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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해당되는 글 20건
2014. 10. 14. 12:00

페이스북에 동성애 커플의 웨딩케익 만드는 것을 거부했다고 15만불 벌금을 내야될 제과점에 대한 기사를 소개하며 역차별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후, 여러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그 동안 나눈 이야기를 포함해, 제 생각과 입장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저는 두개의 주제를 다루려 합니다. 신앙의 문제와 법의 문제입니다. 연관이 있지만, 독립된 생각입니다. 아마 동성애 커플과 기독교인의 위치가 바뀌었더라도 저는 역차별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먼저 크리스찬으로서 동성애를 어떻게 보는가입니다. 이 문제는 현대 기독교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질문일 겁니다. 가장 쉬운 행동은 인정하는 겁니다. 발판은 마련되었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동성애를 더 많이 인정하는 추세입니다. 아니 오히려 동성애를 반대한다 말하면 공격을 받습니다. 쉽게 성경의 가르침은 시대에 맞추어 다르게 해석해야한다는 포지션을 취하면 됩니다. 그럴수 있습니다. 구약의 많은 율법은 이미 현대에 적용되지 않는다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서는 명확히 잘못되었다 말한다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성애를 죄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성경을 들어 저를 설득하지 않는 이상 이 생각을 바꿀 의향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동성애가 "더 나쁜"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매일 짓고 있는 죄와 마찬가지인 여러 죄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동성애자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저들보다 더 선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틀린 것을 그저 다르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병욱이 죄를 지었다 말하는 것처럼 동성애도 고쳐야할 죄라고 저는 믿습니다. 요즘 세상에 공공연하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압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미안합니다. 저를 욕하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그 욕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이 동성애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말한다 믿습니다. 


저는 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렇기에 차별이라는 주제에 민감합니다. 저는 어떤 차별도 반대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법으로 막아야할 차별과 법으로 보호받아야할 개인의 의사표현 사이의 선을 긋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죠. 제과점 주인이 전두환의 생일 케익을 주문 받았다고 합시다, 전두환이 한 짓을 싫어해 그 주문을 거절한다고 법으로 처벌을 받을까요? 전두환이 개인적으로 기분나쁘다고 어떤 행동을 취할 수는 있지만, 정부가 그 제과점 주인에게 벌금을 물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칭찬할 겁니다. 반대로, 흑인이기에 케익을 만들어줄 수 없다고 한다면 당연히 법으로 처벌받아야 합니다. 


이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선을 그어야합니다. 어디서부터 법으로 금지해야할 차별이 시작하는지요. 여러 요소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거절했는지, 거절당한 집단/개인이이 보호받아야할 약자인지. 삶의 기본적 권리가 침해되었는지, 거절당함으로 겪게되는 불이익이 얼마나 큰지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레곤주에는 Public Accommodation이 성적지향을 이유로 서비스 제공을 거절하면 법을 어긴 것이라 명시했더군요. Public Accommodation은 광범위한 문구입니다. 손님을 상대한다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제과점은 당연히 포함되구요. 오레곤은 미국 헌법이나 다른 주에 비해 동성애자를 위한 보호에 앞서가는 주인듯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과점 주인에게 별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항소심에서 벌금 액수를 줄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결정 자체를 뒤집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 판결을 보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기본적 권리도 아니고 거절당함으로 겪는 불이익이 크지도 않은데 파산으로 몰고 갈 15만불의 벌금이 매겨지는 상황이요. 그래서 역차별이라 생각한 겁니다. 제과점 주인은 찬성하지 않는 동성애 결혼에 자신이 정성들여 만든 케익이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화가가 자신의 작품이 새누리 당사에 걸리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것처럼요. 제게는 동성애 커플이 인간의 기본 권리에 있어 차별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듯, 제과점 주인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도 중요합니다. 


세상은 변해갈겁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저로서는 동성애자가 사회적 약자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이미 보호받고 있고, 오히려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자들이 공격받는 세상입니다. 이전에 가해졌던 차별을 보상하기 위해 밸런스를 맞추려고 하는 거지만, 중심은 어느새 반대쪽으로 기울었다고 느껴집니다.


한가지 이해를 구합니다. 기독교인은 동성애자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죄라 말하는 것을 죄라고 동의하는 겁니다. 물론 동성애 혐오를 참다운 신앙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잘못입니다. 어쩌면 그 제과점 주인도 동성애 혐오자일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동정하고 싶지는 않네요. 


