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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여행'에 해당되는 글 4건
2008. 2. 4. 16:17
#1.

최근 일년동안, 아니 훨씬 이전부터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는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그 얼마전부터 우리 가족은 나와 아버지를 빼놓고는 모두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환경의 영향도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놀러다니다 "심심해서" 가족들이 다니던 교회에 들어섰던 그날 오후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이후 기독교는, 그리고 교회는 내 삶에서 빼놓기 힘든 것이였다. 목사가 되고 싶었던 중고생 시절, 독재와 사회 모순에 대한 대안으로 기독교 밖에 없다 믿었던 대학시절을 보냈다.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고, 부모님을 보내드리고, 미국에 오는 인생의 굴곡에 맞추어 신앙의 업다운도 경험했다. 그리고 지난해 그동안 회피하고 있었던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정말 믿을만한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답을 찾기 쉽지 않은 질문들을.

#2.

질문과 고민으로 점철된 2007년 말에 이 책을 만났다. "내려놓음" 2006년과 2007년에 걸쳐 5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이 책을 쓴 이용규선교사는 원래 역사학도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하버드에서 중동사로 박사를 받았다. 박사를 받고나서 신학이나 선교학 공부도 하지 않은 저자는 몽골로 날아간다. 몽골국제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이레교회의 담임으로, 부인은 몽골영양개선연구소의 소장으로 그 지역을 섬기고 있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저자가 경험했던 "은혜"를 기록하고 있는 일종의 간증서적이다.

간혹 어떤 간증서적은 개인의 경험과 보편적 진리를 혼동해서, 자신이 겪은 일이 전부인양 주장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간증서적을 즐겨읽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일관된 추천 때문이였다. 그렇게 좋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을 제시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런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오랜 교회 생활로 머리만 커지고 줏어들은 것은 많았기에,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이미 한번씩은 들어봤던 원리와 비슷한 경험들이였다. 하지만 고민 하나는 나에게 확실하게 던져주었다. 그것은 '과연 믿는다는게 도데체 뭔가?'라는 질문이다.

#3.

책을 통해 나타나는 이용규선교사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을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지도교수가 바뀌면서 준비하던 논문을 재구성해야 했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기에 기도하면서 결정했던 기간내에 졸업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믿고 맡기며 한달반을 준비한 결과 예상보다 너무나 쉽게 정리가 되었다. 새로운 교수도 그 결과에 너무 흡족해했고 원하는 시기에 졸업할 수 있었다. 제2외국어로 선택한 독일어가 너무 힘들어 논문심사에 떨어질 위험이였지만 다행히 번역할 본문으로 로마서가 나와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혹은 차가 없는 사람들을 태우고 교회에 가고 싶어서 미니밴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문제가 많아 팔 수도 없던 차를 누가 뒤에서 받았다. 차는 완전히 부서졌는데, 다행히 보험회사에서 산 가격보다도 더 많이 보상을 해주어 아주 쉽게 중고 미니밴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이런식을 우연들이 가득 차 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비판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선택적 관찰'이다. 잘 되도 신의 뜻, 잘못 되도 신의 뜻. 이렇게 해석을 하고 나면 세상에 신의 뜻이 아닌게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도 같은 비판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학을 가기전 그는 공부하던 중국사를 계속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중국사로 지원한 학교는 다 떨어지고, 중동사로 지원한 하버드에 붙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생각한다. 원하고 기도하던 것을 받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지금의 선교를 감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였다는 거다. 반면, 아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영양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선교에 쓰이게 되었다.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도 그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였다.

하지만 그저 벌어진 일만 놓고 본다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뜻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신의 인도하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이른바 믿음이 성장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신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 이렇듯 이성적으로 접근했을 때 신에 대한 믿음이 자라날 틈은 별로 없다.

#4.

사실 기독교에는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아이러니들이 상당히 많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은 중요한 전쟁을 준비하며 제사장인 사무엘을 기다린다. 하지만 사무엘은 약속한 기한인 일주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백성들의 사기는 떨어져 도망가기 시작한다. 이에 사울은 스스로 제사를 지내고, 그 이후에야 도착한 사무엘은 오히려 사울을 책망한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사실 사울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말이 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상황에 따라 유연한 선택을 한 사울은 좋은 리더다. 게다가 먼저 약속을 어긴것은 사무엘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한다.

