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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리고 글'에 해당되는 글 87건
2009. 9. 14. 02:31
CREAC이라는 글 쓰는 프레임이 있습니다. 법 혹은 원칙에 기반해 실제 상황에 적용하여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혹은 현상을 분석하는 경우에 사용하면 좋더군요. 법적 문서 작성시 사용하라고 배웠지만, 일반적 적용도 가능할 것 같아 소개합니다.

CREAC은 순서대로 C (Conclusion:결론) - R (Rule:원칙) - E (Explanation:설명) - A (Application:적용) - C (Conclusion:결론) 입니다.

C (Conclusion:결론)
읽는 사람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일단 결론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려줍니다. 이때는 최대한 간결한게 좋습니다.

R (Rule:원칙)
기본이 되는 원칙, 규칙, 혹은 법을 제시합니다. 앞으로 펼칠 이야기의 전체적인 아웃라인 역할도 합니다.

E (Explanation:설명)
R에서 제시한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원칙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그리고 근간을 이루는 철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은 뒤의 적용과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A (Application:적용)
R과 E에서 다룬 내용을 기반으로 논점의 대상에 적용합니다. 이때 효과적인 방법은 유추법(Analogy)입니다. E에서 언급한 경우와 현재 대상이 되는 경우가 어떻게 같은지(analogizing) 혹은 어떻게 다른지(distinguishing)를 설명하면서 R에서 제시한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근거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E와 A의 매칭입니다. E에서 제시한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A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E와 A는 순서대로 쓰고 마는 것이 아니라 초안을 따로 작성하고 비교하며 수정하는 방식이 효과적입니다. 원칙에서 다룬 모든 점이 사례에 적용되었는지 검토하는 순방향과, 실례를 기반해 하고싶은 이야기를 적은 후 필요한 이론적 근거를 추가하는 역방향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C (Conclusion:결론)
결론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만 이번에는 요약의 성격이 강합니다. 핵심 내용을 반복해서 글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강조합니다.

어떤 글이든지 목적에 효과적인 프레임이 있습니다. 이번에 제시하는 프레임은 원칙을 들어 실례를 설명하거나 원칙의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데 효과적인듯 합니다. 연습만 조금 하면 사용하기에 힘들지도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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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9. 9. 23:57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예상보다 그 때가 빨리 왔기에 일주일 세시간 블로깅이라는 스스로 정한 규칙을 어기고 포스팅을 합니다 ^^

오랜 블로그 이웃이신 inuit님이 책을 내셨습니다. 이 이벤트도 사실 inuit님이 하셨던 이벤트의 카피입니다.

책 제목은 'Yes! (가제)'라고 하네요. 뇌의 원리와 소통을 연결해서 글쓰기, 프리젠테이션, 설득, 리더십 대화, 협상, 갈등 대화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고 합니다. 커뮤니케이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한가지 알려드릴 거라면 inuit님이 먼저 시사회 이벤트를 시작하셨습니다. 최고의 유니크아이템인 가제본 상태의 책을 받을 수 있는 보기드문 이벤트입니다. 이 이벤트에 참가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먼저 여기를 시도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제가 내놓는 아이템은 그냥 일반 아이템이니까요 ^^

어쨋든 제가 준비한 이벤트입니다.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inut님 포스팅 가져다 문장만 바꾸었다는... ㅡ.ㅡ)
 
inuit님 책 출간 기념 쉐아르 협찬 이벤트

1. 상품
- 당첨자 세 분에게는 inuit님의 신간 'Yes! (가제)'을 증정합니다.

2.응모방법
- 이번 책이 소통에 관한 책이니, 소통에 관련된 사례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나 가정등) 소통이 어려웠던 경우를 극복하신 성공사례나, 참담했던 실패사례도 좋습니다.
  혹은 훌륭한 소통을 위한 자신만의 노하우, 팁도 좋습니다.
- 포스팅한 글을 지금 이 포스팅에 트랙백 해 주세요.
- 시사회 이벤트의 응모마감 이후인 9월 11일에 시작합니다.
- 마감은 2009년 9월 19일 (토) 23:59분입니다.

3. 선정방법
- 선정은 일단 제가 합니다만... 저자의 의견을 감안하겠습니다 ^^
- 선정되신 분에게는 책이 온라인 서점에 풀리자 마자 제가 주문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 동점자인 경우:
  레이디 퍼스트 ^^
  그리고 선착순 우선입니다.