말은 많이 적었는데 결론이 안내려지네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앞으로 더 이 문제로 곤혹스러워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아쉽지만 아직 해결책은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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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31. 13:22

페이스북에서 진행되는 감사 릴레이를 받아 적은 글입니다.


=========


세상이 참 말이 아닙니다. 300명 넘게 죽임을 당했지만 이유도 정확히 모릅니다. 이유 좀 알자는 애원이 빨갱이짓으로 몰립니다. 시리아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사냥을 당하고, 팔레스타인의 많은 이들이 폭격에 목숨 아니면 삶의 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진행되는 감사릴레이에 불편해하는 시선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아직도 몸부림치는 유가족들이 있는데 좋은 가족 주셔서 감사하다는 고백이 자랑처럼 보이지 않겠느냐, 이유야 어떻든 덕이 되지 않는다라는. 일정 부분 동의가 됩니다. 


그럼에도 감사는 크리스찬의 정체성입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는 감사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범사란 모든 일을 말합니다. 선택 사항이 아니지요.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이라 했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살다 보면 즐거운 일도 있고, 화나는 일도 있습니다. 전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습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더 없으니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라는 말을 들었던 순간이 기억 납니다. 그때 제가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고생만 하시다 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감사는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는 없다 생각합니다.


한글 번역에선 명확하지 않지만, 영어는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로 번역합니다. Give thanks to all circumstances가 아니구요. 모든 일이 감사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 마음이 뻐근한 기억이 있고 가슴에 돌을 얹어놓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일들에 대해 저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더 큰 가치와 목적을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을 통하여 저를 성장하게 하는, 예수님을 조금 더 닮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 아픈 일, 힘든 일 생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고난을 거치게 하시고, 그 과정 속에 우리를 성장시키신다는 겁니다. 은혜지요. 그래서 저는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감사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제목들을 적어봅니다. 


첫째, 한국은 제가 태어나고 애정하는 곳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회가 발전해야하는데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고 있어 마음이 아픕니다. 도데체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 좋은 세상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음이 감사합니다.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저와 제 가족만 챙기며 살수 있지만, 아파하는 이들과 같이 아파하는 애통함을 가짐이 감사합니다. 단식으로 유가족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건강도 감사합니다. 


둘째, 돈과 거리를 두며 살았습니다. 가난한 시절을 거쳤고, 직장생활을 한 이후로도 넉넉하게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뭐 잘못한 건 없습니다. 다만 남들에게 생기지 않는 일로 손해를 보고, 남들에게 생기는 이득은 피해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이 탓하지 않고, 제 책임이라 생각하고 더 열심히 살려는 마음 주심에 감사합니다. 주기적인 어려움 속에 교만하지 않게 된 것도 감사하고, 가난을 겪었기에 가난을 이해할 수 있음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넉넉하지 않아도 다른 이를 돕고 섬기는 마음을 가진 아내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라면 제 코가 석자라 주위 사람을 몰라라 했을텐데 아내 덕분에 다른 이를 섬기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셋째, 여러 불의한 목회자를 거쳤음에도 교회 떠나지 않은 건 기적입니다. 바람 핀 목사, 교회돈 횡령한 목사 등 여럿 거쳤습니다. 개신교인이라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한국 교회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붙잡아 신앙 지키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썩어가는 개신교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교회를 맘에 품고 기도하게 하심이 감사합니다. 고비마다 좋은 스승을 만나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감사 릴레이를 전해준 이 은상 목사님 감사합니다. 원래 3일 계속 하는게 규칙이라 하네요. 그런데 오늘 적은 것에서 교만한 저의 모습을 봅니다. 상황에 따르지 않고 진리를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하지만, 그래도 나는 훌륭해 하는 건 교만입니다. 내일도 그런 모습이 보이면 감사 제목은 혼자만 보고 나누지는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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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21. 13:36



