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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24건
2014. 10. 30. 10:17
페이스북이나 블로그를 통해 제 글을 접한 분들은 목사나 교회에 대한 비판을 보며, 제가 교회에서 소란깨나 일으키는 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입니다 (근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안하면 어쩌죠? ^^). 부족하지만 나름 교회와 목회자를 섬기려 애씁니다. 소위 '목사편'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출석하는 교회 목회자에 대한 제 자세가 항상 '비판적 지지'이기 때문입니다. 질서를 위해 목회자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각자 역할이 있는데, 그 역할을 넘어서 다른 이의 영역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면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서를 위해 리더를 존중하고 지지합니다. 아무래도 교회 생각은 리더가 많이 할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춥니다. 목회자가 평신도에 비해 하나님과 더 가깝다거나, 하나님이 목사에게만 부여한 특별한 영적권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회자 욕하면 벌 받는다는 두려움 그런거 전혀 없습니다. 

오랜 교회 생활과 여러 아픈 경험을 통해 정한 자세입니다. 전 이 태도가 성경적이며 또한 합리적이라 믿습니다. 목사를 하나님의 종이라 생각하며 잘못을 무조건 덮으려는 신도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저 모양이 되었습니다. 반면 목사 별거 아니라며 질서를 깨뜨리는 자세 또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간단하진 않습니다. 남의 교회 교인들에게 훈계 두는 건 쉬운 일이지만, 내 교회 목사와 관련된 일이면 어떤게 옳은 태도인지, 어디까지가 비판이고 어디까지가 비난인지, 어디까지가 순종이고 어디까지가 맹종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전 이 자세를 항상 유지하려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바라기는 '지지'의 영역에 남는 것이지만, 아쉽게도 '비판'해야 한다면 애정어린 비판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멈추게해야 할 때는 멈추게도 해야겠지요.




2014. 10. 24. 14:03

다음에서 메일이 왔더군요. 제 블로그에 올린 글 중 존 비비어의 <순종>에 대한 평이 피해자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신고가 들어왔답니다. 신고자 이름을 보니 '한국인터넷선교네트워크'네요. 오랜만에 보는 이름입니다. 


누구를 비판했었지 생각이 안 나더군요.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기반으로 포스팅했었기에 페이스북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은 문장이 보입니다. 


"실로 한국 목사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다.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 이렇게 교인들을 세뇌시켜왔기에 조용기나 오정현 같은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 책대로라면 조용기의 횡령을 도와주는게 마땅한 순종의 훈련이니까 말이다." 


이 문장이었을 겁니다. '조용기의 횡령.' 그런데 이게 참 웃긴게 조용기가 횡령으로 3년 징역 실형 받은 거는 이미 뉴스 보도가 된 사실입니다. 혹시 집유 5년에 벌금 50억 내고 감옥에 안갔다고 무죄판결이라도 받았다 생각하나 본데 분명 실형입니다. 세상 다 아는 걸 가지고 블로그 글 몇개 내려서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 단체는 예전부터 유명했지요. 대형교회 목사들이 뒷돈을 대는지 조용기, 김홍도, 곽선희 이런 인물들에 대한 비판이 있으면 신고해서 일단 글을 내리게 만들죠. 하지만 이의신청을 하면 반박조차 제대로 못하는 곳입니다. 반박할 수가 없지요. 비판하는 내용이 사실이니까요. 


그럼에도 단체 이름에 '선교'를 집어넣고 지랄들을 하십니다. 아. 죄송. 아까 감정대로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는데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네요.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엉망이기에 이런 단체들이 날뛰고 있는지. 이러고 혹시 자기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겠죠? 설마 그럴리가요. 그냥 돈받고 하는 거라 믿겠습니다. 하여간... 


정말 한심한 지경입니다. 이 꼴을 어째야 할까요 ㅡ.ㅡ


==============


이 글을 혹시 보게될 한국인터넷선교네트워크 관계자에게 알립니다. 원본을 저장해놨기에 블라인드 요청해야 다시 올리면 그만입니다. 내 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비겁하게 뒤에서 그러지 말고 나를 직접 고소하기 바랍니다. 다만 내가 직업이 변호사라 법을 좀 압니다. 그러니 덤빌 때는 잘 준비해서 덤비시길. 그리고 왠만하면 이름에서 '선교'는 없애길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개나 소나 달고 있을 이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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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4. 12:00