4. 응모자격
- 트랙백을 날릴 수 있는 블로거로 자격을 한정합니다.
- 해외거주자는 감점 많습니다.
(배송비 압박 ㅠ.ㅜ)

5. 참고사항
- 읽고 리뷰 꼭 써 주셔야 합니다. 블로거의 기본 덕목입니다
- 당선자는 배송을 위해 주소와 연락처 알려 주셔야 합니다. (선정통보 후 비밀글로)

많은 응모 부탁드립니다 ^^


2009. 8. 27. 19:17
설득의 논리학 - 10점
김용규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내가 쓰는 글의 팔할은 논리적인 글인듯 하다. 업무 관련된 글이야 다 논리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블로그에 쓰는 글도 감성보다는 이성적인 글이다 보니 어쩌면 팔할이 더 될 듯하다. 그럼에도 돌아보니 논리를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못내 걸렸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계속 글을 쓰며 나름 개발한 것은 있으나 체계적인 접근이 없는 것 같아 아쉬웠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처음 선택한 책이 <설득의 논리학>이다. 설득이라는 한정된 영역 뿐 아니라 논리학 전반에 대한 안내서라는 inuit님의 평이 큰 작용을 했다. 평 그대로 작가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세의 토마스 쿤, 리처드 로티까지 시대를 넘나들며 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생각을 해왔는지 설명을 한다. 예증법이나 삼단논법과 같은 논리학의 기본 뿐 아니라, 논리와 자연언어의 대응, 토론술과 논쟁술, 그리고 포스트 모던 시대의 신실용주의 진리론까지 다양한 주제를 섭렵한다.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 가진 장점 중 하나다 보니,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에 생각을 더하였을 것이다. 다른 이를 설득하기 위해 좀더 논리적이고자 노력했을 것이고, 진정 참된 것이 무엇인가 찾고자 궁리하였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노력이 논리학이라는 큰 줄기에 엮이어 설명되어졌다. 그 고민들의 결실을 사용해 내 글에 혹은 말에 설득력을 더하겠다는 (책 본연의) 목적보다 그들에 대한 경외감이 우선한다. 무엇보다 작가의 끝을 짐작하기 힘든 박학다식이 읽는 내내 감탄을 넘어 질투마저 느끼게 했다. 이 정도가 되어야 책 좀 읽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ㅡ.ㅡ

논리학이란 딱딱할 수 있는 학문을 다름에도 책은 쉽게 읽혀진다. 흐름에 따라 적절하게 주어지는 예와 중간 정리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 에 대해 한번이라도 고민한 적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한다. 분명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2009. 7. 14. 14:03
The Merchant and the Alchemist's Gate
Ted Chiang, Subterranean Press (2007, 1st Ed.)





단번에 끝내지 않고 묵혀두었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마저 읽고는 테드 창에 완전히 꽂혔다. 마음이 쏠리면 만족할만치 파고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에 그의 다음 작품도 찾아 읽게 되었다. 2002년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내고 5년이나 잠잠[각주:1]하다가 발표한 것이 이 작품이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이라 번역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다. 2007년 초판 발행 이후 절판 상태라 미국에서도 이차시장을 통해서만 (비싼 값을 치루어야) 구할 수 있는 상황[각주:2]이지만, 다행히 SF선집에 포함이 되어 읽어볼 수가 있었다[각주:3].

이 이야기는 시간여행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웰즈의 타임머신이나 백투더퓨처의 드로이안과는 다르다. 시간여행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이 책의 주제가 아니다. 시간여행의 메카니즘보다는 '과거와 미래는 하나다'라는 이야기의 주제에 테드 창은 집중한다.

노비코프의 자체 일관성 원칙(Novikov Self-Consistency Principle)이라는 것이 있다.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여러가지 모순들 - 예를 들어 과거에 돌아가 이전의 자신을 죽인다던가 하는 - 이 실제로는 있을 수 없다는 원리이다. 과거에 돌아가서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다. 과거 역사에 개입하는 것도 크게 보아 미리 정해져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과거도 바꿀 수 없고 미래도 바꿀  수 없다. 과거나 미래는 하나이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과거와 미래가 서로 얽히며 영향을 주고 받지만 결국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맛있게 이야기한다. 미래과 현재에 영향을 주고 현재가 과거에 영향을 주지만 그 모두가 잘 짜맞혀진 하나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의 한 조각도 바뀌지 않는다.