항상 제 마음에 있는 다섯권의 신앙서적을 소개합니다. 책 선물을 할 때 이 다섯권을 먼저 고려합니다. 워낙에 좋은 책들이고 유명한 책이라 읽은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 책들이 신앙의 성장에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제목이 나이들어 보입니다. 전에는 이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텐데, 어느덧 저도 청년이라 우길 수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ㅡ.ㅡ 굳이 청년을 지목한 이유는 그 시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참 성장할 수 있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를 돌아볼 때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질문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청년들에게 권합니다. 채현국 이사장이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라 했던 것을 기억할 겁니다. 지금 한국 개신교는 욕먹을 짓을 참 많이 하고 있습니다. 소위 교회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먼저 복음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도 한 때는 순수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저들처럼 성장하지 않으려면 지금 더 열심히 말씀과 세상을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소개한 이 책들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1.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 고든 맥도날드


제 블로그에서 여러번 소개했었던 책입니다. 이 책은 신앙의 외면적인 면이나 행동적인 면이 아닌 내면세계라 지칭한 영적인 부분을 다스리라 강조합니다. 저자는 내면의 영역을 동기부여, 시간사용, 지혜와 지식, 영적인 힘, 회복(휴식)으로 나누어 각 영역에서 어떻게 내면의 질서를 유지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나갈지 깊이 있는 가이드를 제시합니다.


특히 각 장마다 나오는 "내면세계가 무질서한 사람들을 위한 조언"들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 중 몇개를 옮겨 봅니다. "나의 내면세계를 질서 정연한 상태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러한 질서로운 상태를 지키기로 매일같이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 , 그것은 내가 날마다 지식과 지혜 안에서 성장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 , 그것은 늘 나의 삶의 영적 중심부를 드넓히기로 결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서문과 열네개의 장 그리고 후기로 되어 있습니다. 330쪽 정도 되는데 빈틈 없이 알찬 내용으로 차 있습니다. 한 번 읽고 말 책이 아닙니다. 옆에 두고 내면세계의 질서가 흐트러졌다고 느껴질 때마다 꺼내어 보시기 바랍니다.


2. 순전한 기독교 - C.S. 루이스


루이스에게는 항상 '기독교 최고의 지성'이라는 말이 따라 붙습니다. 그만큼 그는 탁월한 지성으로 많은 이들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도왔습니다. 이 책은 라디오에서 일반인 대상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던 내용을 바탕으로 쓴 책입니다. 루이스는 기독교 안의 여러 교파들을 가로지르는 (카톨릭을 포함해서) 가장 근본적인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이 책에서 정리하였습니다.


루이스는 인간이란 무엇인지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종교성을 탐구한 후, 하나님과 예수님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 기본적인 신앙 위에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보편적 도덕을 포함해, 더 높은 차원의 행동 기준을 제시합니다. 마지막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신학적인 질문들(예를 들어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합니다.


누군가 "만원밖에 없고,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순전한 기독교를 사서 봐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중요한 책입니다. 기독교가 왜 '개독교'가 아닌지, 기독교가 얼마나 훌륭한 종교인지 알 수 있습니다.


3. 소명 - 오스 기니스


제자로서 살려고 한다면 누구든 소명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나의 소명은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갈까 하는 질문들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 신학을 해서 목회자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려도 해봅니다. 저도 그랬었습니다.


이 책에서 오스 기니스는 바로 이 질문에 집중합니다. 부름 받았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각자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도록 부름받기 전에 먼저 어떤 존재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어떤 존재가 되어야하는지의 단계적 소명의식은 세상일을 하찮게 생각하는 중세의 왜곡이나 무슨 일이든 괜찮다는 현대의 왜곡 모두 피할 수 있게 해줍니다.


소명은 한번 정해진 무엇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는 자세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삶의 구체적 진로가 정해지기 전에, 혹은 이제 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할 때 이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랍니다.


4. 아직도 가야할 길 - M. 스캇 펙


저자인 스캇 펙은 나중에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이 책을 쓸 때는 아직 신앙을 갖기 전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추천하는 이유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는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정신과의사인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왜 사람이 성장해야하는가, 왜 유아적인 사고나 종교적 맹신에서 벗어나야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선악과의 문제를 성장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게으름'은 '죄'라는 시각을 제시합니다.