페이스북에 동성애 커플의 웨딩케익 만드는 것을 거부했다고 15만불 벌금을 내야될 제과점에 대한 기사를 소개하며 역차별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후, 여러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그 동안 나눈 이야기를 포함해, 제 생각과 입장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저는 두개의 주제를 다루려 합니다. 신앙의 문제와 법의 문제입니다. 연관이 있지만, 독립된 생각입니다. 아마 동성애 커플과 기독교인의 위치가 바뀌었더라도 저는 역차별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먼저 크리스찬으로서 동성애를 어떻게 보는가입니다. 이 문제는 현대 기독교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질문일 겁니다. 가장 쉬운 행동은 인정하는 겁니다. 발판은 마련되었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동성애를 더 많이 인정하는 추세입니다. 아니 오히려 동성애를 반대한다 말하면 공격을 받습니다. 쉽게 성경의 가르침은 시대에 맞추어 다르게 해석해야한다는 포지션을 취하면 됩니다. 그럴수 있습니다. 구약의 많은 율법은 이미 현대에 적용되지 않는다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서는 명확히 잘못되었다 말한다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성애를 죄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성경을 들어 저를 설득하지 않는 이상 이 생각을 바꿀 의향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동성애가 "더 나쁜"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매일 짓고 있는 죄와 마찬가지인 여러 죄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동성애자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저들보다 더 선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틀린 것을 그저 다르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병욱이 죄를 지었다 말하는 것처럼 동성애도 고쳐야할 죄라고 저는 믿습니다. 요즘 세상에 공공연하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압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미안합니다. 저를 욕하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그 욕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이 동성애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말한다 믿습니다. 


저는 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렇기에 차별이라는 주제에 민감합니다. 저는 어떤 차별도 반대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법으로 막아야할 차별과 법으로 보호받아야할 개인의 의사표현 사이의 선을 긋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죠. 제과점 주인이 전두환의 생일 케익을 주문 받았다고 합시다, 전두환이 한 짓을 싫어해 그 주문을 거절한다고 법으로 처벌을 받을까요? 전두환이 개인적으로 기분나쁘다고 어떤 행동을 취할 수는 있지만, 정부가 그 제과점 주인에게 벌금을 물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칭찬할 겁니다. 반대로, 흑인이기에 케익을 만들어줄 수 없다고 한다면 당연히 법으로 처벌받아야 합니다. 


이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선을 그어야합니다. 어디서부터 법으로 금지해야할 차별이 시작하는지요. 여러 요소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거절했는지, 거절당한 집단/개인이이 보호받아야할 약자인지. 삶의 기본적 권리가 침해되었는지, 거절당함으로 겪게되는 불이익이 얼마나 큰지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레곤주에는 Public Accommodation이 성적지향을 이유로 서비스 제공을 거절하면 법을 어긴 것이라 명시했더군요. Public Accommodation은 광범위한 문구입니다. 손님을 상대한다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제과점은 당연히 포함되구요. 오레곤은 미국 헌법이나 다른 주에 비해 동성애자를 위한 보호에 앞서가는 주인듯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과점 주인에게 별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항소심에서 벌금 액수를 줄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결정 자체를 뒤집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 판결을 보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기본적 권리도 아니고 거절당함으로 겪는 불이익이 크지도 않은데 파산으로 몰고 갈 15만불의 벌금이 매겨지는 상황이요. 그래서 역차별이라 생각한 겁니다. 제과점 주인은 찬성하지 않는 동성애 결혼에 자신이 정성들여 만든 케익이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화가가 자신의 작품이 새누리 당사에 걸리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것처럼요. 제게는 동성애 커플이 인간의 기본 권리에 있어 차별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듯, 제과점 주인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도 중요합니다. 


세상은 변해갈겁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저로서는 동성애자가 사회적 약자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이미 보호받고 있고, 오히려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자들이 공격받는 세상입니다. 이전에 가해졌던 차별을 보상하기 위해 밸런스를 맞추려고 하는 거지만, 중심은 어느새 반대쪽으로 기울었다고 느껴집니다.


한가지 이해를 구합니다. 기독교인은 동성애자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죄라 말하는 것을 죄라고 동의하는 겁니다. 물론 동성애 혐오를 참다운 신앙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잘못입니다. 어쩌면 그 제과점 주인도 동성애 혐오자일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동정하고 싶지는 않네요. 