작품마다 다른 틀 안에 이야기를 담을 줄 아는 테드 창은 여기서도 스타일리스트의 면모를 과시한다. 이번에는 가지고 나온 것은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다. 무대는 아라비아. 시간여행이 가능한 것은 알라의 뜻이다. 큰 이야기 안에 세편의 작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현명한 자가 등장하고 어리석은 자도 등장한다. 육체에 대한 욕망도 있고 지고 지순한 사랑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다 읽고 나서 느낌은 '이 작가는 천재다'였다. 이전보다 더 성장했다고 할까? 역시나 이 작품도 네뷸라 상과 휴고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책을 구할 제대로 된 경로도 없고, 아직 번역도 안되어 있지만 SF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구해서 읽어보기 바란다. 지적 호기심을 제대로 충족시키는 즐거운 시간이 될 것임을 장담한다.




 
  1. 중간에 네이쳐지에 기고한 작품이 하나 있으나 '인류 과학의 진화'처럼 가상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리포트이다. [본문으로]
  2. 참고로 60여 페이지 밖에 안되는 이 이야기는 하드커버에 담겨 $20.00에 팔렸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2002년에 출간되고 5년만에 발표되는 테드 창의 작품이다보니 출판사에서 바가지를 좀 씌워도 되겠다 싶었나 보다. 예상대로 초판은 매진되고, 아마존에서 중고는 $60, 새 책은 $120 이상에 거래되고 있다. 도서관에서도 이 책을 빌릴 수 없다. 목록에는 있는데 책이 없는 것은 분명 책을 빌리고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배상하고 책을 가진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그게 더 싸게 먹히니까. [본문으로]
  3. 사실은 책을 구할 수 없기에 어둠의 경로로 구해서 먼저 읽었다. 이후 SF 선집에 담겨있다는 것을 알고, 저작권 위반에 걸리지 않을 소스를 마련했다 ^^ [본문으로]


2009. 7. 11. 09:08

당신 인생의 이야기 - 8점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설정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판타지라 분류한다면 SF(Science Fiction)도 엄밀하게  따지면 판타지이다. 그렇기에 도서관에 가면 판타지와 SF는 항상 섞여있고, 판타지와 SF를 같이 다루는 잡지가 60년 동안 장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SF를 일반적인 판타지와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조금이나마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가상의 세계의 출발점이 순수한 상상에 의존하는 판타지와 달리, SF는 과학이 단초가 된다. 현재 있는 과학이론을 기반으로 미래를 상상할 때 이만큼까지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논리적 연상이 SF의 특징이다.

테드 창의 소설은 이 점에서 특이하다. SF 소설의 문법을 따르되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환타지에 가까운 씨앗에서 시작된다. 천사가 종종 등장해 인간에게 흔적을 남기고 사람이 죽어 천당에 가는지 지옥에 가는지 알 수 있는 세상이라면. 바빌론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관으로 SF를 쓴다면.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알되 거기에 순응하는 종족이 있다면. 이름만으로 진흙 인형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이 있다면 등. 그런 면에서 과학소설(Science Fiction) 작가라 부르지않고 더 넓은 분류인 상상소설(Speculative Fiction) 작가라 정의한 위키피디아의 정의가 이해가 된다. 

테드 창은 스물네살에 데뷰작 '바빌론의 탑'을 발표한 후 최연소및 데뷰작에 의한 최초의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네뷸라상을 받았고 이 작품으로 휴고상 후보에 오르는 화려한 등장을 했다. (참고로 테드 창은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나는 그때 도데체 뭐했나 ㅡ.ㅡ) 그럼에도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11개의 작품만을 발표했고 그중 앞의 8편을 묶은 것이 '당신 인생의 이야기'이다.

  • 바빌론 시대의 세계관으로 바벨탑 사건을 썼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바빌론의 탑'
  •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지능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지적인 유희 '이해'
  •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실한 명제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 '영으로 나누면'
  • 흔한 외계인 이야기에 담겨진 현란한 언어학과 운명론 이야기 '네 인생의 이야기'
  • 이름에 물리적 힘이 있다면 - 연금술사 같은 분위기의 '일흔 두 글자'
  • 건담 만화 같은 상상 속 세계에 대한 진지한 고찰 '인류 과학의 진화'
  • 신과 지옥이 현실적 증거를 보여준다면 모두가 신을 믿을까에 대한 질문 '지옥은 신의 부재'
  • 기술을 통한 (의식 발전의) 지름길이 존재할수 있을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타리'