삶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훌륭하게 사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왜 그 길을 가야하는가 질문해 봐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 위해서는 젖을 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과정에 대해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음에도 다분히 성경적인 길잡이를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닥치는 여러 어려움이 우리를 단련시키어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훈련이라는 것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5. 그리스도의 십자가 - 존 스토트


다섯권중 유일한 신학책입니다. 신학을 전공해야 읽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네권에 비해서는 읽기가 어려운 편입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은 '기독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인 존 스토트는 누구나 인정하는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설교가요 신학자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십자가'에 집중합니다. 왜 십자가가 필요했는지, 십자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의'라는 관점에서 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어야하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경외감마저 들게 됩니다. 왜 기독교를 "불타는 논리 (Logic on Fire)"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신학적으로 어떤 자세를 취하든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십자가를 뺀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제임스 패커는 "옷을 팔아서라도 이 책을 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좋은 책입니다. 십자가에 대해 알고 싶다면 반드시 거쳐야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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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20. 00:12

로날드 클럭의 <영혼의 일기>를 다시 읽었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90년대 후반에 이 책을 구입해서 읽었을겁니다. 최근에 일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꺼내어 다시 읽었는데 역시 처음 때와 같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개정판 제목인 <영혼의 일기와 영적 성숙>이 말해주듯 이 책은 일기를 통한 영적 성숙에 관한 책입니다. 150쪽 남짓의 적은 분량임에도 여러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기의 유익이 무엇인지 어떻게 일기 쓰기를 시작하고 지속할 수 있는지 등 일기 자체에 대한 내용이 앞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목표와 시간 관리, 삶을 되돌아보기 등의 영적 성숙을 위한 다양한 조언들이 뒷부분에 있습니다. 


그런데 뒷부분이 앞부분에 비해 급히 쓴 티가 너무 납니다. 내용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마감에 쫓겨 요점만 정리한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개정판에서는 개선이 되었나 궁금하네요. 


일기라는게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지만, 이 책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쓰여졌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원한다면 일기 쓰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이 책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2014. 4. 22. 00:27
우리의 신앙이 분별력과 만나기까지 - 8점
송인규 지음/부흥과개혁사

교회 책꽂이에서 우연히 송인규 목사님의 책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대출해 읽었습니다. IVFer 시절 송목사님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은 필독도서 중의 하나였습니다. 설교집 이외의 기독교 책을 쓰는 당시로는 매우 드문 저자였지요. 

이 책은 그리스도인에게 분별력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분별력은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가 구체화되는 중요한 방도이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증표이며, 지도자의 필수자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리와 신학, 목회 사역, 생활, 그리고 신앙 전반에 걸쳐 40개의 주제를 다룹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나, 방언을 어떻게 대할까, 성모 마리아에 대한 바른 관점, 왜 악이 존재하는가, 크리스찬의 자녀 교육, 왜 기도해야 하는가, 헌금, 고지 점령론과 낮아짐 등의 주제입니다. 

주제별로 편차가 좀 있습니다. 주제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장단점을 소개하며 바람직한 시각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는데, 대체적으로 자세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어떤 주제는 문제점 소개 정도에 끝날 때도 있습니다. 특히 관심이 있었던 인간의 자유와 악의 문제는 너무 짧아서 아쉽더군요. 또한 민감한 주제들, 예를 들어, 목사와 당회의 권위, 교회 건축, 십일조는 성경적인가 등은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추천합니다. 한국 교회 타락의 주 원인은 목회자에게서 나왔고, 이는 성도들의 분별력 없는 순종및 목회자 우상화이 뒷받침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느 때보다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별로 한권씩 비치해놓고 성도들이 다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음 ... 이 책을 비치해둘 교회와 목회자라면 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요.




2014. 4. 16. 00:32
모험으로 사는 인생 - 10점
폴 투르니에 지음, 정동섭 옮김/IVP


폴 투르니에의 <모험으로 사는 인생>을 읽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다!"라는 부제로 삶과 신앙을 모험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바라봅니다. 


인간은 원천적으로 모험을 원함을 설명하고, 삶에서 나타나는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가치있는 모험을 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우리 삶을 모험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투르니에는 묵상을 제안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살피면 살필수록 그만큼 행동을 적게 한다. 적게 행동할수록 그들이 해야 할 바를 알아내는 것이 어렵게 된다. 그들은 쓸데없이,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따져 묻지만 거의 대답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멈춰 서 있을 때가 아니라 뭔가 하고 있을 때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움직이지 않는 자동자의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여러번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간다면 우리가 설사 잘못된 방향으로 가더라도 하나님이 방향을 틀어주신다. 하지만 가만히 멈추어 서 있다면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 방향이다 싶으면 주저없이 나아가라." 