말은 많이 적었는데 결론이 안내려지네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앞으로 더 이 문제로 곤혹스러워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아쉽지만 아직 해결책은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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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4. 11:19

프란시스 쉐퍼의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쉐퍼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주의에 대한 그의 관찰과 탄식을 담고 있습니다. 


왜 쉐퍼는 복음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할까요? 간단히 말하면 복음주의가 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무릎꿇지 않고 세상에 적응되며 결국 자유주의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산 정상에 있던 얼음이 녹아흐를때 산의 서쪽으로 흐르는 것과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지면에 가서는 엄청난 거리의 차이를 가지듯,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처음에는 사소한 차이인듯 하지만 결과적으로 진리 안에서 남느냐 아니면 진리를 거부하고 배교의 길로 가느냐의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쉐퍼는 성경이 절대적으로 옳고 그 성경을 절대적으로 믿지 않으면 결국 세상과 타협하게 된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자유주의 신학은 배교이고, 자유주의 신학과 같이 하는 모든 행위 또한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낙태나 동성애에 대한 다른 태도는 처음의 아주 작은 차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이런 유연한 태도가 복음주의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겁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쉐퍼는 대결을 말합니다. 사랑이 담긴 대결이요. 사랑을 담았지만, 쉐퍼에게 세상은 분명한 선을 그어야할 대결의 대상입니다. 결코 타협은 없습니다. 


청년의 때에 이 책을 읽었다면 쉐퍼의 말에 완전 동의했을 겁니다. 하지만, 쉐퍼가 말하는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도 사실은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다 생각하는 해석"을 믿는다는 겁니다. 세상에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게 가능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글자 하나 하나에 전혀 오류가 없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문자 그대로 볼 때 보이는 분명한 모순이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근본주의든, 복음주의든, 자유주의든 모두 성경에 대한 해석입니다.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그렇기에 나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 자신할 수 없는 겁니다.   


세상과의 타협을 경계합니다. 진리에서의 이탈을 합리적인 해석이라 포장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과 합당하지 않은 차이는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누가 그 경계를 그을 것인가는 의문입니다. 쉐퍼가 그 줄을 그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그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쩌라는 거냐? 답이 뭔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쉐퍼 의견에 완전히 동감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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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31. 13:22

페이스북에서 진행되는 감사 릴레이를 받아 적은 글입니다.


=========


세상이 참 말이 아닙니다. 300명 넘게 죽임을 당했지만 이유도 정확히 모릅니다. 이유 좀 알자는 애원이 빨갱이짓으로 몰립니다. 시리아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사냥을 당하고, 팔레스타인의 많은 이들이 폭격에 목숨 아니면 삶의 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진행되는 감사릴레이에 불편해하는 시선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아직도 몸부림치는 유가족들이 있는데 좋은 가족 주셔서 감사하다는 고백이 자랑처럼 보이지 않겠느냐, 이유야 어떻든 덕이 되지 않는다라는. 일정 부분 동의가 됩니다. 


그럼에도 감사는 크리스찬의 정체성입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는 감사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범사란 모든 일을 말합니다. 선택 사항이 아니지요.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이라 했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살다 보면 즐거운 일도 있고, 화나는 일도 있습니다. 전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습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더 없으니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라는 말을 들었던 순간이 기억 납니다. 그때 제가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고생만 하시다 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감사는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는 없다 생각합니다.


한글 번역에선 명확하지 않지만, 영어는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로 번역합니다. Give thanks to all circumstances가 아니구요. 모든 일이 감사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 마음이 뻐근한 기억이 있고 가슴에 돌을 얹어놓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일들에 대해 저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더 큰 가치와 목적을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을 통하여 저를 성장하게 하는, 예수님을 조금 더 닮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 아픈 일, 힘든 일 생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고난을 거치게 하시고, 그 과정 속에 우리를 성장시키신다는 겁니다. 은혜지요. 그래서 저는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감사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제목들을 적어봅니다. 


첫째, 한국은 제가 태어나고 애정하는 곳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회가 발전해야하는데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고 있어 마음이 아픕니다. 도데체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 좋은 세상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음이 감사합니다.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저와 제 가족만 챙기며 살수 있지만, 아파하는 이들과 같이 아파하는 애통함을 가짐이 감사합니다. 단식으로 유가족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건강도 감사합니다. 