작품 하나 하나 탁월하다. 참신하다는 말이 진부하게 들릴 새로운 (때로는 비과학적인) 세계관을 설정해놓고는 그때부터는 과학적으로 사유하며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첨가되는 과학 및 여타의 학문도 정교하다. 이름에 힘이 있다는 마술 같은 이야기위에 진지한 분석기법을 도입하는 식이다. 빛은 최고로 빠른 길을 따른다는 페르마의 원리를 목적론적 관점에서 해석할 때는 철학적 성찰의 모습까지 보인다. 모든 것이 지적 호기심을 유감없이 자극하며 꽤나 유쾌하게 진행이 된다. (출판사의 이름처럼) 행복한 책 읽기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몇개의 이야기에서 한껏 이야기를 부풀려놓고는 급하게 쓸어담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발상이나 전개는 대단히 흥미로운데 용꼬리로 전락하는 작품들이 있다. 정말 재밌게 보던 드라마가 사정상 조기종영하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모든 작품이 읽을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테드 창의 작품을 기다리는 사람은 많다. 어떤 이는 직업(현재 Technical Writer 일을 하고 있다)을 때려치고 글만 쓰라고 불평한다 ^^ 나도 그가 작품을 많이 내길 바란다. 최근에 낸 'The Merchant and the Alchemist's Gate'는 60여 페이지밖에 안되는 책임에도 100불 정도의 가격에서 거래가 되고 있다. 다음에는 인공지능에 관한 글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의 새로운 작품이 기대가 된다.

책을 읽으며 'X 특공대'를 보며 인간세계와 육차원간의 전쟁 이야기를 쓰던 (아쉽게도 이 작품은 프롤로그만 쓰여지고 중단되었다) 열살의 소년을 기억했다. 그 소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책을 덮고 나니 어쩌면 이젠 중년이 되어버린 그 소년이 나를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 그런 상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2009. 6. 30. 15:36
블로그 2주년을 맞으며 작은 이벤트를 만들었습니다. 이벤트에 참가하는 과제로 2007년 10월 2일에 올렸던 '나를 만든 다섯권의 책'과 같은 포스팅을 올리고 트랙백을 걸어주십사 부탁했습니다. 다섯권이 부담이 되실 것 같아 권수는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한권도 괜찮았지요.

이벤트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초하님도 제안하셨고 저도 심중에 생각해두었던 것이 있는지라 ^^ 같은 주제로 릴레이를 시작합니다. 릴레이 규칙은 멀리서 찾지 않고, 릴레이의 황제, 릴레이의 롤모델, 릴레이의 최종 권위 ^^ inuit님의 규칙을 기반으로 만들었습니다. 앞선 릴레이 주자 표시도 나의 독서론 릴레이와 같이 하시면 됩니다.

1. 릴레이 규칙

1. 나를 만든 []권의 책을 적어주세요. 권수에 제한은 없습니다.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7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inuit님의 릴레이의 오상 참조

아직까지 나를 만든 다섯권의 책에 변화가 없기에 제 포스팅은 이전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이거 반칙일까요? ^^)

2. 다음 받으실 분

이미 이벤트에 참가하신 분들이 있기에 새로 다음 주자를 정할 필요를 못느꼈습니다. 이벤트에 참가하신 네분중 초하님brandon님에게 바톤을 넘깁니다. 두분다 이미 포스팅을 작성하셨기에 바로 다음 주자로 넘겨주시면 됩니다 ^^ 다만 포스팅을 릴레이 형식에 맞추어 바꾸어 주셨으면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언제든 자발적으로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 쉽지 않은 주제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블로그 이웃분들이 어떤 책의 영향을 받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2009. 6. 30. 15:00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8점
옥성호 지음/부흥과개혁사

한국 기독교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크나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는 '대교회 지향주의'다. 교인수가 힘이 되고 예배당의 크기가 능력을 뜻하는 한국의 기독교가 부패하는 것은 어찌보면 '순리'이다. 그렇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가 자본주의 발전에 공헌했다고 한다. 이제 자본의 논리가 기독교를 썩게 하고 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통해 '진리에 대한 자존심'을 버리고 세상 학문에 의존하는 기독교를 비판한 저자는 이번에는 마케팅에 대해 이야기한다. 교회가 마케팅의 원리에 의존하는 이유는 결국 한가지다. 더 많은 사람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교회는 구매자(교인)의 욕구를 잘 파악해야한다. 그리고 복음을 구매 욕구에 맞추어 적절히 상품화해야한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약점은 감추고 강점은 부각해야한다. 남는 것은 현대인의 구미에 잘 맞는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메시지 뿐이다. 이것이 마케팅 교회의 모습이다.