폴 투르니에의 책을 읽다 보니 발견한 글귀와 비슷하기에,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가 보다 싶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

가끔 보면 '나의 갈 길을 모르오니' 하며 주저 앉아 있는 친구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정말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싶어서 살펴보는 건지, 아니면 게으름인지 분간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쨋든 일단 움직여야하지요. 다만 민감하게 반응을 살피면서 방향을 조정해나가면 되는 겁니다.


많이 밑줄 치고 많이 끄덕였습니다. 현재의 내가 아닌 무언가 다른 모습이 되기를 원하는 욕구는 왜 생기는지, 어떻게 더 나은 나를 만들어내는 모험을 해나갈지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2013. 8. 6. 05:13

7월 27일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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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단체가 동성애 금지법을 발의한다는 기사를 봤다.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두가지다. "너나 잘 하세요"와 "쓸데 없는 짓 하고 있다"이다. 

여기까지 보면 대부분 내가 동성애를 찬성한다 짐작할 것 같아, 동성애를 '죄'라고 믿는다는 것을 미리 밝히고 시작하련다.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 말하는 부분은 사실 많지 않다. 열군데 미만으로 알고 있다.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 말하지는 않는다고 해석하는 성경학자들은 각 구절별로 적절한 설명을 붙여놓았다. 예를 들어 소돔의 죄는 동성애보다는 사회적 불의다라는가, 남색하는 자는 남자를 대상으로 매춘하는 행위를 말한다라는 식이다. 더불어 성경은 신앙에 대한 당시의 해석이기 때문에 모든 구절은 지금의 시각으로 재조명되어야한다는 걸 강조한다. 

하지만 성경이 만들어지는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고 믿는 나로서는 그 해석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성경은 전체로 하나의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 편지나 수필의 모음집이 아니라는 거다. 그렇기에 각 구절별로 다른 해석은 가능할지 몰라도 성경 전체적으로 보아 하나님이 동성애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 다른 해석은 없다고 믿는다. 그건 내 신앙이며 지식인 코스프레를 위해 의견을 바꿀 의향은 없다. 

(글의 주제는 다음 이야기이지만, 동성애에 관한 해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기꺼이 답하겠다.)

그런 내가 봐도, 동성애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태도는 한마디로 너무 치사하다. 레위기는 동성애를 가증한 일의 하나로 말한다. 그외에 우상숭배, 간음, 혹은 수간도 가증한 일에 들어간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는 것도 가증한 일이라 말한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동성애만 가지고 이 난리인가? 그건 동성애자가 사회적 소수이기 때문이다. 만만하기 때문이다. 

간음은 어떤가? 강남에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간음에 대한 설교를 안한다고 한다. 부부 같아 보이지만 부부가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다는 거다. 다수의 목사들이 간음을 하고 그걸 서로 알면서도 쉬쉬하는 집단에서 어떻게 간음이 죄라고 세상에 외칠 수 있겠나. 그런데 동성애는 눈에 띈다. 적어도 여기에는 자신있다 생각하는 거다. 하나님이 가증한 일이라 칭한 것을 수없이 범하면서도 자신은 돌아볼 생각 없이 소수자에 대한 혐오에 편승해온 거다. 

만약 내 친구가 부인 이외의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진다면 말하겠다. 간음은 죄라고. 거짓말을 한다면 말하겠다. 그건 나쁜 거라고. 이와 동일하게 동성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겠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혐오할 생각은 없다. 다 부족한 인간이니까. 내가 떳떳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요즘 교과서가 동성애를 옹호한다고 비판하는 만화를 찾아봤다. 거기서 나는 혐오이외의 다른 감정을 볼 수 없었다. 그게 지금 한국 기독교가 하는 거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 

나는 동성애를 차별하는 어떤 행위에도 반대한다. 사회적 시스템이란 그런 거다. 차별 금지법이니 동성애 결혼에 대한 허용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차별받지 않게 하겠다는 거다. 세상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만드는 것은 교회의 역할이다. 그걸 제대로 해햐한다. 그런데 차별함으로 그 일을 이룰 수는 없다. 