둘째, 돈과 거리를 두며 살았습니다. 가난한 시절을 거쳤고, 직장생활을 한 이후로도 넉넉하게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뭐 잘못한 건 없습니다. 다만 남들에게 생기지 않는 일로 손해를 보고, 남들에게 생기는 이득은 피해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이 탓하지 않고, 제 책임이라 생각하고 더 열심히 살려는 마음 주심에 감사합니다. 주기적인 어려움 속에 교만하지 않게 된 것도 감사하고, 가난을 겪었기에 가난을 이해할 수 있음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넉넉하지 않아도 다른 이를 돕고 섬기는 마음을 가진 아내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라면 제 코가 석자라 주위 사람을 몰라라 했을텐데 아내 덕분에 다른 이를 섬기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셋째, 여러 불의한 목회자를 거쳤음에도 교회 떠나지 않은 건 기적입니다. 바람 핀 목사, 교회돈 횡령한 목사 등 여럿 거쳤습니다. 개신교인이라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한국 교회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붙잡아 신앙 지키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썩어가는 개신교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교회를 맘에 품고 기도하게 하심이 감사합니다. 고비마다 좋은 스승을 만나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감사 릴레이를 전해준 이 은상 목사님 감사합니다. 원래 3일 계속 하는게 규칙이라 하네요. 그런데 오늘 적은 것에서 교만한 저의 모습을 봅니다. 상황에 따르지 않고 진리를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하지만, 그래도 나는 훌륭해 하는 건 교만입니다. 내일도 그런 모습이 보이면 감사 제목은 혼자만 보고 나누지는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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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21. 13:36



항상 제 마음에 있는 다섯권의 신앙서적을 소개합니다. 책 선물을 할 때 이 다섯권을 먼저 고려합니다. 워낙에 좋은 책들이고 유명한 책이라 읽은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 책들이 신앙의 성장에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제목이 나이들어 보입니다. 전에는 이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텐데, 어느덧 저도 청년이라 우길 수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ㅡ.ㅡ 굳이 청년을 지목한 이유는 그 시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참 성장할 수 있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를 돌아볼 때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질문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청년들에게 권합니다. 채현국 이사장이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라 했던 것을 기억할 겁니다. 지금 한국 개신교는 욕먹을 짓을 참 많이 하고 있습니다. 소위 교회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먼저 복음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도 한 때는 순수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저들처럼 성장하지 않으려면 지금 더 열심히 말씀과 세상을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소개한 이 책들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1.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 고든 맥도날드


제 블로그에서 여러번 소개했었던 책입니다. 이 책은 신앙의 외면적인 면이나 행동적인 면이 아닌 내면세계라 지칭한 영적인 부분을 다스리라 강조합니다. 저자는 내면의 영역을 동기부여, 시간사용, 지혜와 지식, 영적인 힘, 회복(휴식)으로 나누어 각 영역에서 어떻게 내면의 질서를 유지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나갈지 깊이 있는 가이드를 제시합니다.


특히 각 장마다 나오는 "내면세계가 무질서한 사람들을 위한 조언"들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 중 몇개를 옮겨 봅니다. "나의 내면세계를 질서 정연한 상태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러한 질서로운 상태를 지키기로 매일같이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 , 그것은 내가 날마다 지식과 지혜 안에서 성장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 , 그것은 늘 나의 삶의 영적 중심부를 드넓히기로 결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서문과 열네개의 장 그리고 후기로 되어 있습니다. 330쪽 정도 되는데 빈틈 없이 알찬 내용으로 차 있습니다. 한 번 읽고 말 책이 아닙니다. 옆에 두고 내면세계의 질서가 흐트러졌다고 느껴질 때마다 꺼내어 보시기 바랍니다.


2. 순전한 기독교 - C.S. 루이스


루이스에게는 항상 '기독교 최고의 지성'이라는 말이 따라 붙습니다. 그만큼 그는 탁월한 지성으로 많은 이들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도왔습니다. 이 책은 라디오에서 일반인 대상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던 내용을 바탕으로 쓴 책입니다. 루이스는 기독교 안의 여러 교파들을 가로지르는 (카톨릭을 포함해서) 가장 근본적인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이 책에서 정리하였습니다.


루이스는 인간이란 무엇인지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종교성을 탐구한 후, 하나님과 예수님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 기본적인 신앙 위에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보편적 도덕을 포함해, 더 높은 차원의 행동 기준을 제시합니다. 마지막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신학적인 질문들(예를 들어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합니다.