MBA를 취득하고 세일즈와 마케팅 부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저자는 마케팅의 정의로 책을 시작한다.  이어서 현대사회의 두가지 특징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에 '옳은 것'이 아닌 '원하는 것'을 하라 (포스트모더니즘)"와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무엇이든 하라 (프래그머티즘)"이 교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런 시대적 배경하에 부흥을 절대시하는 주장과 종교 다원주의가 교회안에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이야기한다.

교회가 사람 모으는 것을 우선시할 때 복음은 상품화된다. 저자는 현대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고 많은 교회의 벤치마킹이 되는 두 교회에서 그 모습을 찾는다. 교회를 찾는 이와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윌로우 크릭,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채우려는 새들백 모두 복음이 변질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숫자가 우상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따라 오는 교회간의 경쟁과 교회 성장을 위한 컨설팅을 비판한다. 복음을 들고 세상과 경쟁해야할 교회가 서로 경쟁하기에 바쁘게 된 것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복음의 진정한 회복을 요구한다. 마케팅 교회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거룩한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복음은 (약점은 감추고 강점만 강조함으로) 설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선포되는 것이다. 교회의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지식은 필요하나, 복음을 세상지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지식을 복음에 비추어 살펴야하는 것이다. 가감되지 않은 '거친 십자가'의 복음을 그대로 전파하는 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다.

변질된 교회의 모습을 개탄하며 절대적 믿음으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옥성호 형제의 외침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몇가지 아쉬움과 우려가 있다.

첫째,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영혼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 그렇다면 전달하는 사람이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설교자가 전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듣는 이가 가져야할 자세지만, 중언부언과 우왕자왕으로 듣는 이들을 모두 졸게 만드는 설교자가 주장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절대주권에 대한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자칫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상의 노력은 모두 세상에 영합하는 행동처럼 비쳐질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하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다.

둘째, 사람을 모으려는 노력은 두가지로 구분되어질 수 있다.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어떻게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과 교회의 신도수를 늘리기위해 반짝 세일을 하는 것은 출발점이 다르다. 윌로우 크릭이나 새들백이 (저자가 말한대로) 복음을 변질할 위험은 있으나, 세상에 큰 해를 주는 것은 매출 신장을 위해 마케팅을 사용하는 (특히 한국의) 교회들이다. 이들 교회에 더 큰 비판이 가해져야하지 않을까?

C.S 루이스는 사람을 나눌 때 두가지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한가지는 원안의 사람과 원밖의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으로는 끊임없는 분열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다른 한가지는 진리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과 진리에서 멀어지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윌로우 크릭과 새들백은 진리를 향해 움직이는 교회이다. 시행착오를 범할 수는 있으나 진리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는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교회는 스스로 잘못을 고쳐나갈 것이다. 문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저버리는 목회자와 교회들이다.

셋째, '정의'와 '사랑'에 대한 강조이다. 친근한 아버지의 이미지만 강조되고 죄를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은 사라진 교회는 분명 문제이다. '거룩한 하나님'을 모르고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을 모른다면 또한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 '정의'를 강조하다 '사랑'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순수성을 지키려는 열정은 복음을 삶의 여러 부분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변질'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만들 우려가 있다. 하지만 복음은 크다. 하나의 시각으로 제한할 수는 없다. 미술에도 적용할 수 있고, 영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 결혼한 적 없는 예수님이지만 결혼하는 사람, 이혼으로 상심한 사람 모두 복음에서 자신들에 대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가감없는 복음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자칫 다른 이들에 대한 불필요한 정죄에 빠져서는 안된다. 방향성이 같다면 본질이 아닌 사소한 차이는 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에 영합하는 얄팍한 메시지에 대한 옥성호 형제의 비판은 정당하다. 복음의 능력은 숫자에 있지 않다. 예수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않았다. 옆에 두고 길러낸 제자가 고작 열두명 (가룟 유다 포함),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까지 기다린 사람이 120명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멀쩡한 부인 놔두고 정부와 함께 교회에 가서 바람피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한국 교회는 하루에도 열두번씩 스스로에게 되물어야한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과연 성경적인가?"