더불어 한국 교회는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혐오할 자격도 없다. 최소한의 자정능력이라도 갖추고 세상에 외쳤으면 좋겠다. 제발 너님들이나 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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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10. 14:05

What?

Last time, I wrote about how to handle troubled situations. I laid down the best approaches when you are stuck in a difficult situation. I liked it. The three actions you should take in the situation are the best choices, I believe. But, I got another question. Is that it? The thought was very 'Humanistic'. There was no room for Divinity.

So What?

Last Sunday, my church's pastor gave a great sermon. Interestingly, the topic was same. How to handle troubled situations. But the conclusion was totally different my writing.

The passage of the sermon was from Exodus where Moses and Israelite were facing red sea and Egyptian army was chasing them. Israelite didn't go there by a chance. Bible says that God told Moses to bring his people to that place and wait. It was near important army base of Egypt. The instruction did not make any sense. No wonder Israelite complained. But that's when God showed who HE is - dividing Red Sea so people can cross and making it collapsed with Egyptian army.

With God in the picture, it becomes a totally different story.

Now What?

First, do not fear. You need to trust HE has a plan for you no matter what the situation is. You may be there by your mistake or some force beyond your control. Still have faith. HE can turn the trouble into a blessing. HE is the king.

Second, know your place and know how HE works. In previous posting, I said you need to do your best as if your life depends on it. But Bible teaches other way. Sometimes you should shut your mouth and watch what HE does. It is tricky because sometimes HE wants you to act. You need to know how HE works. A good news is as the situation gets worse and you have less options, HE shows greater things.

Third, grow through the experience. HE turns your trouble into a training. Not just a training. It makes you distinguished. Blessing when you are thrown into a fire furnace transforms you. Again, everything is about YOU. HE wants YOU to grow. What HE cares is only YOU.



2011. 9. 20. 15:04
고난주간에 보여준 예수님의 행동은 죽기를 작정한 자의 모습이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섰다. 무슨 이유든 예수님의 생명을 지키고자 애를 쓴 빌라도의 노력에 예수님은 전혀 호응을 안한다. 이미 자신이 십자가에 달릴 것을 알기에 그 섭리를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친다.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 빌라도의 요구는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선택의 기회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지막 순간에 죄에서 돌이킬 수 있었다. 그들은 바라바를 선택할 수 있었다. 예수의 죄없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중 한명은 자신을 부인하고 한명은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 이야기했다. 베드로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유다는 이미 제사장들에게 예수의 위치를 알려주기로 내통한 상태다. 예수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때 유다는 돌이킬 수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그는 건너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가 마지막 순간에 돌이켰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예비하신 섭리는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이루셨겠지.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고 유다는 그 역사에 악역으로 참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악한 역으로 참가할지 선한 역으로 참가할 지의 선택을 개인의 몫이다.

모두에게 마지막 기회는 주어진다. 죄를 짓기까지 여섯단계가 있다고 한다. 마지막 여섯번째를 거치기 전에 돌이킨다면 죄가 되지 않는다. 잘못이라 느낄 때 돌이키면 된다. 그렇기에 잘못을 느끼는 분별력과 늦기전에 돌이킬 수 있는 용기를 간직하게 해달라 항상 기도해야 한다.

또 하나 생각할 인물은 바라바다. 바라바는 강도라고도 하고 혁명가라고도 한다. 어느쪽이든 분명한 건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그를 (물리적으로) 대신해 예수가 대신 죽임을 당했다. 어렸을 때 봤던 안소니 퀸의 바라바 영화가 기억난다. 죽게 될 상황을 여러번 거치면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자신을 대신해 죽은 예수라는 것을 결국 인정하게 되고 미워하던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맞게 된다.  

바라바는 예수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되는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우리를 대신해 죽은 것은 자그만치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의 목숨값은 엄청 비싼 것이다. 소중하고 고귀한 삶을 살아가야할 이유가 거기서 나온다. 사는게 힘들다고, 혹은 사는게 너무 비참하다고 포기하면 안되는 거다. 왜냐면 그 생명 하나 하나를 위해 엄청나게 큰 값을 하나님이 이미 치루었기 때문이다. 





2010. 11. 3. 14:00
허지웅 기자가 3년전의 글을 다시 올리면서 이런 멘트를 달았습니다. "거의 3년 전의 글. 그러나 불행히도 변한 건 거의 없어 보인다. 사례만 늘었다." 그때 허지웅 기자의 글을 보고 제가 썼던 글이 생각나 저도 다시 올립니다. 제 멘트는 조금 다르네요.