이 책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다. 어떤 문제를 놓고 시한이 다 되도록 기도해도 응답이 없더라는 말에, 저자는 이렇게 질문을 한다. "해결시한이 다 지나고 나서도 믿고 기다려 본적이 있느냐"라고. 집안 문제로 인해 백만원이 급히 필요하다고 치자. 내일 아침에 필요한데 밤 열두시가 다 되었는데, 돈 나올 구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다 믿어진다면 믿고 기다리는게 신앙이라는 것이다.

살아 생전 오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조지 뮬러의 일화는 많이 알려져 있다. 평생 고아원을 운영하던 뮬러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았다. 어느날도 당장 다음날 아침 아이들 먹일 식량이 없었다. 마침 같은 지역의 정치인이 기부금을 냈는데, 그 금액이 아이들을 먹이고 남을만큼 충분했다. 하지만 이 정치인이 부도덕한 인물이였는지 뮬러는 그 돈을 거부했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 기대했을 때 다음날 아침 근처 제과점에서 원래 시간보다 조금 더 요리된, 하지만 먹기에는 충분한 빵을 보내왔다. 딱 아이들을 먹일만큼의 양이였다고 한다.

학비야 장학금을 받는다 쳐도 매달 2000불 정도가 생활비로 필요했다. 근처에 넉넉한 사람이 없기에 어디 도움 받을데도 없었는데도 이용규선교사는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한다. 한번도 여유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부족한 적도 없었단다. 누구는 그럴 것이다. "그만큼 열심히 그리고 검소하게 살았을꺼야." 당연히 그는 검소하게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5.

지난 일년간 나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접근했다. 누군가 신앙은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반응"이라고 했다. 난 그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신앙은 머리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내 삶에서 "선택적 관찰"의 한가지 예를 경험했다. 이전 일을 내려놓고 다음 일이 결정되기까지 세달의 기간동안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사업부의 최고 책임자에게도 여러번 불평을 했다. 그래도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날 내가 참 교만했다는 생각을 했다. 절대자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나를 깨달았고, 그 문제를 내 손에서 내려놓았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절대적인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당신이 계시다면 당신이 책임져주세요"하고 하나님에게 맡겼다. 그리고 일주일도 채 안되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몇가지의 옵션이 주어졌고, 그 중에는 평소에 원했던 일보다 더 좋은 일도 있었다. 내가 최종목표로 삼는 일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일이다. 추가로 이전에 하고 싶었던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아직도 남아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조건이 좋아진 것이다.

우연이라 해석할 수 있다. 시기가 무르익었기에, 충분히 기다렸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맘 깊은 곳에 침잠해 들어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 물어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라는 답을 듣는다. 그런 대답을 듣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믿고 싶으니까, 믿는 것일 수도. 하지만 그런 "우연"들이 계속된다면.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현상들이 "믿음의 눈"으로 해석된다면, 그게 바로 믿는다는 것이 아닐까? 내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참 많다. 그리고 나도 그런 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6.

아직도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세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을 배제하고도 세상은 해석되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는 없다. 절대자를 배제하고는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못찾겠다. 신이 있을 때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다.

그렇기에 나는 신을 믿고 싶어하고, 절대자를 그리워한다. 놀랍게도 내가 그를 따르려고 할 때 이성적으로 100%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너무나 좋은 "우연"들이 생기고,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가치있게 해석이 된다. 그를 의지할 때 행복하고, 그를 생각할 때 나의 결점들이 보인다. 그의 사랑을 느끼며,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 말씀에 순종하려 노력할수록 나는 내가 조금씩 더 "훌륭"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직도 난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을 소망한다. 하지만 분석만 한다고 이해되어지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인정한다. 내가 그 길을 걸어갈 때, 비록 하루 하루 이해할 수 없어도 돌이켜 보면 그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이였음을 믿게되는 것. 그것이 믿음임을 이 책 "내려놓음"이 가르쳐 주었다.