2009. 6. 24. 14:14

나는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머리속이 복잡하기에 몸이라도 편히 놔두고 싶어서랄까? 운동하리라 매일 결심해도 그저 결심만으로 끝나고 난다. 그런데 병이 나버렸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아니 내가 과연 움직이고는 있는지 몸을 사용하여 현재형으로 확인하고픈 욕망이 생겨버렸다. 물집이 생기고, 온 몸이 쑤시더라도 까미노를 따라 '순례'의 길을 걸어가면 내가 '더' 살아있을 것 같다. 지금 내 관심과 힘을 요구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몇달 떠났다 오면 더 행복해질 것 같다.  삶이 정리가 될 것 같다.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다. <나의 산티아고>가 가지고 온 부작용이다.

이  책은 '툭하면 넘어지면서도 오래 걷기와 등산을 좋아하는' 저자가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산티아고까지의 800킬로미터의 '카미노'를 34일간 걸어가며 만났던 사람들과 생각들의 기록이다. 출발하기 전 가졌던 '왜'라는 의문, 순례를 시작하면서 가졌던 걱정, 까미노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준 뜻하지 않은 도움들, 서서히 '무정형의 공동체에 합류'하는 과정, 한 방향을 가고 있기에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그 모든 나날을 통해 보게되는 자신에 대한 고백.

아름다운 '살아있음'의 기록 때문인가. 책을 읽으며 까미노 근처에 가보지도 않은 내가 여행을 같이하는 느낌을 받았다. 서서히 바뀌어 가는 애런의 모습에 흐믓해하고, 다른 이를 탓하기보다 아름다움을 택한 일마즈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수호천사' 같이 푸근한 조와 조지가 보기 좋았고, '예슨을 눈 앞에 두고도 별로 산 것 같지 않다'는 신디가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빌어주었다. 남동생의 사진을 뭍고 혼자 걸어가는 장면에서는 나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하다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진실된 마음을 담은 스토리의 힘은 역시 대단하다.

무엇보다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닌 '카미노' 위의 현재로서의 삶이다. '산티아고의 순례자'가 아닌 '카미노의 순례자'가 되는 것이다. 순례를 마친다 하더라도 '지금의 나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달라지겠느냐'마는 그래도 한번 '과정을 사는 삶'을 살아 보고 싶다. '무엇을' 하는 것에서 떠나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집중하고 싶다. '사소한 일에도 금방 감동할' 수 있도록 까미노를 걸으며 '죽은 감각을 깨우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순례자들에게는 '카미노를 떠난 뒤부터, 마법의 주문이 풀려버린 뒤부터 진짜 순례'가 시작되듯이 카미노에 가지 못함을 두고 두고 한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카미노는 아니더라도 나는 지금 나의 길을 가고 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내가 지나온, 그리고 앞으로 가야할 길이 내 '순례'의 길이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상상으로 내가 아는 길의 선물을 더 이상 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가는 길에 충실해야지. 어느날 카미노를 걸으며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을 회상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만약 가게 된다면 가족들을 다 데리고 가고 싶다. 아이들이 안된다면 아내와 둘 만이라도 가고 싶다.

이 책은 내 블로그 생활의 열매 같다. 블로그 이웃분인 산나님이 쓰신 책이다. 평소 느꼈던 것이지만 산나님은 글을 너무 잘 쓰신다. 책을 받고 앞부분 세 페이지를 읽고는 읽고 있던 책들을 끝내기 위해 억지로 덮었다. 다시 책을 펼쳤을 때는 마치기까지 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역시 블로그를 통해 알게된) 참으로 고마운 분이 이 책을 선물해 주셨다. 얼굴 한번 보지 못했지만, 친구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통하는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 이웃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하나의 커다란 길이라면, 온라인이라도 마음 통하는 사람들과 느끼는 연대감이 '카미노 순례자'들간의 그것보다 못하리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같은 방향으로, 서로 위하며 나아간다면 결국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리적인 만남은 없더라도 생각하면 푸근한 사람들을 알게되어 참 기분이 좋다. 그들이 바로 가상의 카미노 위에서 만나는 가상의 동반자들이라고 한다면 나 혼자 너무 앞서나가는 걸까? ^^




2009. 6. 21. 14:04
묵상하는 삶 - 8점
켄 가이어 지음/두란노

'묵상'이라는 용어를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서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묵상'은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함'이라 정의되어 있다. 비슷한 말로 '명상'이 있다. '명상'도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함'이라 정의가 되어 있으니 별 차이가 없는 듯 하다. 하지만 묵상은 명상과는 다르다. 명상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속을 비어 고요하게 만드는게 목적이라면, 묵상은 곰곰히 생각하여 뜻을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명상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라면, 묵상은 절대자를 향하는 것이다. 명상은 버리기 위함이고 묵상은 찾기 위함이다.