누군가 "만원밖에 없고,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순전한 기독교를 사서 봐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중요한 책입니다. 기독교가 왜 '개독교'가 아닌지, 기독교가 얼마나 훌륭한 종교인지 알 수 있습니다.


3. 소명 - 오스 기니스


제자로서 살려고 한다면 누구든 소명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나의 소명은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갈까 하는 질문들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 신학을 해서 목회자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려도 해봅니다. 저도 그랬었습니다.


이 책에서 오스 기니스는 바로 이 질문에 집중합니다. 부름 받았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각자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도록 부름받기 전에 먼저 어떤 존재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어떤 존재가 되어야하는지의 단계적 소명의식은 세상일을 하찮게 생각하는 중세의 왜곡이나 무슨 일이든 괜찮다는 현대의 왜곡 모두 피할 수 있게 해줍니다.


소명은 한번 정해진 무엇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는 자세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삶의 구체적 진로가 정해지기 전에, 혹은 이제 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할 때 이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랍니다.


4. 아직도 가야할 길 - M. 스캇 펙


저자인 스캇 펙은 나중에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이 책을 쓸 때는 아직 신앙을 갖기 전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추천하는 이유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는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정신과의사인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왜 사람이 성장해야하는가, 왜 유아적인 사고나 종교적 맹신에서 벗어나야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선악과의 문제를 성장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게으름'은 '죄'라는 시각을 제시합니다.


삶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훌륭하게 사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왜 그 길을 가야하는가 질문해 봐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 위해서는 젖을 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과정에 대해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음에도 다분히 성경적인 길잡이를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닥치는 여러 어려움이 우리를 단련시키어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훈련이라는 것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5. 그리스도의 십자가 - 존 스토트


다섯권중 유일한 신학책입니다. 신학을 전공해야 읽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네권에 비해서는 읽기가 어려운 편입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은 '기독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인 존 스토트는 누구나 인정하는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설교가요 신학자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십자가'에 집중합니다. 왜 십자가가 필요했는지, 십자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의'라는 관점에서 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어야하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경외감마저 들게 됩니다. 왜 기독교를 "불타는 논리 (Logic on Fire)"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신학적으로 어떤 자세를 취하든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십자가를 뺀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제임스 패커는 "옷을 팔아서라도 이 책을 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좋은 책입니다. 십자가에 대해 알고 싶다면 반드시 거쳐야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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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13. 02:00

기독교 국가도 아닌데 여기 저기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들린다. 문창극 총리 후보의 '일제 지배와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라는 발언 때문이다. 다른 경기 다 지더라도 일본은 무조건 이겨야하는게 한국 정서인데, 그걸 건드렸으니 아무래도 총리 되기는 힘들지 싶다. 그거야 순리에 의해 결정될 것이고, 그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그의 강연을 원본으로 보았다. 없는 시간 쪼개어 영상을 본 것은 내가 속한 온누리 교회의 장로에 대한 최소한 예의기도 하고, 가감없이 그가 말한 진의를 직접 파악하고 싶어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하나님의 뜻' 발언은 교회 안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말의 사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한일병탄이 있기전, 조선의 상황은 좋지 않았고 일제 지배는 우리 민족이 깨어나게 해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이다. 놔두면 공산주의에 넘어갈 뻔한 나라 분단되게 해서 남한을 지키고, 미국의 도움을 계속 받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조선은 미개했고, 공산주의는 게으른 조선민족이 좋아할만한 사상이었다는 말이 타당하냐는 질문을 뺀다면, 교회안에서 신도들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제 지배나 분단을 정당화한 것이 아니라는 문창극의 억울해 함이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누구는 이완용의 재림이라 말하는데, 전체 맥락을 보면 그 정도는 아니다. 


나를 비롯해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게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선택적 관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크리스찬은 암이 걸렸다 기적적으로 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 말하고, 암으로 죽게 되어도 하나님의 뜻이라 받아들인다. 교회가 갈라지면 양쪽 모두 하나님은 내 편이다 주장하고, 또 정말 그렇게 믿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느게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은 도데체 어느 편에 서 있는 것이냐는 거다. 내가 해석하고 싶은데로, 내게 유리한데로 선택해 '하나님의 뜻'을 갖다 붙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어지도록 만드시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한 대로 참새 한 마리나 들풀 하나도 그분의 주권 밑에 있다는 것이 크리스찬의 믿음이요 고백이다. 그렇기에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다. 나에게 일어난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거다. 