왜 그렇게 만드셨는지. 왜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없게 해놨는지 솔직히 불만이다. 그리고 죽고나면 따질 것이다. 그럼에도 절대자가 그것을 원한다면, 내가 어찌하겠는가. 결국 직접 걸어봐야 이해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걸어가 보면 그길은 더이상 착각, 망상, 혹은 자기 세뇌가 아니다. 그 길은 현실이 된다.





2008. 1. 22. 01:16
이 글은 전에 올린 "미스터 브룩스 -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와 연결되어 있는 글입니다. 원래 하나의 글로 쓰다가 성격이 약간 다른 것 같아 분리했습니다. 이전 글을 읽고 이 글을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신문 기사를 읽다보면 가끔 "어떻게 사람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일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마저도 더 이상 놀라움이 아니다. 그래도 화가 나서 저지른 우발적 행동, 혹은 생활고로 인한 자살등 설명한 건덕지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지속적으로 나쁜 일을 저지르면서 양심의 가책을 못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본 기사중 가장 지독한 것은 친딸, 친동생을 몇년간 성폭행한 사건이다. 음란물을 보던 오빠가 초등생이었던 동생을 협박해서 성폭행했다. 근데 더 황당한 것은 그걸 안 아빠가 거기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아빠와 아들이 번갈아 딸/동생을 성폭행했다고 한다.

이런 기사를 보면 인간에 대한 회의를 지나 궁금하기까지 하다. 도데체 어떤 사람이 이런 악한 일을 지속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걸까?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게 있는데,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인간성도 없는 걸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럴 수 있는 걸까? 이런 기사를 볼 때면 나는 성악설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만 있는 건 아니다. 나 또한 내 안에 나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내안에 순간적으로 나쁜 마음이 드는 것을 나는 안다. 예를 들어보자. 순진했던 어린 시절을 ^^ 지나 성에 눈뜨기 시작했던 고등학교 시절, 간혹 강간을 상상했던 나를 기억한다. 모르겠다. 내가 불량 학생이였나? 그렇지도 않다. 비윤리적이였나? 아니다. 게다가 굉장히 종교적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쑥 불쑥 생기는 악한 마음 때문에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나 규칙이나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폭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작은 경우는 사회나 환경에 대한 반항이고, 커질 때는 범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안의 나쁜 생각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제대로 살아갈려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더 많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를 나쁜 마음에 제동을 거는 그 무엇때문이라 생각한다. 마틴 루터가 말했다. "머리 위에 새가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라고. 나쁜 생각이 드는 것까지 막을 수야 없지만, 그 생각이 또아리를 틀고 자라나는 것은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악한 생각이 들었을 때 제동을 걸어주는 그 무엇.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 부른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알려주는 방향타인 것이다. 양심이라 불리우는 이 브레이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험악한 곳이 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 브레이크가 존재하지 않는 곳. 그곳이 지옥이라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이 브레이크에 대해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브레이크를 해제시키려 한다. 물론 겉과 속이 다른, 깨끗하고 교양있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 멋대로 해라"가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상함이 위선으로 통하고, 경박스러움이 솔직함으로 인정받는 세상이 정말 '옳은' 세상인가? 하나 하나 마음 속의 브레이크를 해체하면서 마음 가는데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라 말하며, 결국 선과 악에 대한 것까지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 보기 힘든 영어단어가 있다. 죄(Sin)라는 단어다. 교회 안에서나 이 단어가 쓰이지 밖에서는 전부 범죄(Crime)로 바뀌었다. 요즘은 나아가 현상이나 문제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죄라는 말은 절대적인 기준을 전제로 한 말이다. 이에 반해 범죄란 인간이 만든 기준에 관한 말이다. 죄에는 절대적인 개념이고, 범죄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범죄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죄의 기준은 달라지지 않는다.