세상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있고, 세상 모든 일에 그분의 계획하심이 있다는 것이 믿음이다. 분주한 생활에 스쳐지나는 일상이지만, 잠깐 멈추어서서 곰곰히 생각하면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묵상이다. '묵상하는 삶'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주변에서 하시는 일에 주목하고 수용하며 반응하는 삶'이다.

켄 가이어는 나와 이웃, 모든 인간, 그리고 모든 생명이 성스러움을 담고 있기에, 그 성스러움을 놓지지 말아야함을 이야기한다. '그런 (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찾아올 때 알아볼 수 있도록, 그런 순간들을 존중할 수 있도록' 걸음을 늦추고 '내가 그런 순간들을 만지고 그런 순간들이 나를 만지게 하지 않고는 그냥 보낼 수 없기에' 반응하기로 결심하기를 권면한다. 

성경은 묵상의 대상을 씨로, 묵상하는 이를 토지로 비유한다 (마 13장). 씨는 말씀이요 지혜이다. 말씀은 성경에 담겨있고, 지혜는 '일상의 순간'속에서 우리를 부른다. 씨는 어디에나 뿌려진다. 눈을 들어, 그리고 마음을 열어 바라보면 말씀과 지혜는 널려있다. 받는 토양이 중요하다. 좋은 토양을 결정하는 것은 민감함과 겸손함이다. '위쪽 말고는 더 바라볼데가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철저히 떨어져,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구걸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그런 것이다.

민감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은 씨앗이 성령을 통하여 생명을 얻고, 사랑을 통하여 자라난다. 자기전 꼭 하나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오늘 사랑하며 살았나?'라는 질문이다.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했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오늘 사랑하며 살았나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직장 상사에게는, 동료에게는, 그리고 나에게조차 족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것으로 족하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것으로 족해야한다."

묵상하는 사람이 되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말씀을 묵상할 수 있고, 영화를 묵상할 수 있고, 사람을 묵상할 수 있고, 연극을 묵상할 수 있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순간을 묵상할 수 있는 '민감함'을 가질 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영원히 바뀔 수 있다. '묵상하는 삶의 열매는 변화된 삶이라야 한다.' 내가 아니라 그분의 리듬에 맞추어 살 때 우리 삶의 낭비는 없어지고, 진정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얻을 수 있다. 내가 변할 때 다른 이들에게 울림을 만들 수 있다. '나의 삶이 온세계가 동작을 멈추고 들을만큼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때'에 변화는 전염된다.

켄 가이어의 '묵상하는 삶'은 기독교인을 위해 쓰여진 책이다. 그럼에도 모든 이에게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이유는 우리 삶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바쁘기 때문에 듣지 못한다. '하루라는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양을 쑤셔 놓도록 삶이 압박을 가해 올 때, 우리는 활자 크기를 줄이고 문단을 합하고 공간을 없애고 여백을 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삶이 여백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깨알같은 글자라면 읽기가 힘들다. 읽다가 지치면 어쩌면 우리는 읽으려는 노력조차 깨끗이 중단하고 말지도 모른다.

잠깐 멈추어 서서 내가 들어야할 음성이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하는 삶. 그런 삶이 필요할 때다.


2009. 6. 8. 16:59
제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이웃분 한분이 제 글을 좋게 봐주시고 어떻게 글쓰기를 연습했는지를 물어보셨습니다.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면 저는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글이 좋다라는 칭찬을 받으면 너무 좋아라 합니다 ^^ 하지만 그건 제 마음이고 저는 저보다 훨씬 글을 잘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요. 사족이 좀 길었네요. 어쨋든 제가 해온 것을 정리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이라 싶어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글을 쓰면서 제가 사용하는 원칙들은 다음의 두개 포스팅에 정리가 되어 있기에 반복은 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좋은 문장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을 연암 박지원의 문장론에 얹어 정리한 글이 있습니다. 제가 지향하는 문장의 모습은 이런 것입니다.
추가로 나름대로 글쓰기 수련을 어떻게 해왔나 적어봅니다. 의식적으로 한것도 있지만, 대부분 어쩌다 보니 지금에 이르른 것입니다 ^^

1. 많이 읽고 많이 쓴다

스티븐 킹의 창작론에도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일단 많이 읽고 많이 써야합니다. 돌아 보니 저는 글 쓸 기회가 많았습니다. 고등학교때 학교 교지의 편집을 맡았었고, 대학/청년 시절 교회 소식지를 맡으면서 수없이 땜방 글을 써야 했습니다 ^^ 한동안 글을 안쓰다가 사진을 찍으면서 가입한 포클이라는 동호회의 게시판에 글을 쓰면서 다시금 글쓰는 재미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문을 닫은)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꾸준히 글을 쓰다가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1.1 블로그와 일기는 최고의 연습 공간이다.

