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에? 어느 것도 절대적인 이유가 되기 힘들다. 사람은 전쟁이나 자기보호를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의 행위가 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것도 아니다. 가족 안의 일이다. 쪼개 놓고 보면 상황논리로 정당화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누가 뭐래도 이들을 죽일 놈들이다.

무엇이 절대선인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정할 수 있는가?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의문들은 남아있다. 그럼에도 절대선은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절대선, 양심, 윤리성...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상황논리로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원칙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 속의 악한 생각을 제동 걸어줄 브레이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브레이크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세상에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선은 필요하다.

그리고 절대선이 자연적인 산물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절대원칙을 무효화시키면서 세상이 더 살기 좋아졌는가? 사람들 마음속의 선한 것들이 더 많이 표출되어지는가? 도그마는 없어졌을지 몰라도, 세상은 더 악해져간다고 생각지 않는가?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절대선이나 윤리성이 생겨났을까? 한번 망해보면 생길까? 몇천년 후에?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선은 자연적 산물은 아니다.

그 절대선이 인격적 원인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은 다음 단계의 이야기이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지만, 한편 신앙이 없이는 넘어갈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어느 단계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을 말하면 나는 신이 인간에게 양심을 주었고, 그 신이 절대선임을 믿는다. 일년 남짓 고민하고, 아직도 모든것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그래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것은 내 마음을 들여다 본 결과이다. 언젠가 이런 개인적인 고백을 정리하고 싶다.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