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회분위기는 절대선을 인정하지 않는 현대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다. 물질주의에 기준해 보면 우리 마음속의 양심, 규칙, 그리고 절대선에 대한 개념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혹은 동양사상에는 하늘(세상)의 도로 해석한다. 인격신은 아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양심이나 윤리성을 '신이 있는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에는 절대선(신)이 존재하고 그 절대선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양심의 근거가 인격신이여야 할 필요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논리는 이렇다. 비인격적 자연에서 어떻게 인격적인 윤리성이 나올 수 있는가. 그리고 윤리성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는 대치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보다 반대편의 주장(자연적 생성 혹은 비인격적인 하늘의 도)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며 절대선을 생각하고 양심을 만들어냈다고 믿겨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아니 모든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한몸 잘 살기 원하고, 내 식구들 편하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의 근본 성향이다. 그런데 어떻게 희생 정신 같은 것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절대적인 원칙은 존재한다. 앞에 소개한 아빠와 아들의 예를 들어보자. 이들의 행위가 옳다고 인정되는 시대/사회/집단이 있을 수 있을까? 어느 경우에든 절대적으로 그들은 나쁘다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어떻게 주어진 것일까?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다. 그 가족 안에서 벌어진 것이다. 다른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한 소녀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나쁜 행위를 인정한다면 사회를 유지하는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에? 어느 것도 절대적인 이유가 되기 힘들다. 사람은 전쟁이나 자기보호를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의 행위가 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것도 아니다. 가족 안의 일이다. 쪼개 놓고 보면 상황논리로 정당화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누가 뭐래도 이들을 죽일 놈들이다.

무엇이 절대선인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정할 수 있는가?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의문들은 남아있다. 그럼에도 절대선은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절대선, 양심, 윤리성...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상황논리로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원칙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 속의 악한 생각을 제동 걸어줄 브레이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브레이크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세상에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선은 필요하다.

그리고 절대선이 자연적인 산물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절대원칙을 무효화시키면서 세상이 더 살기 좋아졌는가? 사람들 마음속의 선한 것들이 더 많이 표출되어지는가? 도그마는 없어졌을지 몰라도, 세상은 더 악해져간다고 생각지 않는가?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절대선이나 윤리성이 생겨났을까? 한번 망해보면 생길까? 몇천년 후에?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선은 자연적 산물은 아니다.

그 절대선이 인격적 원인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은 다음 단계의 이야기이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지만, 한편 신앙이 없이는 넘어갈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어느 단계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을 말하면 나는 신이 인간에게 양심을 주었고, 그 신이 절대선임을 믿는다. 일년 남짓 고민하고, 아직도 모든것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그래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것은 내 마음을 들여다 본 결과이다. 언젠가 이런 개인적인 고백을 정리하고 싶다.


2007. 10. 28. 15:06
요즘 들어 이런 마음이 듭니다.

1.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나를 바꿀 수는 없다.
2. 무엇을 가진들 내 마음의 빈 곳을 채울 수는 없다.

한번 시원한 샘물을 먹어봤던 사람은 갈증이 나면 다시 샘물을 찾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이성적으로 100% 이해할 수 없어도, 내 갈증을 채워줄 수 있다면 의지하고 싶은 마음. 이런 마음 너무 나약한 건가요?


2007. 10. 22. 21:39
그건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든 한번은 찾아올거라 생각했습니다. 

2007년 2월 13일... "쉐아르의 영적여행"이라는 블로그에 첫글을 담으면서 끝나지 않은 영적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한국 개신교회의 부패와 몰상식함이 한가지 축이라면, 기독교 교리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다른 한 축이였습니다.



나름의 행동 수칙도 세우고 어떻게 접근을 할까도 생각했었지요.


여러가지 이슈들에 대해서 나혼자 논란을 만들어내보기도 하고


스스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하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삶에 지쳐 그냥 의지하고픈 마음도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글을 안 썼습니다. 답을 찾았냐구요? 아니요 못찾았습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해답을 찾기 전에는 관두지 않겠다고 한 저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단 제 직업적인 문제를 위해 잠시 문제를 보류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쉽게 잊을 수 있는 건 아니더군요. 결국 다시 돌아갈 문제였습니다. 이제 두개의 블로그를 합쳐서 이곳에서 저의 영적여행도 같이 해나갈 예정입니다. 육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도 중요하고, 영적인 문제를 채우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

그래도 블로그를 없애지 않았던 것은 그때의 제 고민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읽어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글이라 하더라도 그런 생각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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