다른 분들은 인정안하실지 모르지만 ㅡ.ㅡ, 2년전에 이 블로그에 올리던 글과 비교한다면 저는 제 글이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비공개 글까지 354개의 글을 쓰면서, 또 많은 분들과 댓글로 소통하면서 반단계 정도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꾸준히 올리면서 다른 분들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블로그는 글쓰기에 관한한 최고의 수련장소입니다. 글에 자신이 있던지 없던지 일단 시작하면 됩니다. 꾸준하면 됩니다.

블로그가 구경꾼에게 열려진 연습공간이라면 일기장은 방문 닫힌 연습실입니다. 나만 볼 수 있는 이 공간을 통해 솔직한 마음을 글에 담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일기를 쓸려면 저는 날자가 적혀있는, 그래서 매일 빠짐없이 써야하는 일기장을 추천합니다. 무엇이 되든 매일 적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저는 사용을 안했지만, 일기와는 약간 다른 개념의 모닝 페이지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2. 좋은 글을 보고 따라 해 본다

스티븐 킹은 어느 글을 읽든 도움될 점은 있다고 합니다. 좋은 글에서는 어떻게 써야하는가를 배우고, 나쁜 글에서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구요.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어차피 한정된 시간인데, 이왕이면 좋은 글을 읽는게 더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을 읽고, 그 특징을 파악해 따라 해봅니다. 자신의 문체와 다를수록 도움이 됩니다. 제 경우는 김훈과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따라해봤습니다. 특히 김훈의 문체를 따라 하며 문체가 좀 달라졌습니다. 그의 스타일이 너무 강해 그 냄새를 지우기에 시간이 좀 걸릴 정도였습니다. 블로그 이웃분중 egoing님의 스타일도 따라 해본 적도 있고, 맛있는 글쓰기로 유명한 허지웅씨를 벤치마킹하기도 했습니다. 맘에 드는 글이 있으면 특징을 파악해 과하지 않은 한도내에 적당히 모방을 해보는 겁니다.

3. 여러가지 스타일을 섞어서 써본다

크게는 경어체와 평어체가 있습니다. 제 경우 서평과 종교/사회적 발언은 평어체를 사용합니다. 독백이나 기분이 가라앉아 있을 때도 평어를 사용합니다. 그 이외에는 존대어로 글을 쓰지요. 각각 쓰는 방법이 약간 다릅니다. 경어체 문장을 단지 끝의 조사만 바꾼다고 평어체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부적으로 나가면 여러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될 수 있는데로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해봅니다. 작문책 같은데에 정리가 잘 되어 있겠지요. 하지만 어떤 글에는 어떤 스타일이라는 식으로 정형화될 필요는 없다 생각합니다. 글의 내용을 생각하다보면 어떤 스타일이 좋겠구나 하는 감이 생기지요.

4. 글을 쓰기 전에 60% 정도는 미리 구상을 해둔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지 말고 일단 써라 하는데, 저는 그렇게 안되더군요. 서론, 본론, 결론을 어느 정도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그렇다고 내용 전부를 생각해둘 필요는 없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새로운 생각이 들기에 결과는 미리 생각한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되 닫아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5. 자신의 글을 끊임없이 읽고 수정한다

아신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는데 제 블로그의 글 중에는 30번 이상 수정된 글도 있습니다. 댓글이 달렸다거나, 관련된 글을 쓰면서 들추어 볼 때, 혹은 단순히 제 글을 다시 보고 싶을 때 (나르시즘? ㅜ.ㅜ), 맘에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수정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써야하는가 원칙이 차곡 차곡 마음에 쌓입니다. 나름대로의 스타일도 생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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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덧붙힌다면 글을 즐기시라는 겁니다. 좋은 글을 쓰겠다는 부담을 너무 가지면 글쓰기를 즐길 수는 없습니다. 좋아하지 않고서는 계속 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일단 쓰는 것을 즐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