그럼에도 인과관계는 조심해야 한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팜으로 십자가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종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유다의 범죄를 배후에서 조종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악한 행위로 받은 고난을 은혜로 바꾸는 하나님이시지만, 악한 행위를 만드시는 분은 아니다.


몇년전 정리해고 후 한동안 직장을 못구해 고생한 적이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기가 감사하다. 겸손을 배웠고, 이웃의 어려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 고난을 만드셨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스스로 힘듬에 처하게 만든 것이지, 겸손을 배우라고 나를 실직시킨 것은 아니다. 그 상황에서 더 좋게 만드신 것이지. 


문 후보자가 식민지 근대화론자인지 식민지 수혜론자인지 모르겠다. (후자에 가까운듯 하다.) 어쨋든 일제의 지배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해도, 옆동네 침략해 노예로 삼고, 일 잘하라고 집 지어주고 잘 먹인 것에 불과하다. 그 시기는 우리 민족에게 고통이었고,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것은 그들의 악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 상황에도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지켜주셨음에 감사할 수는 있지만, 일제의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 선언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게 무엇이 있나. 당장 세월호 참사도 하나님의 뜻이 되는 건가? 하나님은 악'도' 사용하신다. 하지만 악을 만들어내시는 분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성을 허락하신건 분별하라 주신 것이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느 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악인지 분별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를 이끌어가는 그분의 편에 제대로 설 수 있다. '모든게 팔자'라는 식으로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라 이름 붙이면 안된다. 올바른 역사의식이 필요한 이유다. 


복지 문제나 한일관계 청산 등 그의 발언을 살펴 보면, 그는 보수를 넘어 극우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뜻' 발언이 낙마의 원인은 아닌듯 하지만, 총리가 되기엔 부족해 보인다. 더구나 그가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다른 분 같다. 모르겠다. 그가 믿는 '중요한 고비마다 대한민국을 지켜 주'다 '베일 뒤에서' 나타나 박근혜를 당선시켜 한국 역사에 개입한 그 신은 미개한 조선으로 일제의 지배를 받게 했을 지도. 하지만 그 신이 내가 믿는,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고 믿는 그 하나님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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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27. 06:02

크리스찬은 답을 가진 사람들이다. 최소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도, 어떠한 궁지에 처해 있어도 의지하면 해결해 줄 분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렇기에 고난도 감사함으로 지날 수 있고, 절망함이 마땅한 상황에도 희망을 붙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때로 다른 이의 아픔에 둔감하다. 같은 상황에도 체감하는 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겪었던 상황은 어떤 이에게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려움일 수도 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지할 분이 있었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최근 몇달동안 자살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의 시작은 문학이었다. 자살하는 사람에 대한 소설을 읽고 평을 들었다. 처음 든 생각은 그들의 선택은 틀렸다였다. 하지만 문득 내가 너무 쉽게 답을 던지고 있구나 깨달았다. 

세모녀의 자살이 있었다. 노동당 부대표도 자살하고, 장애인도 자살했다. 공부하던 학생도 자살하고, 답을 가르치던 목사도 자살했다고 한다. 그들이라고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세상에 아픈 사람이 너무 많다. 눈 앞에 벌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벌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정답은 정답이다. 내가 가진 그 답을 나누고 싶다. 힘들어 하는 이들이 내가 간직한 소망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게 도와주고 싶다. 그러나, 아픔에 대한 동감 없이 쉽게 던지는 해결책은 또 다른 폭력이다. 현실은 그대로 개판인데 잘 될거라는 어설픈 위로는 공허하다. 왜 포기해 노력하면 되잖아라는 충고는 애써 잡고 있던 끈마저 놓아버리게 할 수 있다. 믿고 기도하자는 말은 아직 답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답이 아닌 거다. 

더 민감해야겠다. 내가 가진 답을 제시하기 전에, 아픔을 같이 느끼는 것이 먼저다. 그게 시작이다. 

...