거의 3년전의 글. 그러나 불행히도 변한 건 없어 보인다. 다만 존경할만 하다 생각했던 몇사람의 이름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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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후>의 방송이후 땅밟기와 기독교은행 설립 계획 발표 이후 교회에 대한 세상의 질타가 다시 매서워졌습니다. 하지만 여러번에 걸쳐 방영된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사람들의 표현대로, 재탕삼탕입니다.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목회자들도 알고 있고, 기독교에 몸담은 시간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도 알고 있고, 또 이제는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세상이 내린 결론 - 한국 개신교는 자정능력이 없다 - 에 대해 반박할 수 없음이 참 서글픈 일입니다.

#1. 교회 개혁이 어려운 점

한국의 개신교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원칙에 의해 다스려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그래도 종교인데, 그 힘이 영성이나 지도력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때는 그런 시절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시절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은 교회 규모에 비해 존경을 많이 받던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는 모든 목회자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의 힘은 곧 신도수이고 재력입니다. 외형적인 힘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경제인들의 모임인 전경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두개의 단체로 한기총과 KNCC가 있습니다. 한기총은 보수진영을 대표하고 KNCC는 진보진영을 대표하지요. (진보라고 하지만 사학법 재개정에 찬성하는등 이전의 KNCC는 더 이상 아닙니다. 10억을 기부하기로 약속한 사람을 회장으로 당선시킨 한기총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단체들 밑에 교단이 있고, 교단밑에 교회들이 있습니다. 조직상으로는 이렇게 상하구조로 되어 있는듯 하나, 상위조직이 하위조직에게 뭐라 할 힘이 전혀 없는 것이 한국 교회입니다. 단지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모여있는 것 뿐입니다. 힘있는 교단에서, 그리고 힘있는 교회에서 하겠다는 일을 막을 힘이 전혀 없습니다. 

만에 하나 교회 개혁에 뜻이 있는 목회자가 조직의 대표가 된다해도 실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하물며 모인 이들의 근본 성향이 성공주의요 신도수 제일주의인데 이 단체들에게서 개혁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난망한 일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며 비판 받고 있는 목회자들은 대부분 대형교회의 힘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주목 받는 것은 그만한 규모가 있기 때문이지, 이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깨끗해서가 아닙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대부분은 그들을 목표로 뛰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그들의 꿈이요 희망입니다. 오죽하면 '금이빨 사역'이나 '라식 사역' 같은게 나오겠습니까?

<뉴스후> 2월 16일 방송에 옥한흠 목사님의 말씀이 소개되었습니다. "교회의 자정능력이 없다. 아니면 잃어가고 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 분은 그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존경할만한 목회자들이 아직 많습니다. 이동원, 홍정길, 하용조, 김동호, 그리고 이재철, 강민준, 전병욱 등으로 이어지는, 뛰어난 영성을 가지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목사님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들이 한국교회를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자신들의 영역에서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 기독교의 부패에 동참하지 않기 위해 애쓸 뿐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오시면 모를까. 한국교회의 썩어져가는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는 없습니다. 시스템적으로 소수의 인원이 개혁을 이끌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그런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질리도 만무합니다. 기득권 세력이 그렇게 놔두지를 않을겁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사람들이 개혁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그 주장에 힘을 실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 잘못된 목회자를 비판합시다

한국의 크리스찬들에게 고합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잘못된 목회자들을 비판합시다. 우리들이 침묵하는 것은 교회의 부패에 대해 암묵적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소수의 문제다"라는 핑계로 책임을 회피하지 맙시다. 순복음, 소망, 금란 이 교회들만 합쳐도 백만 가까이 됩니다. 한국교회 교인이 천만이라 했을 때, 10%가 잘못된 목회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혹은 암묵적으로 시인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소수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까?

목회자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는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며 제사장이기에 사람이 논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누구에게서 나왔는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을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이라 이야기하며 자신을 차별화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신학적으로도, 상식으로도 맞지 않은 일입니다. 