갑자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시는 곳까지 자신을 낮추신 그 분의 마음이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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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15. 15:05

작년말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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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가족들이 모여 가족 기도제목을 정합니다. 리스트를 만들어 냉장고에 붙이고 일년동안 같이 기도를 하지요. 연말에 보면 일년 동안 부어주신 풍성하신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지난 성탄절. 조용하고 여유로운 하루 끝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2013년 올해의 기도제목을 돌아 보았습니다. 열개중 다섯개의 기도제목은 기도한 그대로 응답해주셨더군요. 그중 첫번째로 응답받은 건 예지의 기도제목인 다비였습니다 ^^ 그리고 예한이에게 좋은 대학을 허락하신 것, 저에게 좋은 직장을 허락하신 것, 아내 성경일독하고 중보기도하게 하신 것.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감사하게 해달라는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어떤 기도제목은 기도와는 다르게 응답하셨고, 어떤 기도제목은 ...좋게 해달라는 저희의 원함과는 반대로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그 분의 손길이 느껴졌기에 원하는데로 들어주시지 않았지만 응답하셨음에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2014년의 기도제목도 같이 나누었습니다. 첫번째 기도제목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게"입니다. 새로 정한 열개의 기도제목을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고 마음을 모아 기도하려구요. 그 기도 속에 하나님을 더 알게되고 예수님을 더 닮아가는 저와 저희 가족이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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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6. 05:13

7월 27일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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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단체가 동성애 금지법을 발의한다는 기사를 봤다.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두가지다. "너나 잘 하세요"와 "쓸데 없는 짓 하고 있다"이다. 

여기까지 보면 대부분 내가 동성애를 찬성한다 짐작할 것 같아, 동성애를 '죄'라고 믿는다는 것을 미리 밝히고 시작하련다.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 말하는 부분은 사실 많지 않다. 열군데 미만으로 알고 있다.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 말하지는 않는다고 해석하는 성경학자들은 각 구절별로 적절한 설명을 붙여놓았다. 예를 들어 소돔의 죄는 동성애보다는 사회적 불의다라는가, 남색하는 자는 남자를 대상으로 매춘하는 행위를 말한다라는 식이다. 더불어 성경은 신앙에 대한 당시의 해석이기 때문에 모든 구절은 지금의 시각으로 재조명되어야한다는 걸 강조한다. 

하지만 성경이 만들어지는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고 믿는 나로서는 그 해석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성경은 전체로 하나의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 편지나 수필의 모음집이 아니라는 거다. 그렇기에 각 구절별로 다른 해석은 가능할지 몰라도 성경 전체적으로 보아 하나님이 동성애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 다른 해석은 없다고 믿는다. 그건 내 신앙이며 지식인 코스프레를 위해 의견을 바꿀 의향은 없다. 

(글의 주제는 다음 이야기이지만, 동성애에 관한 해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기꺼이 답하겠다.)

그런 내가 봐도, 동성애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태도는 한마디로 너무 치사하다. 레위기는 동성애를 가증한 일의 하나로 말한다. 그외에 우상숭배, 간음, 혹은 수간도 가증한 일에 들어간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는 것도 가증한 일이라 말한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동성애만 가지고 이 난리인가? 그건 동성애자가 사회적 소수이기 때문이다. 만만하기 때문이다. 

간음은 어떤가? 강남에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간음에 대한 설교를 안한다고 한다. 부부 같아 보이지만 부부가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다는 거다. 다수의 목사들이 간음을 하고 그걸 서로 알면서도 쉬쉬하는 집단에서 어떻게 간음이 죄라고 세상에 외칠 수 있겠나. 그런데 동성애는 눈에 띈다. 적어도 여기에는 자신있다 생각하는 거다. 하나님이 가증한 일이라 칭한 것을 수없이 범하면서도 자신은 돌아볼 생각 없이 소수자에 대한 혐오에 편승해온 거다. 

만약 내 친구가 부인 이외의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진다면 말하겠다. 간음은 죄라고. 거짓말을 한다면 말하겠다. 그건 나쁜 거라고. 이와 동일하게 동성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겠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혐오할 생각은 없다. 다 부족한 인간이니까. 내가 떳떳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요즘 교과서가 동성애를 옹호한다고 비판하는 만화를 찾아봤다. 거기서 나는 혐오이외의 다른 감정을 볼 수 없었다. 그게 지금 한국 기독교가 하는 거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 

나는 동성애를 차별하는 어떤 행위에도 반대한다. 사회적 시스템이란 그런 거다. 차별 금지법이니 동성애 결혼에 대한 허용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차별받지 않게 하겠다는 거다. 세상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만드는 것은 교회의 역할이다. 그걸 제대로 해햐한다. 그런데 차별함으로 그 일을 이룰 수는 없다. 

더불어 한국 교회는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혐오할 자격도 없다. 최소한의 자정능력이라도 갖추고 세상에 외쳤으면 좋겠다. 제발 너님들이나 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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