개신교의 근본은 종교개혁의 다섯가지 교리중 하나가 만인제사장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제시를 이곳에서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링크를 추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를 구별하여 세웠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다른 계층이 아닙니다. 다만 역할의 차이입니다. 목회자는 질서를 위해 세워진 교회의 리더입니다. 잘못된 리더가 비판 받듯이 잘못된 목회자가 비판받는 것은 상식입니다.

두번째, 나도 부족한데 누구를 비판하느냐 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 특히 많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어찌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라하느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 많이 사용되지요. 하지만 비판/바로잡음은 비난/정죄와는 다릅니다. 죄지은 자에 대한 예수님의 처리방안(마 18장)을 기억해야합니다. 바울은 "여러분들이 심판해야 할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죄를 짓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고전 5:12)"라 말하며 악한 자를 용납하는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죄 지은 자가 있으면 바로잡으라(갈 6:1) 했습니다. 그것이 성도로서 짐을 나누는 것(갈 6:2)이라 했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의인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잘못된 것은 누가 뭐래도 잘못된 것이고, 진리는 누가 외치든 진리입니다. 성경은 지적할 때의 자세에 대해 경계를 요구하였지, 다른 사람의 죄를 눈감아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은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바로잡으라 성경은 요구합니다.

너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비난하느냐? 불의한 목회자들은 그렇게 외칠겁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그대들은 하나님의 명으로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냐고. 그대들이 간음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도 같이 계셔서 축복해 주시더냐고 말입니다.

셋째, 인간적인 관계가 바른 지적을 막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안의 인간관계는 왠만한 친지보다 친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잘못이 있어도 좋은게 좋은거다 하고 넘어갑니다. "장점을 봐야지 단점만 강조해서 쓰나"라며 덮어두고 넘어가기를 서로 권합니다. 하지만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마 10:34)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잘못된 것에 대한 단호한 자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비판할 때, 누가 옳은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따진다면 불필요한 갈등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이건 상식입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은 진정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를 위한 것이지 서로를 비난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정당한 비판마저 영적전쟁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은 무엇이든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탄의 계략이라고 하는 분들... 솔직히 이분들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말이 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사시라고 할 수 밖에요.

#3.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교회의 불의에 대해 세상은 자기 몫을 다 했습니다. 이제는 크리스찬들이 목소리를 내어야합니다. 다음과 같은 실질적 행동 방안을 제안합니다. 

첫째, 각자 처한 곳에서 불의를 없애나가기 시작합시다. 문제가 있는 교회라면 그 문제를 해결하자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기 바랍니다. 재정이 투명하지 않다면 교회 돈이 어디에 쓰여지나 보자고 요구해야 합니다. 공동의회에도 참가하고, 제직회에서도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뒤에서 투덜거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고칠 수 없다면 떠나시기 바랍니다. 믿고 따를 지도자는 적지 않습니다. 높은뜻 숭의교회를 가시던지, 전주 안디옥 교회를 가시던지 주위에 있는 좋은 목회자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문제 있는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은 암묵적으로 그 행위를 인정하는 겁니다. "한번 정한 교회는 평생 섬겨야된다"라는 목회자의 이익을 위해 잘못 사용되는 가르침에 속지 마십시요. 불의한 목회자는 도태되어야 하고, 좋은 목회자는 흥해야 합니다. 잘못된 지도자를 섬기며 시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목소리를 모아야 합니다. 교회의 개혁을 주도하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교회개혁실천연대같은 적극적인 목소리도 있고,한미준(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과 같이 신학생 대상으로 내실을 준비하는 단체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시기 바랍니다. 회원가입도 하고, 재정적 후원도 하고, 모임이 있다면 참가하시기 바랍니다. 주위에 마음 맞는 사람들이 있다면 서로 독려도 하고, 가능한 모든 언로를 통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교회개혁을 바라는 팀블로그같은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갑시다.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갈 때 변화는 일어날 것입니다. 또한 당당해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당당해야 정의를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기독교에 참된 변화가 일어나길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4. 복음을 싸구려로 만들지 맙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힘이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이 담겨 있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실천적 가르침이 있습니다. '일부'이지만 힘 있는 자들의 잘못된 행동이 그 가르침을 땅에 굴러다니게 만들고 있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그들을 비판합시다. 아니 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세상에 외치기 시작합시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 금이빨이나 만들어주고, 간음한 목사에게 벤틀리나 안겨주는 그런 싸구려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해줄 책임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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